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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 간첩 피해자들에게는 공통적인 경험이 있다. 수사기관이 고문으로 자신의 사건을 조작했다는 점과 검찰과 법원에서 그 억울함을 호소해 보았지만 어디에서도 인정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국가기관을 상대로 고문과 폭행을 주장해 보지만 '고문의 흔적'을 입증할 수 있느냐는 대답이 돌아온다. 검찰 조사 과정에서 고문을 당했다고 하면 고문한 수사기관으로 돌려보낸다거나 심지어 담당 검사에게 욕설을 듣기 일쑤였다. 법원에서도 고문을 당했다고 주장해 보지만 그런 주장은 대부분 무시당했다.

그런 경험이 쌓일 때마다 피해자는 주변에서 점점 고립되어 간다. 국민 개인이 공권력을 등에 업은 국가 기관과 싸우는 것이라면 그 싸움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의 싸움이다. 피해자는 개인이며, 권력은 수많은 이해관계를 가진 이들이 형성한 구조다. 이 싸움이 공정할 리는 만무하다. 증거와 증인은 모두 공권력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국가 기록에 접근하려 해도 접근할 수 없는 것이 태반이다. 무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으려면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데, 국가 조직을 상대로 돈과 시간을 쏟아 부을 수 있는 개인은 많지 않다.

강희철의 구술 = "남도 그렇게 보는데 제일 가까운 가족도 그렇게 보는 거야. 도와줘야 할 가족들이 빨갱이로 이상하게 보는 거. 어떤 아이들은 빨갱이 아버지 안 보고 나가 버려. 나도 MBC 촬영할 때인데 작은어머니가 도와주지 않는 거야. 내 사건 때문에 사촌 동생들이 군대에서 피해를 봤다고.

야, 그 소리를 듣는데 미치는 거야. 세상에 나밖에 없구나. 세상이 다 이상하게 보니까 친척이고 뭐고... 그래서 그거 두려워서 자살하는 사람도 있어. 국가는 조작 흔적을 없애려고 우릴 죽게 만드는 거 같아. 이혼도 시키고. 나도 엄청 죽으려고 했어요. 죽는 것 엄청 힘들더라고."


오경대의 구술 = "우리 아버님이 1950년도에... 6.25 전쟁이 나니까 예비검속으로 행방불명이야. 2011년도에 재판을 하기 시작해 가지고 2015년인가 무죄로 확정됐어요. 근데 어느 잡지에 보니까 보수 단체에서 책자를 낸 걸 보니까 아버지가 큰아들을 이북에서 간첩 교육을 해서 남파시켰다고 나와 있어. 그 책자가 제주 전 지역에 뿌려진 거야.

일반 사람들은 다 그걸 믿어 버리는 거예요. 무죄 판결을 받았는데도. 무죄 판결이 난 게 공표가 되면 모르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책을 본 사람은 다 그렇게 인정해 버리는 거예요. 나는 방송하는 걸 두려워하는 건 아니에요.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한 거예요."

 
오경대씨는 아직도 보수단체에서 출간한 책 내용 중에 부친이 간첩, 빨갱이로 묘사되어 있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오경대씨는 아직도 보수단체에서 출간한 책 내용 중에 부친이 간첩, 빨갱이로 묘사되어 있다며 분통을 터뜨린다.
ⓒ 한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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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피해자들이 트라우마를 겪는 이유가 있다. 

먼저 '은밀한' 곳에서 겪은 일이기 때문이다. 고문은 지하 독방과 같은 곳에서 은밀하게 진행된다. 전기 고문은 몸 어디에도 흔적이 남지 않는다. 구타가 있었다 하더라도 가슴이나 머리와 같이 보이지 않는 곳을 가격하기 때문에 그 또한 흔적이 남지 않는다. 행여 멍 자국이 생겼더라도 생쇠고기를 얇게 뜬 포를 붙이거나 안티푸라민 같은 약품으로 지워낸다. 이러니 고문의 상처를 어떻게 드러내겠는가.

다음으로 피해자가 늘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법'이라는 사회안전망에 기대어 살던 평범한 시민이 정체불명의 사람들에게 낯선 장소로 끌려가 폭행과 고문을 당해 존엄성이 무너지는 일을 겪었다면 얼마나 당황스럽고 무섭겠는가. 심지어 자신의 상황을 가족이나 친구, 주변 사람 아무도 모른다면 더욱 절망적일 것이다. 검사를 만나고, 판사를 만나 자신이 당한 일을 호소해 보지만 아무도 그의 호소를 들어주지 않는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겪게 되면 완전히 고립감을 느끼게 된다.

결국 그렇게 조작된 범죄 사실 때문에 평범했던 시민은 십수 년간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십수 년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출옥해서도 자신을 고문한 수사관이나 시민을 보호하지 못한 국가에 대한 원망보다는 시대를 잘못 타고 난 자신을 원망하며 자책하기 일쑤다.

오경대의 구술 = "동네 사람이나 주변 사람들이 잊어버렸던 기억을 다시 꺼내 가지고 그 사람들이 우리를 볼 때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나는 이것이 제일 고통스러워요. 우리 동네에 900가구 정도가 살아요. 그동안 고향에서 내가 성심성의껏 살아왔는데 재심을 한다고 하고 방송에 나오면 그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마음을 가질 것인가. 죽기 전에 과거를 들춰가지고 사람들의 눈초리를 다시 받는다는 생각을 하니까 두려워요 나는."

자신을 원망하고 자책하는 이유가 있다. 고문의 피해가 자기 일생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자식에게 대물림되는 것이 바로 보안법이다. 대기업이나 공무원은 꿈도 꿀 수 없는 자식들은 결국 일찌감치 삶의 목표를 포기하고 이민을 하거나 심지어 생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런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경이 어떻겠는가.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일로 범죄자가 되고 그 자식 또한 범죄자의 자식이 되어 피워보지도 못한 채 삶을 접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오경대의 구술 = "연좌제로 지금도 자식이 보는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아들이 이탈리아에 이민 가버렸어요."  
 
아버지 오경대 때문에 취업과 사업에 실패한 아들은 이탈리아로 이민을 갔다.
 아버지 오경대 때문에 취업과 사업에 실패한 아들은 이탈리아로 이민을 갔다.
ⓒ 한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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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서 나와 사회에서도 경찰의 감시는 계속되었다. 교도소의 담벼락만 없을 뿐이지 여전히 피해자들은 감옥에 있었다. 경찰은 수시로 피해자의 집과 주변 친구들, 직장을 찾아와 그들의 동향을 살폈다. 그 때문에 어렵게 구한 일자리에서 쫓겨나기 일쑤였다. 직장 내에 '간첩이었다, 전과자였다'라는 소문이 퍼지면 아무도 그와 함께 일하려 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회사는 운영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었다. 결국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직장을 그만둬야 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어디로 가든, 누구를 만나든 늘 허가받고 보고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보호관찰이다.

오경대의 구술 = "처음에 내가 (감옥에서) 15년 살고 나왔을 때가 81년 8월 15일이죠. 그때 (제주) 왔을 때 찾아오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어요. (그나마) 찾아오는 사람이 누구냐면 서귀포 경찰서 형사. 한 달에 제 동향 보고를 한 번씩 써서 갖다달라고 하고, 육지라도 볼 일 있어 가게 되면 허가를 받아야 했어요. 그게 김대중 대통령 됐을 때 해지됐어요. 그 전에는 언제 어디서 몇 시에 누굴 만나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를 다 일일이 보고해야 해요.

이거를 내가 70세 때까지 했어요. 45살에 감옥에서 나왔으니까 25년간 보호관찰을 당한 거지요. 그리고 대통령이 제주도 순방이라도 온다고 하면 형사가 집에 와요. 와서 밭에 가서 일하고 있으면 찾아와서 계속 같이 있는 거예요. 어디 못 가게 잡아두는 거예요. 사찰이죠, 사찰. 그 사람들도 그게 직업이니까 위에서 명령하니까 할 수 없이 했겠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삶에 대한 의욕이 없죠."


강희철의 구술 = "감옥에서 나와서 나중에 깨달은 것이 하나 있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억울함이 있는데 수사관들 때문에 그냥 덮고 있다고 하는 건 말이 안 되더라고. 예를 들어 도배를 하고 사는데 오래되면 곰팡이가 끼잖아요. 그 곰팡이가 두렵다고 가만히 있으면 그 곰팡이가 우릴 갉아먹잖아.

세상을 살다 보면 못된 놈의 공격이 들어오는데 그런 거 두려워서 가만히 있어 버리면 결국 더 죽습니다. 왜냐면 나도 동네에서 친구들이고 친척들이고 처음에는 방송 나가기 전까지는 뒤에서 빨갱이 빨갱이 수군수군했는데 그래도 난 동네 안 떠났어. 왜? 잘못한 게 없으니까. 언제가 진실이 밝혀지면 다 이해하겠지 해가지고 꼼짝도 안 했지.

그런데 밝혀져도 어떤 놈들은 '아, 저 새끼 뭔가 죄 있으니까' 아직도 이런 친구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두려워해 가지고 내가 아무것도 안 하면 그건 말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 알려야 되는 겁니다. 솔직히 색안경 끼고 보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래도 물러서면 내가 인정하고 마는 것이니 절대 물러서면 안 돼요."


그래서 이들은 악착같이 탁본을 한다고 했다. 늙고 병들어 걷는 것조차 힘들지만 그래도 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나오는 것은 기억하기 위한 싸움, 망각이라는 적과의 싸움을 위해서라고 한다. 남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 그들이 사라지면 잊힐 기억을 남겨, 누군가 이곳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고 경고해야 한다고 한다.
 
피해자들이 직접 탁본한 한지들. 그들에게는 여전히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 이 종이에 새겨져 있다.
 피해자들이 직접 탁본한 한지들. 그들에게는 여전히 잊히지 않는 기억들이 이 종이에 새겨져 있다.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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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광보의 구술 = "본인들이 죽어 버리고 묻어 버리면 완전히 없어져 버리는 거 아니야. 우리는 이걸 밝혀내야 해. 솔직히 말해서 내 잘못이 아니니까. 진실은 진실대로 밝혀야지. 사람들 의식하면 절대로 못 해요."

태그:#수상한집, #평화박물관, #지금여기에, #간첩조작, #탁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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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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