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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뮬리 핫 스팟" 기사에 눈이 번쩍 뜨였다.
 "핑크뮬리 핫 스팟" 기사에 눈이 번쩍 뜨였다.
ⓒ 이지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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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히 인터넷을 하던 중에 "코로나 끝난 해에 가 볼 만한 핑크뮬리 핫 스팟"이란 기사 제목과 물결치는 핑크 뮬리 사진에 눈이 번쩍 뜨였다. 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핑크뮬리의 물결이 너무 탐스러워 코로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기사는 전국 각지의 핑크뮬리 명소를 소개했다. 경북 칠곡, 강원 강릉과 평창, 경기 안성 등지뿐만 아니라 내가 사는 서울 마포구 하늘공원도 있었다. 하지만 하늘공원은 코로나19로 한시적 전면 폐쇄 중이라고 한다.

가까운 곳에서 쉽게 볼 수 없다니 더 안타까워 그랬는지, 코로나로 오랫동안 집콕하던 생활에 신물이 나 그랬는지, 핑크뮬리 언덕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에 발동이 걸렸다. 좀 멀더라도 꼭 보러 가야겠다는 다짐이 불쑥 솟았다. 언제쯤 갈 수 있으려나 머리를 굴려보았다. 다 큰 애들은 당연히 가자고 해도 안 갈 테고 남편하고만 일정을 맞춰 다녀오면 되겠다 싶었다. 

'부모 내공'이 쌓여갈수록 멀어진 아이들 

당일이건, 1박이건 아이들과 함께 집 밖을 나서는 게 드문 일이 된 지 꽤 되어간다. 애들이 청소년기에 접어들면서 슬슬 부모를 잘 따라나서지 않게 된 것이 주된 이유이다. 작은 아이는 친구들과 노래방이나 카페에서 수다 떨고 노는 걸 더 좋아하고, 조용한 큰 아이는 집에서 혼자 차분히 쉬는 걸 더 좋아하니 점점 온 가족이 다 함께 나들이하기는 드문 일이 되어갔다. 어려서는 가자는 대로 잘만 따라다니더니, 참 격세지감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새로운 경험 시켜주겠다고, 다양하고 신기한 것들을 하나라도 더 보여주겠다고, 전국 방방곡곡을 사계절 내내 쉴 새 없이 돌아다녔다. 아이 키워본 부모들은 다들 알겠지만, 어린아이들과 함께 나들이나 여행을 하다 보면 여러 가지 돌발 상황이 곧잘 생긴다. 

간만에 부모님과 삼촌, 이모 가족들까지 대가족이 여행길에 막 나섰는데 아이가 갑자기 열이 나거나 아프기 시작할 때도 있고, 꽉 막힌 고속도로에서 휴게소 이정표는 보이지도 않는데 용변이 급하다고 차 안에서 임시방편으로 해결하는 일도 있다. 또는 놀이공원에서 앞에 잘 있던 아이가 눈 깜짝할 새 사라져 혼비백산하여 찾으러 다닐 적도 있고 말이다. 

크고 작은 이런 돌발 상황들로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헌신과 애정을 시험하는 게 아닐까 싶을 때도 있었다. 무늬만 부모였던 초짜 부모를 속까지 진짜 부모로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해 말이다. 아이들에게 쏟은 헌신과 사랑만큼 부모로서의 내공이 단단해지며 아이들에 대한 애틋함도 쌓여갔던 것 같다.  
 
   내가 아이와 여행 중 겪은 돌발상황 중의 백미는 외국인들로 꽉 찬 미국 관광지의 어느 식당에서였다.
  내가 아이와 여행 중 겪은 돌발상황 중의 백미는 외국인들로 꽉 찬 미국 관광지의 어느 식당에서였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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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이와 여행 중 겪은 돌발상황 중의 백미는 외국인들로 꽉 찬 미국 관광지 어느 식당에서 아이의 토사물을 양손으로 받아낸 일이다. 아이는 배가 많이 고팠던지 느끼한 클램차우더 수프가 나오자마자 맛있다며 허겁지겁 먹어 치웠는데, 그러고 얼마 안 돼 갑자기 배가 아프고 토할 것 같다고 했다.

부리나케 아이를 데리고 화장실로 가려고 일어서는데, 늦었다. 이미 아이는 방금 전 먹은 것들을 식탁 위와 바닥에 바로 뿜어대기 시작했고 나의 반사신경은 그저 양손으로 그것들의 일부만을 받아냈을 뿐이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그저 참담하고 막막했다. 아이는 젖은 채 어쩔 줄 모르고 서 있고, 주변 테이블 손님들의 미간 찌푸린 표정과 언짢아하는 대화들이 귀에 들어왔다. 이게 웬 날벼락이냐 싶었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사라져 버리고 싶었고, 나 몰라라 내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했다. 나는 유일하게 그 상황을 수습해야 하는 아이의 "엄마"임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주변 테이블에 일단 너무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하는데 옆 테이블의 애기 엄마가 괜찮다고 자기도 늘 겪는 일이라며 위로를 건넸다. 진심으로 그 말이 너무 고마웠다. 아이 엄마가 아이 엄마 사정을 알아주는 것은 역시 국적과 인종을 뛰어넘는 인류 공통의 공감대였다. 

덕분에 힘을 내, 바닥 치우기에 난색을 표하는 종업원에게도 거듭 사과를 한 뒤, 아이를 씻기러 화장실에 데려갔다. 아이 몸 상태를 살피고, 아이가 더 위축되지 않도록 짐짓 괜찮다고, 별일 아니라며 아이를 다독였다. 속으로는 여전히 심장이 벌렁벌렁 두방망이질 쳐대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런 식으로 십몇 년을 온 힘을 다해 키웠는데, 요즘 나들이 가자는 나의 제안은 아이들에게 아무런 무게감이 없다. 이제는 컸다고 각자의 취향과 식성의 호, 불호를 따져가며 자기 의견을 내세우는데 대응하기가 점점 버거워질 뿐이다.

혹여 오랜 설득 끝에 가까스로 동행해봤자 출발 때는 물론 나들이 내내 우거지상이고, 빨리 집에 가자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그러니 내가 알아서 아이들에게 어디를 가자고 제안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무척이나 반가웠던, 반나절만의 짧은 나들이

이번에 핑크뮬리도 당연히 남편하고나 시간을 맞춰보려고 거실에서 이야기 중이었는데, 시험기간이던 작은 아이가 어쩐 일로 자기도 가고 싶으니 시험이 끝나는 다음 주말까지 기다려 달란다. 놀란 마음으로 그럼 다음 주 토요일에 가자고 정하려는데, 불현듯 큰 아이마저 방에서 나오며 다음 주 토요일은 자기가 학원을 가야 하니 안되고, 일요일에 가는 게 어떠냐고 묻는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어쩐 일로 두 녀석이 다 함께 가겠다고 나서는지 너무 반가워서 2주나 미뤄지게 되었어도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그 동기가 시험 공부와 고3 수험생이라는 심리적 압박감에서 비롯되었든, 나처럼 코로나 집콕에 지친 마음에서 비롯되었든 아무래도 좋았다. 
 
   정말 오랜만에 청소년 자녀들과 핑크뮬리를 보러 갔다.
  정말 오랜만에 청소년 자녀들과 핑크뮬리를 보러 갔다.
ⓒ 이지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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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후, 안성 핑크뮬리 언덕에서 아이들과 함께 깔깔거리며 인생 샷을 찍고, 옛날 이야기도 나누며 언덕길을 유유자적 걷는데, 마음이 따뜻한 가을 햇살처럼 새털같이 포근하고 가볍기만 했다. 비록 반나절만의 짧은 나들이였지만, 정말 간만에 스스로 동행해 준 아이들이 참 고마웠다. 오래지 않아 또 함께할 다음 나들이를 고대하겠다고 진심을 꾹꾹 담아 이야기했다. 

나는 아직도 아이들과 함께하며 부모로서의 내공쌓기를 더 하고 싶은데, 아이들은 이미 훌쩍 커서 그들만의 세계를 스스로 척척 구축해 나가기에 여념이 없는 것 같다. 시간이 참 빠르다. 부모로서의 인생이 참 애잔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브런치에도 함께 실립니다.


태그:#청소년 자녀, #가족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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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궁금한 게 많아 책에서, 사람들에게서 답을 찾아가는 여정을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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