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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겨울 동안 이스탄불을 베이스캠프 삼아 터키를 여행했던 이야기입니다.[기자말]
황금 새장과 황금 섬
  
 뷔위카다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한 성 요르고스 성당(Aya Yorgi Kilisesi).
 뷔위카다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자리한 성 요르고스 성당(Aya Yorgi Kilisesi).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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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카프(톱카피, Topkapi) 궁전에 가면 아름다운 이즈니크 타일로 된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창이 나있는 건물을 볼 수 있다. 그곳을 사람들은 황금 새장(Kafes)이라고 부른다. 황제가 되지 못한 황자들이 갇혀 지냈던 곳. 카페스는 형제 살해 전통을 완화시켰지만 그들은 일평생 갇혀 지내야 했다.

오스만 제국의 상속 제도는 명확하지 않았다. 하렘 출신 노예가 자신의 어머니이든 그렇지 않든 모든 황자들은 아버지의 지위를 상속받을 권리가 있었다. 다만, 그들 중 가장 강한 인물이어야 했다. 아버지 살아생전 권력을 물려받았다고 해도 형제들은 호시탐탐 황위를 노렸다. 황권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안팎으로 시달려야 했다.

오스만 제국은 여러 식민 국가와 조공 국가를 거느리고 있었다. 황자들은 지방 세력과 손쉽게 손을 잡을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총독이 되어 군사력을 키울 수 있었다. 애초부터 반란을 일으킬 싹을 제거하는 것이 대제국을 살리는 길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역사에서 17번 일어난 술탄 폐위 사건 중 14번이 카페스 이후에 일어났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특히나 후계자 없이 황제가 타계했을 때는 카페스에 갇혀있던 세상 물정 모르고 몸이 허약한 황자가 황제가 되었다. 그들은 궁중의 음모에 희생되곤 했다.
 
 바다를 향하고 있는 그리스풍 건축물.
 바다를 향하고 있는 그리스풍 건축물.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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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스 제도는 아흐메드(Ahmed, 1590~1617) 1세가 만들었다. 1595년, 그의 아버지 메흐메드(Mehmed, 1566~1603) 3세는 황제(재위, 1595-1603)가 된 뒤 19명이나 되는 동생들을 같은 날 처형했다. 당시 궁전에는 비명과 울부짖는 소리로 꽉 찼고 아이들마저 죽이는 광경에 모두 경악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흐메드 1세는 동생을 죽이지 않고 하렘에 있는 방에 가두었다. 그렇게 해서 황금 감옥인 카페스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황자들을 외부와 차단시키는 장소로 톱카프 궁전 안에 카페스가 있었다면 외부에는 이스탄불 인근에 있는 섬이 있었다. 황금 섬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풍광이 수려한, 총 4개의 섬으로 묶어놓은 그곳을 사람들은 '프린세스 섬'이라고 불렀다. 황자들의 유배지였던 셈이다. 지금은 아름다운 해안가로 그리스풍 별장 건축물이 늘어서 있는, 부유한 사람들의 휴양지가 되었다.

화창한 어느 날 나는 그중 제일 큰 섬인 뷔위카다(Buyukada: 명칭 철자는 사용처마다 약간 다르나 나는 구글 지도 지명을 기준으로 했다)로 향했다.

뷔위카다에서의 하이킹
  
 성 요르고스 성당에서 내려다볼 때 산 중턱 고아원 건물 너머로 보이는 이스탄불 시내.
 성 요르고스 성당에서 내려다볼 때 산 중턱 고아원 건물 너머로 보이는 이스탄불 시내.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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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은 세 개의 바다를 끼고 있다. 바다에 비해 다리가 많지 않다. 특히나 보스포루스 해협은 수심이 깊고 물살이 거칠어 현수교만 설치할 수 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교통수단으로 주로 배를 이용한다. 뱃삯도 싸다. 정부가 운항하는 배는 이스탄불 카드를 사용할 수 있다. 사설 기관 뱃삯도 비싸지 않다. 프린세스 섬까지 10리라(2천 원)면 충분하다.

나는 혼자서 하이킹할 짐을 꾸렸다. 현지인 두 명이 동행한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여행 스타일이 달라서다. 나는 걸어서 섬 한 바퀴를 돌 예정인데 그들은 내 체력을 따라오지 못할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현명한 판단이었다.

1시간 30분 배를 타고 마침내 나는 뷔위카다 선착장에 도착했다. 선착장 주변은 북적거리는 식당과 상점들이 즐비했다. 안쪽으로 들어가자 조용한 주택가가 나왔다. 바다로 창문이 나 있는 건물은 호화로웠지만 더 사치스러운 것은 풍광이었다.

비교적 따뜻한 겨울에도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니, 이만한 별장 자리가 어디 있을까 싶었다. 부유한 사람들의 별장이 많다는 말을 실감하면서 주택가를 벗어나 소나무 숲길로 접어들었다.
 
 뷔위카다 선착장 중 한 곳.
 뷔위카다 선착장 중 한 곳.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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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착장에서 3.3km 떨어진 산꼭대기(이 섬에서 가장 높은 고도이나 측정은 해보지 않았다. 500m로 추측할 뿐이다)에 있는 성 요르고스 성당(Aya Yorgi Kilisesi)으로 가고 있었다. 부드러운 흙길을 한참 걷자 이미 쇠락한 고아원 건물이 나왔다. 앞서가는 외국인 커플이 말하기를 그리스 고아들을 수용한 곳이라고 했다. 터키 독립 전쟁 때를 말하지 않나 싶다.

고아원을 품은 숲을 내려가자 좁은 도로와 식당이 보였다. 자동차 운행 금지 섬이라 자동차를 찾아볼 수 없었다. 좌석이 두 개 있는 오토바이나 자전거, 마차가 여행객들을 태운다고 하는데 비수기라 그런지 마차는 볼 수 없었다. 자전거를 빌려서 타는 여행객도 있지만 얼마 가지 못해 사람이 자전거를 짊어지고(?) 가야 할 정도로 언덕이 많았다.

튼튼한 다리로 걸었던 나는 막판 1km 오르막을 오른 뒤 마주한 성당을 보고 환호성을 질렀다. 성당은 소박한 건물이나 사방 트인 바깥은 새파란 바다를 마당으로 들이고 있었다. 마침 수평선에서는 눈을 감아야 할 정도로 백색 빛이 찬연했다.

1751년에 수도원 건물로 지었다는 조그마한 성당 안은 더 눈부셨다. 실내를 가득 채운 것은 오래된 프레스코화 성화가 대부분이었다. 내부 사진은 찍을 수 없지만 신성한 기운에 전율했다. 20리라를 기부하고 촛불 하나를 켰다. 건강한 목숨을 기원했다.

저주받은 황금 피
 
 사방 백색 빛 수평선을 볼 수 있는 뷔위카다 섬.
 사방 백색 빛 수평선을 볼 수 있는 뷔위카다 섬.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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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로 태어나서 황제가 되지 못하는 숙명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거나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아야 했던 그들. 그들은 이곳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선착장으로 어떻게 돌아갈까 고민하던 나는 이왕 왔으니 섬 끝까지 갔다가 돌아가기로 하고 8자 모양을 택했다. 그러니깐 절반은 주택가가 바다로 향하고 있는 오른쪽 해변을 걷다가 그 나머지는 다른 쪽 절벽 해안 도로를 걷는 식이었다. 어디로 걷든 이곳에서는 바다 건너 이스탄불이 보인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문득 저주받은 황금 피를 물려받았던 그들의 안부가 궁금해졌던 것이다.

아름다운 이곳에 있으면서도 바다 건너 피비린내 나는 권력을 그리워했다면 그야말로 감옥 같은 생활이었을 것이고,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면 강태공이 되어 온전히 이 풍광을 즐길 수 있지 않았을까.
 
 선착장을 떠나며.
 선착장을 떠나며.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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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싯대를 드리우자마자 월척을 하는 꿈을 꾸며 나는 돌아가는 배 안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대략 13km를 네 시간 동안 걸었다. 오랜만에 걸어선지 몸이 먼저 기지개를 켜며 활력을 선사했지만 피곤이 그림자처럼 몰려왔다. 다음 날 아침이 되면 말짱했다.

나는 귀국하기 전까지 프린세스 섬 네 군데를 다 돌고도 뷔위카다를 한 번 더 찾았다. 여전히 타고난 역마살을 내려놓지 못한 나는 자유로운 영혼을 자칭하면서 성 요르고스 성당으로 힘차게 걸어갔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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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차노휘는 소설가이다. 2016년부터 도보 여행을 하면서 ‘길 위의 인생’을 실천하고 있다. 2009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얼굴을 보다〉가 당선되었고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소설 창작론 《소설창작 방법론과 실제》, 여행 에세이 《쉼표가 있는 두 도시 이야기》 와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장편소설 《죽음의 섬》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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