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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현충원 박은식 지사 묘소
 서울 현충원 박은식 지사 묘소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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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래 동양에서는 사람에게 두 가지 영혼이 있다고 여겨져 왔다. 혼(魂)과 백(魄)으로, 혼은 사람이 죽으면 육체에서 빠져나와 하늘로 올라간다. 백은 사람이 죽은 후에도 몸 속에 남아 있다가 시체와 더불어 흙이 된다. 그래서 혼비백산(魂飛魄散)이라는 말이 성립한다. 넋(魂)이 날아가고(飛) 넋(魄)이 흩어진다(散)는 뜻이니 혼과 백은 서로 다른 영혼인 것이다.

박은식(朴殷植)도 1915년에 펴낸 '고통의 한국 역사' <한국통사(韓國痛史)》의 결론에 혼과 백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인식을 보여주었다. 그는 '국교(國敎) 국학(國學) 국어 국문(國文) 국사는 국혼(國魂)에 속하는 것이요, 전곡(錢穀) 군대 성지(城池) 함선 기계 등은 국백(國魄)에 속한다'면서 '국혼의 됨됨은 국백에 따라서 죽고 사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교와 국사가 망하지 아니하면 국혼은 살아 있으므로 그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 외에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 등의 역저를 저술한 사학자로 유명하지만,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을 지낸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그는 1859년 9월 30일 황해도 황주군 남면에서 태어나 1925년 11월 1일 상해에서 서거했다. 유해가 조국으로 돌아와 서울 호국원에 안장된 때는 서거 68년 후인 1993년이다.

정치에 실망한 박은식, 학자의 길을 걷다

서당 훈장의 아들로 태어난 박은식은 20대 초반까지 한학과 성리학 공부에 몰두했다. 과거 시험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지만, 선비 된 사람으로서 나라 돌아가는 사정에 대한 근심걱정조차 하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그래서 서울에 머물러 있던 1882년, 임오군란을 보고 느낀 23세 우국 청년의 마음을 담아 국왕에게 시무책을 바치기도 했다.

명문가 자제도 아니고 현직 고관도 아닌 그의 시무책을 임금이 국정에 반영할 리 없었다. 그는 실망감에 사로잡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향 후 그는 어머니의 간절한 요청을 받아들인 후 향시(鄕試) 특선에 뽑혀 6년 동안 능참봉 생활을 했다. 그 외는 성리학 공부에 전념하여 서북 지방은 물론 중앙에까지 학자로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그는 39세이던 1898년부터 민족운동에 뛰어든다. 독립협회에 가입했고, 생각도 위정척사에서 개화사상으로 전환하였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과 논설위원을 맡아 활동한 그는 "1905∼1910년 사이 다수의 신문과 잡지에 국권 회복의 실력 배양을 위한 신교육 구국사상·실업 구국사상·사회관습 개혁사상·애국사상·대동사상 등을 설파해 애국계몽운동을 고취함으로써 한말 최고의 애국계몽사상가로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언론운동과 동시에 교육계몽운동에도 열성을 바쳤다. 나라의 운명을 되살리고 백성들의 삶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교육 발전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인식했다. 당시 전국 최대의 비밀 결사체였던 신민회의 활동 방침에 따라 그는 1906년 서북(평안도) 사람 중심의 교육 계몽운동 단체 서우학회를 조직하고, 다시 1908년 관북인(함경도) 중심의 한북흥학회와 통합을 이루어 서북학회를 창립했다. 서북학회 회장을 맡은 그는 서울에 서북협성학교와 오성학교를 세웠다.

그는 독립협회가 해산된 후 관립 한성사범학교 등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기도 했었다. 본래 민족교육에 관심이 높았던 그는 서북협성학교와 오성학교의 교장을 겸임하면서 1909년 말까지 전국에 63개 지교(현 분교)를 설립하는 등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하는 신교육 운동을 왕성하게 펼쳤다.

만주로 망명하는 박은식

그러나 결국 나라는 1910년 8월 아주 문을 닫게 되고 말았다. 일제는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서북학회 월보〉 등 민족주의 성향의 신문과 잡지를 모두 폐간시켰고, 박은식의 저서를 비롯해 민족혼이 담긴 책들을 모두 금서(禁書)로 규정했다. 그는 역사서를 계속 집필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매진하기 위해 1911년 5월 압록강을 건넜다.

만주로 망명한 박은식은 서간도 환인현 흥도천 윤세복의 집에 머물면서 <동명성왕 실기(東明聖王實記)>, <발해 태조 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명림답부 전(明臨答夫傳)>, <천개소문 전(泉蓋蘇文傳)> 등을 집필했다. 고구려를 건국한 동명성왕,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 고구려 최초로 국상에 올라 172년(신대왕 8) 후한의 공격을 대파한 명림답부, 당나라와 당당하게 맞선 연개소문 같은 민족 영웅들을 다룬 저서들은 민족의식 고취용 교재로 많이 사용되었다.

그는 1912년 3월 이후 북경, 천진, 상해, 남경 등지를 순방하면서 중국에 망명 와 있는 지사들과 독립운동 방안을 폭넓게 논의하였다. 그 결실로 7월 상해에 동제사(同濟社)가 결성되었다. 동제사는 중국 내에 조직된 최초의 한국 독립운동 단체로, 이사장 신규식(申圭植)·총재 박은식 외에 신채호(申采浩)·윤보선(尹潽善)·조소앙(趙素昻)·홍명희(洪命熹) 등 독립지사 300여 명이 회원으로 가입한 큰 조직이었다.

임시정부 이전 상해 한국인의 중심 역할을 한 동제사

동제사는 중국 혁명 인사들과 연대를 모색하면서 한편으로는 상해에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교육기관을 세운 것은 독립운동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동제사는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상해 한국인의 중심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 사이 <안 의사 중근 전(安義士重根傳)》을 저술한 박은식은 여러 해 동안 심혈을 기울여 저작해온<한국통사> 원고를 3편 114장으로 완성하여 1915년 드디어 출간했다. 대원군이 정권을 잡은 1864년부터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까지의 한국 근대사를 다룬 <한국통사>는 특히 일제 침략사에 초점을 맞추어 집필되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대외적으로 일제 침략의 잔학성과 간교성을 폭로 규탄하는 한편, 대내적으로 동포들의 통분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는 서문에서 "예로부터 나라는 멸할 수 있어도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했다. 나라는 형태이지만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정신이 보존되어 멸하지 않으면 나라가 부활할 시기가 있을 것"라고 밝혔다. 그에게 역사서 저술은 그 자체로 독립운동이었고, <한국통사>는 비밀리에 국내로 반입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독립운동정신을 불어넣었다.
 
서울역 광장 강우규 지사 상
 서울역 광장 강우규 지사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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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 당시 박은식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미 나이 60세였지만 3월 26일 현지 3·1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규합해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을 조직했다.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은 5월 31일 서울 종로 보신각 앞까지 단원을 파견해 일본 국왕과 조선 총독에게 보내는 서한 및 노인동맹단 창립 취지문 수백 장 등을 뿌렸다.

이 거사로 74세 정치윤, 68세 이발, 59세 차대유, 58세 윤여옥, 47세 안태순 등 5명이 일제에 피체되었다. 일제는 고령의 정치윤과 이발을 기소 면제 처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돌려보내고, 윤여옥과 안태순에게 징역 1년, 차대유에게 징역 8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이에 분개한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은 9월 2일 65세의 강우규를 다시 서울로 파견했다. 그날 남대문역(현 서울역) 부임 환영 행사에 참석하는 신임 총독 사이토를 폭사시켜겠다는 담대한 거사 추진이었다. 며칠 동안 장소를 면밀히 답사한 강우규는 신문에 실린 사진을 오려 수십 번 들여다보며 사이토의 얼굴을 익혔다.

행사가 끝나갈 무렵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강우규는 두만강을 건너올 때부터 기저귀처럼 사타구니에 차고 있던 폭탄을 꺼내어 사이토를 향해 힘껏 던졌다. 엄청난 폭음과 함께 폭탄은 장렬하게 폭발했으나 사이토를 명중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65세 노인의 의거와 순국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청년들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 망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65세 강우규

3·1운동부터 1920년 말까지 박은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 상해에서의 여러 활동으로 매우 바쁜 와중에도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했다. 이 책에 박은식은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6년 10월 청산리 대첩까지 우리 민족이 벌인 '피의 역사'를 아주 상세히 기술하였다. 이 책에 실려 있는 '3·1운동기에 있었던 각종 사건에 대한 통계표,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관련 참상 조사표는 당시의 역사 연구 기초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다. 이는 일본 측의 사건 축소 또는 역사 왜곡을 위한 각종 위작된 통계를 비판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되고 있다.(두산백과)'
 
박은식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사진)
 박은식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사진)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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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3월 23일 임시의정원(현 국회)는 "외교를 구실로 직무지(상해)를 마음대로 떠나 있은 지 5년에, 바다 멀리 한쪽에 혼자 떨어져 있으면서 난국 수습과 대업의 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을 뿐 아니라, 허황된 사실을 마음대로 지어내 퍼뜨려 정부의 위신을 손상하고 민심을 분산시킴은 물론이어니와, 정부의 행정을 저해하고 국고 수입을 방해(〈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42호)"한다는 이유로 이승만을 탄핵·면직시키고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사장을 맡고 있던 박은식을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박은식은 노백린을 국무총리 겸 군무총장, 이유필을 내무총장, 오영선을 법무총장, 조상섭을 학무총장, 이규홍을 재무총장에 임명하는 등 내각 개편을 단행했다. 그 후 대통령제가 독재를 유발한다는 판단에서 헌법을 고쳐 일종의 내각책임제 제도인 국무령제를 도입했다. 이승만을 세웠던 대통령제가 독재로 흘렀던 점을 고려하여 대통령 아닌 의회가 중심이 되는 내각책임제를 채택한 것이었다. 또 대통령에 임기 제한을 두지 않았던 것이 여러 문제를 야기했음을 반성하여 국무령의 임기를 3년으로 정했다.

박은식은 개정 헌법에 근거하여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선출한 뒤 그해 8월 사임하고 11월에 서거했다.

태그:#박은식, #강우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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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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