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3 18:23최종 업데이트 20.10.13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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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오전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조정래 작가의 '등단 50주년 기념 기자간담회'. ⓒ 연합뉴스

 
소설가 조정래가 12일 기자간담회에서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와 <반일종족주의>를 비판했다. <아리랑>·<태백산맥>·<한강> 개정판 발행을 기념해 한국언론회관에서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이영훈이 책에서 저를 많이 욕했는데, 그 사람은 신종 매국노이고 민족 반역자입니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국사편찬위원회와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쓴 책을 중심으로 명확한 자료를 가지고 <아리랑>을 썼습니다. 인물은 허구이되 역사적 자료는 사실인 것이죠. 민족정기를 다시 세우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반민특위는 반드시 부활해야 합니다. 토착왜구라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일본의 죄악을 편들고 역사를 왜곡하는 민족반역자들에 맞서는 운동에 제가 적극적으로 나서려 합니다. 그것이 <아리랑>을 쓴 작가로서 책무라고 생각해요."


토착왜구에 맞서기로 결심한 것은 <아리랑> 작가의 책무 때문이라고 말했다. 항일투쟁을 다룬 <아리랑>에 대한 그의 애착을 느끼게 해주는 발언이다.

그런데 이영훈 교수는 바로 그 <아리랑> 때문에 조정래를 비판하고 있다. 2007년에는 계간지 <시대정신> 기고문에서 조정래를 '광기 어린 증오의 역사소설가'로 폄하했고, 2019년에는 공동 저서인 <반일 종족주의>에서 <아리랑>의 흥행 비결은 반일 종족주의라며 "아무리 역사소설이라 하지만 실재한 역사와 동떨어진 이야기를 지어낼 수는 없다"고 비판했다.

그는 <반일 종족주의> 본문 첫 장을 조정래와 <아리랑>에 대한 비판으로 채웠다. <아리랑> 때리기, <아리랑> 치기로 <반일 종족주의>의 포문을 연 것이다. 첫 장의 제목은 '황당무계 <아리랑>'이다. '황당무계'라는 표현에서, <아리랑>에 대한 이영훈의 시각을 느낄 수 있다.

'황당무계 <아리랑>'에서 이영훈은 <아리랑> 제4권 제1장 대지진 편의 한국인 총살 장면을 지목했다. 헌병주재소장이 토지조사사업에 대항하는 차갑수를 즉결 처형할 때 경찰령을 운운하는 장면이다.

이를 놓고 이영훈은 "즉결 총살형은 토지조사사업 당시에 있지 않았"다고 한 뒤 헌병주재소장이 언급한 경찰령을 거론하면서 "그런 법령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런 뒤 "조정래는 그 시대를 법도 없는 야만의 시대로 감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존재한 적도 없는 경찰령과 한국인 학살을 근거로 조정래가 일제강점기를 야만의 시대로 격하시켰다는 것이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 이승만TV

 
하지만 '그런 법령 따위'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일제강점 2년 전인 1908년에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한국통감이 경찰범처벌령을 공포했고, 이 법령은 1912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경찰범처벌규칙으로 개정됐다. 따라서 토지조사사업이 시행된 1910년부터 1918년까지의 기간에 상당수 한국인들의 머릿속에는 경찰범처벌령이나 경찰범처벌규칙이 입력돼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헌법·민법·형법·상법 같은 몇몇 법률 외에, 대중이 정식 명칭을 정확히 기억하는 법령은 많지 않다. 김영란법(A)이라는 명칭은 잘 기억해도,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B)이라는 명칭은 정확히 기억하기 힘들다.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등장인물이 A를 언급하는 것은 자연스러워도, B를 언급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등장인물이 B를 또박또박 언급하면, 독자나 시청자는 오히려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토지조사사업에 저항하는 한국인들을 진압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헌병주재소장이 자기 행동의 법적 근거를 제시하고자 경찰령 같은 약칭을 언급하는 것은 자연스러워도, 경찰범처벌령이나 경찰범처벌규칙 같은 정식 명칭을 또박또박 거론하는 것은 그렇지 않다. 소설이나 드라마뿐 아니라 현실 상황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찰령 문제과 함께 이영훈이 지적한 것은, 일제가 한국인들의 저항을 살상으로 억눌렀다는 언론보도가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신문과 잡지에서 그러한 사건이 보도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습니다"라며 "실제로 있었다면 보도되지 않았을 리가 없습니다"라고 한 뒤 "총살을 자행한 총독부도 그것을 막을 이유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살상의 증거가 당시 문헌에 나오지 않으므로 살상이 있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게 이영훈의 주장이다. 1980년 5·18 광주학살의 진상도 당시 문헌을 통해서는 명확히 입증되지 않는다. 나중에 나온 5·18 진상보고서를 두고 "1980년에 작성된 것이 아니므로 믿을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일본제국주의의 만행에 대한 기록이 일제강점기 이후에 나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영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토지조사사업 당시의 신문보도를 통해 일제의 한국인 살상이 입증되지 않으므로 조정래의 <아리랑>은 믿을 수 없다는 게 이영훈의 주장이다.

<아리랑>에 대한 공격은 <반일 종족주의> 제2탄인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으로 이어졌다. <반일 종족주의> 비판에 대한 반론을 제시함과 동시에 이 책을 보충하는 내용을 담은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은 박정희 쿠데타 59주년인 지난 5월 16일 발행됐다.
  

조정래 작가. ⓒ 연합뉴스

 
이 책에서 조정래 비판의 바통을 넘겨받은 이는 공동 저자인 주익종 낙성대 경제연구소 이사다. 이 책 제15장 '토지조사사업 때 학살이 있었다?'에서 주익종 이사는 간접적 방법으로 조정래를 비판했다. <아리랑>에 대한 이영훈의 비판에 담긴 문제점을 설명한 필자의 2019년 9월 3일자 <오마이뉴스> 기사를 비판하는 방식이다.

제목이 <"조정래의 터무니없는 조작"... 딱 걸린 이영훈 교수 거짓말(2019.9.3)>(http://omn.kr/1kqe7)인 위 기사는 <아리랑> 속의 경찰령과 유사한 법령이 실제 존재했으며, 토지조사사업에 저항하는 한국인들이 살상되는 일도 있었음을 설명하는 글이다. 살상의 사례로 제시된 것은 1913년 강원도 삼척군 원덕면 임원리에서 발생한 이른바 '임원리 측량 사건'이다.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에서 주익종은 "김종성은 <오마이뉴스> 기사에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한국인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일제는 실제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헌병대를 출동시켜 무차별 발포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아리랑> 속의 학살 장면도 실제 역사와 다르지 않습니다'라고 썼습니다"라고 한 뒤, 기사에 인용된 전영길·이성익 강원도립대학교 교수의 공동논문 '토지조사사업을 통한 일제의 토지수탈에 관한 사례 연구'의 문제점을 거론했다.

임원리 측량 사건 때 이 지역 주민들은 토지조사를 빌미로 사유림을 국유림으로 편입시키려는 일제에 맞서 싸웠다. 이 저항으로 인해 일본인 측량기사가 사망하자, 일본헌병대가 출동해 민중 진압에 나섰다.

2017년에 <한국지적정보학회지> 제19권 제3호에 실린 위 논문은 "일본 헌병 20여 명이 출동하여 무차별 발포하여 군중들이 재빠르게 해산했지만, 3명이 죽고 많은 부상자를 내는 참사를 겪음"이라고 정리했다. <아리랑>에서처럼 즉결처형 방식은 아니지만, 소요 진압의 형식으로 한국인 살상이 있었다고 설명한 것이다.

토지조사사업 기간에 한국인 살상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위 논문의 타당성을 무너트리기 위해 주익종은 공동 저자들이 인용한 1988년 <삼척향토지>에 "일본 헌병이 출동하고 발포하여 진압되었으며 해산되었다"고만 돼 있을 뿐 살상에 관한 기록은 없다는 점을 문제 삼았다.

그래서 위 논문은 근거 없는 논문이라는 게 주익종의 주장이다. 그는 "사실로 확인되지도 않은 걸 논문에 쓰는 자들이나 또 그걸 그대로 실어주는 학술지는 뭐며, 이런 날조된 글을 근거로 대중에게 거짓말을 유포시키는 오마이뉴스는 또 뭔가요?"라며 "거짓말 릴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주익종은 조정래의 <아리랑>에 대한 이영훈의 공격을 측면 지원했다.

그런데 전영길·이성익 논문의 주석 부분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임원리 측량 사건에 관한 참고문헌을 설명하는 각주에서 두 저자는 <삼척향토지> 이외의 자료들도 참고했다는 점을 밝혔다. "그동안 사례 대상지인 삼척군에서 발간되었던 향토지에 실렸던 내용 및 이를 인용한 관련 저서들과, 특히 향토사학자인 임호민 등의 논문에 실린 사례의 내용을 필자가 재인용하면서 요점 중심으로 종합적으로 각색, 정리한 것임을 밝힌다"고 말했다.

두 저자가 사용한 '각색'이란 표현을 오해할 필요는 없다. 바로 뒤에 사용된 '정리'와 별 차이가 없는 단어다. 두 저자는 <삼척향토지> 외의 어떤 자료들을 참고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이 어디서 '한국인 3명 살상'을 발견했는지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삼척군에 관한 일이므로 이 지역 역사에 관한 문헌들에 답이 있을 수밖에 없다.
  

서울대학생겨레하나 회원들이 지난 7월 기자회견을 열고 '역사왜곡' 논란에 있는 류석춘 연세대 교수, 이영훈 전 서울대교수 ,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을 규탄했다. ⓒ 이희훈

 
삼척문화원이 삼척 역사를 소책자 분량으로 서술한 글이 삼척문화원 홈페이지에 실려 있다. 이 글 제17장 '임원리 측량 사건'에 이런 대목이 있다. 2번째 문장이 국문법상의 주술 구조에 맞지 않지만,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일본 헌병 20여 명이 출동하여 무차별 발포하여 군중들은 재빠르게 해산했지만, 3명이 죽고 많은 부상자를 내는 참사였다. 일제는 향후 군중시위의 뿌리를 뽑기 위해 본보기로 주동자 김치경을 비롯하여 조정원·이락서·김문식·김평서 등 70여 명이 끌려가 옥고를 치르게 되었는데, 함흥형무소에서 복역 중 김평서는 옥사하고 남은 사람들은 경성형무소로 이감되어 5년간 복역하고 풀려났으나 모진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모두 사망하였다.

이 사건이 있은 뒤에 원덕면의 유림들은 한 목소리로 간악한 일본 헌병들의 만행을 맹렬히 규탄하고 비난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 헌병대는 대규모 민중봉기로 이어질 것을 염려하여 1913년 5월 유림들의 본거지인 원덕면 산양리의 산양서원을 방화하여 건물은 모두 불에 타 없어지고 묘정비만 남게 되었다."
 
유사한 내용이 2017년 삼척시립박물관이 발행한 <삼척 임원리 항일운동사>에도 언급돼 있다. 김양호 삼척시장이 쓴 발간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일제가 임원리를 비롯한 원덕 지역의 토지수탈에 공을 들인 까닭은 이 일대 산림의 상태가 양호하고 호산항을 이용하여 산림자원의 약탈이 용이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흉계를 간파한 김두혁 등 지역의 의식 있는 사람들이 나서서 일제의 부당함에 항의하였고, 마침내 무력 항쟁으로 번져 일본인 측량기사를 살해하자, 출동한 일본 헌병들의 발포로 3명의 사망자와 수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습니다. 일제는 폭동 주모자로 잡아간 24명을 최고 7년 이하 6개월짜리의 징역에 처했습니다. 이때 원덕 지역 유림들의 총본산인 산양서원도 불태워졌습니다."
 
이처럼 토지조사사업 때 인명 살상이 있었다는 점은 삼척 지역 문헌들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주익종은 논문 공동저자들의 근거 없는 날조가 학술지를 거쳐 오마이뉴스에까지 실렸다고 비판했지만, 이는 그가 <삼척향토지> 이외의 자료들을 충분히 살펴보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반일 종족주의>에서 이영훈은 조정래와 <아리랑>에 대한 비판을 시작으로 한국 민족주주의에 대한 공격의 포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 첫 발에 문제가 있었다. 경찰령이라 불릴 만한 것이 토지조사사업 기간에 존재했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았고, 한국인 살상에 관한 학술 문헌들이 있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쏘아 올렸으니, 그것은 조정래와 <아리랑>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불발탄이 되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주익종은 그 불발탄을 주워 손질한 뒤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에 다시 장착했다. 하지만 그 역시 문헌 연구를 충분히 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의 진상을 담은 <아리랑> 같은 문학작품들을 반일종족주의로 몰아 입지를 축소시키려는 한국 극우세력이, 열정은 대단하지만 치밀함이 낮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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