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마지막 날로 기억한다. 당시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서울극장에서 보고 나온 '고딩'은 전태일·근로기준법이 뭔지 제대로 모르면서 눈물을 글썽였던 것 같다. 영화 속 문성근이 연기한 지식인 '영수'의 시선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홍경인이 연기한 전태일이 보듬던 '여공'들의 열악한 노동 환경은 너무나 생생했다. '미싱'을 돌려가며 자식들을 먹여 살리던, 1970년대 상경해서 동대문에 입성했다던 내 아버지가 떠올라서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청년 태일의 곁엔 태일의 유지를 이어갔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있었다. 당시 박광수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전태일이 집회를 모의하면서 근로기준법을 불태우겠다고 했을 때 순간 떠올린 것은 어머니였을 것이다. 분신을 결심하면서 가장 마음에 걸린 것은 어머니가 아니었을까? 분신 전날 밤도 잘 보이지 않지만 태일은 자고 있는 식구 중 어머니를 보고 있다." (박광수 감독, 1995년 12월 영화전문지 <KINO>와의 인터뷰 중에서)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독보적인 작품일 수밖에 없었다. 전태일을, 1970년대 노동환경을 조명한 주류 영화는 25년이 흐른 지금까지 나오지 않았다. 이후 전태일을 다시 스크린으로 소환한 건 2012년 4월, 태준식 감독의 다큐멘터리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고 이소선 여사가 2011년 9월 갑작스레 작고하기 전까지 2년여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당시 한진중공업 파업 현장을, MBC 노동조합의 파업 현장을 부지런히 쫓아다니며 자식 같은 노동자들을 다독였던, "아무 걱정 마라.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니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라며 먼저 간 아들의 뜻을 따랐던 '태일이 어머니'의 '모성'도 함께.
 
 KBS1 <역사저널 그날> 한 장면.

KBS1 <역사저널 그날> 한 장면. ⓒ KBS1

 
대중예술 속에서 전태일하면 우선 떠오르는 이미지가 바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속 홍경인의 흑백 얼굴이라 할 수 있다. "노동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던, 그리고 어린 '여공'들을 위해 노심초사하던 청년 전태일의 이미지 말이다. 그건 전태일이 우리 노동사에 남긴 뚜렷한 족적과 달리 '전태일'이란 이름조차 거론하지 않은 우리 방송이나 대중예술의 외면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13일 방송된 KBS1 <역사저널 그날>은 분명 눈길을 끌 만 했다. 올해로 50주기를 맞는 전태일 열사의 '그 때 그 날들'을 조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송의 시작을 스무 살 시절 '청년 전태일'을 연기한 배우 홍경인이 연 것 또한 어떤 감흥을 전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정말 하루하루가 못 견디게 괴로움의 연속이다. 아침 8시부터 저녁 11시까지 하루 15시간을 칼질과 다리미질을 하며 지내야 하는 괴로움. 손바닥이 부르터 피가 나고 손목과 다리가 조금도 쉬지 않고 아프니 정말 죽고 싶다. 우리는 재봉틀이 아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평화시장 내 1평 남짓한 공간의 이른바 '벌집공장'을 재현한 세트 안, 홍경인이 읽어 내려간 전태일의 일기다.

어린 여공의 각혈을 목격한 뒤 죄책감에 시달리던 끝에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된 전태일은 3년에 걸쳐 법전을 독파한다. 또 여공들을 위해 돈 잘 버는 미싱사 대신 재단사 보조를 선택하고 이후 '근로기준법을 몰랐던 우리는 바보입니다'라는 의미의 재단사 모임인 '바보회'를 결성한다.

 
 KBS1 <역사저널 그날> 한 장면.

KBS1 <역사저널 그날> 한 장면. ⓒ KBS1

 
이후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투신하지만 근로기준법 자체를 무시했던 사업주와 노동당국, 그리고 군사정권의 거대한 카르텔에 좌절해야 했다. 이렇게 1960~70년대 노동현장 속 전태일의 생애를 조명한 이날 방송은 자료 화면으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속 흑백 영상을 자주 비췄다.

전태일의 '약사'를 조명한 것만으로도 의미를 둘 수 있을 이 방송에서 놀라움을 안겨준 것 중 하나는 바로 전태일의 사업계획서였다. '전태일 평전'에도 수록된 그의 '태일피복' 사업계획서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던 청년 노동자가 쓴 것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꼼꼼하고 현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역사저널 그날>은 이를 홈쇼핑 형식으로 구성했지만, 전태일이 노동자들을 위해 꿈꿨던 이상과 현실감은 고스란히 전달됐다. 그리하여 짧지만 강렬했던 전태일의 분신과 이후 아들의 유지를 받들어 '천만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았던 이소선 여사와의 약속을 언급하는 대목에선 패널들과 시청자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성공회대 노동아카데미의 하종강 교수가 목소리로 재구한, 분신 후 실려 간 병원에서 전태일이 이소선 여사에게 전했다는 유언은 특히나 가슴을 저미게 했다. 

"노동자들은 암흑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제가 죽으면서 그 깜깜한 하늘에 작은 구멍을 뚫는 거예요. 어머니가 남은 평생 동안 그 구멍 조금만 넓혀주세요. 어머니 빨리 약속해 주세요. 혼자 하지 마시고요. 노동자들, 대학생들과 같이 해 주세요."

그리고, 방송 직후 고 조영래 변호사가 쓴 '전태일 평전'을 꺼내 들어봤다. 홍경인이 방송에서 읽어 내려갔던, 25년 전 영화 속에서 읊조렸던 전태일의 일기가 금방 눈에 띄었다. 전태일이 1970년 8월 9일 삼각산 기도원에서 썼다고 기록한 문장들이었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조금만 더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전태일 50주기
 
 KBS1 <역사저널 그날> 한 장면.

KBS1 <역사저널 그날> 한 장면. ⓒ KBS1

 
<역사저널 그날>은 직접적으로 잠깐 언급했을 뿐이지만, 결국 방송의 의도 역시 전태일 50주기가 지닌 역사적 의미의 환기일 것이다. 14일부터 오는 11월 15일까지, 전태일재단과 전태일50주기 행사위원회는 이 기간을 '전태일 추모의 달'로 선포하고 문화제, 국제포럼, 추도식 등을 진행한다. <역사저널 그날> '전태일'편의 방송 일자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다. 

아울러 현재 국회에선 '전태일 3법' 통과 논의가 한창이다. 전태일 3법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과 함께 5인 미만 사업장의 근로기준법 적용이 포함된 근로기준법 11조 개정, 간접고용, 특수고용 노동자에 대한 원청 사용주의 책임을 적용한 노동조합법 2조 개정을 뜻한다. 지난 9월 국회 국민동의 청원에 10만 명의 동의를 얻어 소관 국회 상임위원회에 배정된 바 있다.

이렇듯 향후 한 달간, 이후 2020년 남은 기간 내내 전태일이란 이름이 소환될 것이다. 오는 11월 13일, 전태일 50주기 다음 달엔 '김용균 2주기'를 맞는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란 청년 전태일의 외침 후 50년이 흘렀지만 우리는 '위험의 외주화' 시대를 살고 있다. 그간 파급효과가 상당한 대중예술과 방송이 전태일의 절규를, 그 유언을 지속적으로 조명해왔다면 어땠을까. 

한창 제작 중인 명필름의 애니메이션 <태일이>의 개봉을 기대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전태일이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유언을 남긴 지 50년이 흘렀고, =과거는 과거로 남겨두더라도, 향후 '아름다운 청년 노동자'들의 현실을 좀 더 다채롭게 조명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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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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