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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은 민중들의 목소리를 억눌러온 법으로, 폐지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서울청년진보당 대학생 위원회는 한국 사회를 억압하는 국가보안법을 바로 알기 위한 5회 차의 오픈스터디를 진행한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넘어 주인되기>는 국가보안법의 기원부터 폐지의 법률적 쟁점까지, 국가보안법의 A to Z를 파헤친다.[기자말]
1990년 한 설문조사에서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은 우리나라를 움직이는 가장 큰 단체 3위로 뽑혔다. 여당과 야당 바로 다음이었다. 전대협이 학생운동의 전성기라고 불리는 80년대를 책임졌다면, 90년대에는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 있었다. 두 단체 모두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로 규정되었다. 지난 14일 열린 서울청년진보당 대학생 위원회 국가보안법 오픈스터디 〈반공 이데올로기를 넘어 – 주인되기〉의 두 번째 연사는 한총련 시기 대학생으로 운동을 시작한 조용신 진보당 공동대표다. 이하 사회자 곽호준 대학생위원장(곽)과 조용신 대표(조)의 1문 1답.
   
발언 중인 조용신 진보당 공동대표(좌)와 곽호준 서울청년진보당 대학생위원장(우)
 발언 중인 조용신 진보당 공동대표(좌)와 곽호준 서울청년진보당 대학생위원장(우)
ⓒ 서울청년진보당 대학생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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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 자기소개를 부탁한다.
조: 진보당 공동대표 조용신이라고 한다. 한총련이 이적 단체로 지정되어 있던 시절에 대학에 입학했고, 이후 학생 운동에 입문했다. 최근에는 민주인권기념관에서 진행된 전시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_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에 디자이너로 참여했다.
 
곽: 한총련 시기에 대학생으로서 학생운동을 시작했다. 한총련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한다면.
조: 한총련은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의 줄임말로, 전국 대학 총학생회의 상급 기구다. 단과대 이상의 대표자가 한총련 대의원이었는데, 한총련이 이적단체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대표자가 되면 바로 수배자가 되었다. 학생운동이 침체기로 접어든 때였지만 어려운 가운데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었고, 학생회가 어느 정도 사회적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공감대도 있던 시기였다.
 
곽: 얼마 전 <오마이뉴스>에 학생 운동 당시의 경험을 담은 기사를 냈다. 수배 생활의 어려움 등 여러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 학생운동을 결심했던 계기가 궁금하다.
조: 사실 결심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학생회가 필요하다는 학우들의 열망이 있었고, 대표자라고 수배자가 되는 걸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학생회장에 출마했다. 신생 단과대라 선배가 없어 제대로 된 학습도 한 번 못 했지만, 대단한 사상보다는 동지와 사람 덕분에 결심하지 않았나 싶다. 다만 정말 어려운 건 외로움이었다. 아직 어릴 때였으니까. 선전전을 하러 정문에 내려가면 학교 밖에 있는 형사들 때문에 정문 선을 넘지 못했다. 저녁에 퇴근해서 집에 가는 집행부들에게 괜히 서운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엄마가 보고 싶을 때. (당시 학교는 암묵적으로 경찰이 들어올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수배자가 된 학생들은 학교에서 생활하곤 했다.)
 
곽: 공안 정권의 타깃으로서 한총련이 이적 단체가 되었던 것 같다. 한총련의 위세가 대단했다고 하던데.
조: 매년 한총련의 출범식에 대학생이 몇만 명씩 모였다. 93년에 고려대에서 열린 출범식에 10만 명이 모였고, 96년 전북대에서 열린 출범식에는 도지사가 축사를 보낼 정도로 큰 대중조직이었다. 다만 나는 학생운동이 접어들 때 운동을 시작해서 그런 것들을 실제로 보지는 못했고,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학생들이 역사 한곳에 모여 있다가 누군가 한총련 진군가를 부르면 다 같이 다음 역까지 달리는 방식으로 시위를 했었는데, 98년에 나름 한총련 전국 집중이라고 모인 때에 한 500명 정도가 뛰는 걸 보고…. 여러 생각이 들었다.
 
서울청년진보당 대학생위원회 오픈스터디 <반공 이데올로기를 넘어 -  주인되기>
 서울청년진보당 대학생위원회 오픈스터디 <반공 이데올로기를 넘어 - 주인되기>
ⓒ 서울청년진보당 대학생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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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 전두환 정권이 학생운동을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던 때가 80년대였다. 그런데도 당시 학생운동의 규모가 커질 수 있던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조: 처음의 학생운동은 엘리트주의가 컸다. '소수의 각성한 우리가 먼저 나서면 대중이 따라올 것'이라는 전위적인 노선. 그런데 86년에 펼쳐진 건대 항쟁에서 학생들이 다 잡혀가며 사건이 끝난 게 반성의 계기가 됐다. 다음 해 6월 항쟁이 성공하고 나서 대중을 크게 묶어서 앞장세워야만 이길 수 있다는 걸 깨닫기도 했다. 이렇게 대중노선을 철학적 기반으로 한 학생들이 학생회에 들어가 전국조직인 전대협을 만들었다.
 
곽: 그런데 6월 항쟁 이후에 들어선 정권들도 전대협과 한총련을 탄압했다. 주로 어떤 방식으로 탄압이 이루어졌는지 궁금하다.
조: 공통적으로는 국가보안법이 탄압의 근거였다. 80년대에는 조직사건을 만들어서 김대중과 엮고, 북한과 연결해 핵심들을 다 구속했다. 90년대에는 학교별로 활동가조직 사건이 있었다. 당시 학생운동 활동가들이 대중조직인 학생회와는 별개로, 학생운동가를 키우고 대중 사업을 논의하는 활동가 조직이란 걸 만들었다. 그런데 이걸 다 털어서 입건했다. 이후 96년 연세대 항쟁과 97년 한총련 출범식 치사사건을 거치며 학생운동의 도덕적 방어망이 무너졌다. 호모 사케르라는 사회학적 분석이 있다. 특정인을 배제해야 하지만, 동시에 반드시 그 사람을 포함해야 사회가 굴러간다는 개념이다. 국가보안법이 그런데, 대표적인 예시로 통합진보당을 들 수 있다. 김영삼 정권 말기인 1997년에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이틀에 한 명씩 구속됐다. 정권 레임덕 극복에 사용한 거다. 김대중 정권도 다르지 않았다. 1999년 국가보안법 구속자의 78%가 한총련이다.
 
곽: 지금은 국가보안법에 의해 수배되는 일이 많지 않지만, 한편으로 대중운동도 당시보다 미약한 상황이다. 현재 운동의 원동력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학생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조: 지금의 학생 운동이 어려운 데에는 우리 대의 책임도 있어서 무언가를 말하는 게 쉽지 않다. 그래도 학생회의 중요성은 이야기하고 싶다. 2010년 전후로 SNS가 발달하면서 에브리타임처럼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이야기들 때문에 학생회가 더 힘들어진 것 같다. 하지만 학생회는 선거로 선출되는, 학교가 무시할 수 없는 기구다. 학생들의 유일한 공식기구인 만큼 열심히 해야 하지 않을까. 나의 운동의 이유는 학생 때와 다르지 않다. 고쳐야 할 게 있다는 생각. 자신의 가치를 지키고 현장에 가서 사람들을 조직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서울청년진보당 대학생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조용신 공동대표가 디자이너로 참여한 전시 <말의 세계에 감금된 것들_여성 서사로 본 국가보안법>은 민주인권기념관 홈페이지에서 온라인으로 관람할 수 있습니다.
- 민주인권기념관 홈페이지 : https://dhrm.or.kr


태그:#국가보안법, #진보당, #청년진보당, #조용신, #한총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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