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22 17:56최종 업데이트 20.10.23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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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노동자 과로사 대책 위원회가 19일 오전 서울 중구 한진택배 본사 앞에서 최근 심야택배배송을 마치고 자택에서 사망한 김 아무개씨관련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 이희훈

 
지난 8일, CJ대한통운에서 택배기사로 일하던 48세 김원종씨가 과로로 숨졌다. 아침 6시 출근 밤 10시 퇴근, 어림잡아도 하루 15시간 이상의 배달 업무였다. 올해 들어서 여덟 번째 택배노동자 죽음이다. 12일에는 쿠팡 물류센터 일용직 장OO씨는 퇴근 후 한시간 만에 숨졌다. 장씨가 사망 당일 차고 있던 만보기에는 30Km 넘는 거리인 5만보가 찍혀 있었다. 같은 날 36살 한진택배 기사 김OO씨도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4일 전 새벽 4시 28분에 동료에게 보낸 SNS에는 '오늘 택배물량 420개... 너무 힘들다'라는 글을 남겼다.

20일에는 로젠택배 40대 노동자 김OO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에는 회사의 갑질과 생활고 내용이 담겨 있었다. 21일엔 CJ대한통운 운송노동자가 간이휴게실에서 쉬던 중 사망했다. 언론에서는 이들의 죽음을 2020년 택배노동자 00번째 죽음이라고 불렀다. 올해만 벌써 13명이다.

택배 노동자의 연이은 죽음. 그 이면에는 우리 사회에서 해결하지 못한 손쉬운 해고와 저임금의 어두운 노동이 도사리고 있다. 또 모두에게 밝은 미래를 안겨줄 것 같던 4차 산업의 사각 지대에서 컨베이어 벨트의 부품으로 전락한 노동자의 삶이 있다. 코로나19가 가져온 경제 질서의 혼란도 택배 노동자들에게는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다. 그래서 택배 노동자의 죽음이 조만간 끝난다는 보장은 어디에서도 장담받기 어렵다.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CJ대한통운 택배물류현장에서 택배노동자들이 택배 분류 작업을 하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기업은 웃고 기사는 죽어나가는 택배 호황

바코드시스템. 카드(CARD). 카트(CART)를 대형마트 번영의 3대 조력자로 표현한다. 택배 산업도 컨베이어와 바코드 시스템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체계화되고 빠른 배송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택배 물품이 모이는 물류 터미널이나 상하차가 이뤄지는 중간 대리점에서는 컨베이어로 끊임없이 물건이 오간다. 택배 종사자는 컨베이어 속도에 따라서 노동이 제어된다. 쿠팡 물류센터에서 일하다 숨진 장씨의 경우 코로나에 여름 특수까지 겹쳐 물량이 엄청 늘어나 축구장 크기의 물류창고를 뛰어다니며 30초에 한 개씩 상품을 처리했다고 한다.


쿠팡 측은 근로시간이 길지 않아 과로사가 아니라 주장했지만, 하루 5만보로 종종 걸음을 치지 않으면 따라 갈 수 없는 게 자동화시스템이다. 로켓배송에 새벽배송, 당일배송 등등 시스템이 하나씩 추가될 때마다 컨베이어벨트는 끊임없이 돌아가고 노동 강도는 점점 더 높아졌다. 정부가 첨단 설비가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거나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다그치는 부작용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4차 산업의 미래는 장밋빛이 아니라 하루 5만보로 기계에 노동을 맞추어야하는 끔찍한 지옥일 뿐이다. 장씨는 죽기 전 이런 작업 환경을 동료에게 "세기말 7층"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코로나19 사태는 골목 상권과 자영업에 치명적 타격을 안겼다. 정부의 반 강제적 휴업 권고와 국민들의 비대면 선호 정서는 가뜩이나 힘든 길을 걷고 있던 내수 시장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찾아온 재난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호황을 누리는 곳도 없지 않았다. 대형 쇼핑몰과 온라인 상점으로 소비가 몰렸고, 올해 상반기 온라인 쇼핑몰 거래금액은 74조 3900억으로 2001년 이후 가장 높은 금액을 보였다. 전년 같은 기간과 대비해 보더라도 약 16%가 늘어난 수치다. 이런 온라인 호황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 택배 물류다.

온라인의 호황은 택배 산업의 호황으로 이어졌다. 1∼8월 택배 물동량은 지난해에 비해 20% 증가한 21억 6034만개. 이태원 클럽 집단 감염으로 국민들의 위기감이 커진 직후인 6월은 전반 대비 36.3% 증가한 2억 9341만개에 달했다는 게 국토교통부 조사결과다. '아들아 명절에 안 와도 된다. 딸아 선물은 택배로 부쳐라.' 지난 추석 명절을 앞두고 나온 정부의 고향길 자제 권고 또한 온라인 시장과 택배 물류의 호황의 촉매제 역할을 했지만, 택배 노동자의 처지에서 보면 감당할 수 없는 물량 폭탄이었다.

하루 15~16시간 노동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새벽에 대형 트럭에 실린 택배 물품이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내려오면 담당 구역 물품을 골라내는 일명 '까대기' 작업이 시작된다. 많을 때는 이 작업에 하루 5시간 정도가 걸린다. 그렇게 나눠 싣고 하루 400개가 넘는 물품을 배달하는 택배 노동자. 명절 전이나 성수기에는 한진 택배 노동자처럼 새벽 4시가 넘도록 배달을 하고, 잠 잘 시간도 없이 다시 새로 도착한 택배 물품을 받으러 대리점 출고현장으로 가야 하는 게 대부분 택배 기사의 삶이다. 추석 명절 전, 택배기사의 업무도 아닌 분류 작업만이라도 본사에서 책임져 달라고 요구했지만 정부는 생색만 냈지 다시 제자리다.
 

과로사로 의심되는 택배노동자들의 죽음이 연이어 발생하는 가운데 21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택배노동자 죽음의 행렬을 끊기 위한 각계 대표단 공동선언 발표 기자회견이 열려, '분류인력 별도투입' '노동시간 단축조치 즉각 실시' '실효성 있는 정부 대책 마련' 등을 촉구했다. ⓒ 권우성

 
노동자의 죽음으로 지탱되는 물류 산업

택배 노동자들은 이런 현실을 두고 '기업은 웃고, 기사는 죽고'라고 한탄한다. 온라인 호황으로 택배사는 활황 국면에 들어섰지만, 이것이 장시간 노동과 높은 노동 강도를 감내해야 했던 택배노동자들의 고수입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택배 요금의 과다 경쟁과 개인 사업자로서 유류비, 차량 유지비 등을 감당하고 나면 남는 게 없다는 것이, 지난 20일 사망한 로젠택배 40대 노동자가 유서로서 증언한 내용이다.

대형 쇼핑몰 택배요금은 개당 2500원에 계약되는 게 일반적이다. 이중 쇼핑몰에 백마진으로 개당 700원 안팎을 돌려준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남은 2000원 이하의 금액을 본사와 택배 기사들이 나눠야 하는 게 택배 노동자의 수익 구조다. '기업은 웃지만, 기사는 죽는다'는 하소연, 택배 노동자의 엄살이 아닌 것이다.

연이은 택배 노동자의 죽음. 인재이고 산업재해다. 경제 권력의 욕심이 빚어낸 참사이고,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일어난 사회적 타살이다. 택배 분류 업무만이라도 본사가 책임지게 해달라는 택배 노동자의 절규를 무겁게 받아들였더라면 15시간 이상의 노동이 과로사로 이어지는 일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대형 쇼핑몰의 백마진 만이라도 근절해, 최소한의 배송 요금이라도 보장해 달라는 노동자들의 요구가 현실화되었다면 생활고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택배 노동자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경제 권력의 욕심과 코로나19 사태로 뒤틀린 경제 질서. 4차 산업의 인간 소외가 빚어낸 택배 노동자의 연이은 죽음. 우리 사회의 암울한 미래를 보는 것 같아 참담하고 답답하다.

20일 문재인 대통령은 택배 노동자 과로사 문제에 대한 특별대책을 주문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도 택배 화물 터미널을 찾아 대책 마련에 나섰다. 가장 많은 사망자가 나온 CJ대한통운도 인력을 확충하겠다고 발표했다. 때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이제라도 죽음을 멈출 대책이 마련되었으면 한다. 사실 해결책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다. 기업은 웃고, 기사는 죽는 경제 질서를 '기업도 웃고 기사도 웃을 수 있'도록 바꾸면 된다. 문제는 경제 권력의 목에 누가 방울을 달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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