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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대전 골령골 제 1집단 희생 추정지(대전 동구 낭월동 13-2번지)에서 18~22구의 유해를 추가 수습했다. 지난달 28일 수습한 22구의 유해를 포함, 전체 발굴 유해는 40~42구로 늘어났다.
 12일 대전 골령골 제 1집단 희생 추정지(대전 동구 낭월동 13-2번지)에서 18~22구의 유해를 추가 수습했다. 지난달 28일 수습한 22구의 유해를 포함, 전체 발굴 유해는 40~42구로 늘어났다.
ⓒ 심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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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골령골 제 1집단 희생 추정지(대전 동구 낭월동 13-2번지)에서 18~22구의 유해를 추가 수습했다. 지난달 28일 수습한 22구의 유해를 포함, 전체 발굴 유해는 40~42구로 늘어났다. 사진은 희생자의 것으로 보이는 고무신 조각이다.
 대전 골령골 제 1집단 희생 추정지(대전 동구 낭월동 13-2번지)에서 18~22구의 유해를 추가 수습했다. 지난달 28일 수습한 22구의 유해를 포함, 전체 발굴 유해는 40~42구로 늘어났다. 사진은 희생자의 것으로 보이는 고무신 조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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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한국전쟁 당시 군인과 경찰에 의해 대전 골령골에서 집단 희생된 사람들의 유해 18~22구가 추가 발굴됐다. 이 중에는 10대 유해도 포함됐다.

대전 동구청과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아래 공동조사단)은 12일 대전 골령골 제1집단 희생 추정지(대전 동구 낭월동 13-2번지)에서 18~22구의 유해를 추가 수습했다. 지난달 28일 수습한 22구의 유해를 포함, 전체 발굴 유해는 40~42구로 늘어났다.

이번에 발굴한 유해는 지난달 28일 수습한 유해 바로 아래에서 발견됐다. 살해 후 시신을 배추포기 쌓듯 켜켜이 포개 묻었기 때문이다.

10대로 보이는 유해도 나왔다. 박선주 유해발굴단장은 "발굴한 유해 중 한 명은 치아 상태를 감식한 결과 15~17세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동안 20대 미만이 골령골에서 희생됐다는 증언은 있었지만, 10대 유해가 발굴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50년 당시 충남도경찰국 사찰 주임(경위)으로 헌병대의 지시에 따라 학살에 참여한 변홍명(가명)씨는 1991년 <월간 말>과의 인터뷰에서 "무시무시한 학살을 자행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것은 대상자 중엔 20세 미만 아이들이 상당수 있었다"라고 밝힌 바 있다.

1950년 당시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오아무개씨도 지난 2000년 언론 인터뷰에서 "대전형무소 2동 202호실에 수감돼 있었는데 같은 방에 17~18세 소년도 있었다"고 증언했었다.

유품으로는 A1, 카빈 소총의 탄피와 탄두, 단추, 가죽신, 고무신 등이 나왔다. 유해를 수습했지만, 수습한 유해 바로 아래에 또 다른 유해가 묻혀 있었다. 앞의 당시 충남도경찰국 변 사찰 주임은 "처형한 후 구덩이 속에 '정어리처럼' 한켜 한켜 묻었다"고 증언했었다.

공동조사단은 이후 아래쪽에서 노출된 유해를 발굴할 예정이다.

이번 유해발굴은 골령골 평화역사공원 조성을 위해 예정 터 내에서 유해를 수습하고자 시작됐다. 행정안전부는 이곳 골령골에 평화역사공원(진실과 화해의 숲)을 조성하기로 하고, 현재 설계 국제 공모를 진행 중이다.

골령골에서는 1950년 6월 28일부터 7월 17일까지 3차례에 걸쳐 국민보도연맹원과 대전형무소 수감 정치범을 대상으로 대량 학살(1차 : 6월 28~30일, 1400명 / 2차 : 7월 3~5일, 1800명 / 3차 : 7월 6일~17일, 1700~3700명)이 벌어졌다. 당시 가해자들은 충남지구 CIC(방첩대), 제2사단 헌병대, 대전지역 경찰 등이었고, 그들에 의해 법적 절차 없이 집단 살해가 자행됐다.

태그:#골령골,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공동조사단, #10대 유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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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보천리 (牛步千里).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듯 천천히, 우직하게 가려고 합니다. 말은 느리지만 취재는 빠른 충청도가 생활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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