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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민주광장 예년 같으면 각종 행사로 사람들이 분빌텐데 정적만 흐른다. 간혹 자전거를 탄 학생들만 눈에 띤다. 집콕하기가 힘든가 보다. 거리두기 1단계하향 조정되었다.
▲ 5.18민주광장 예년 같으면 각종 행사로 사람들이 분빌텐데 정적만 흐른다. 간혹 자전거를 탄 학생들만 눈에 띤다. 집콕하기가 힘든가 보다. 거리두기 1단계하향 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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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홈페이지 등에 나오는 자료에 따르면, 정충신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7세에 광주 목사 권율의 휘하에 들어가 종군한다. 임금은 난을 피하여 의주에 머물고 있었다. 사방이 적에게 둘러싸여 연락이 두절되고 조정에 장계를 올려야 하는데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어린 정충신이 간청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장계를 무사히 올린다.

이후 정충신은 병조판서인 이항복의 눈에 띄어 무예와 학문을 닦는다. 이후 무과 급제, 1624년 전부 대장이 되어 이괄의 군사를 황주와 안산에서 무찔러 진무공신 1등으로 봉해졌다. 포도 대장,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숙종 때 충무공 시호를 하사받았다. 광주 5.18 민주광장에서 임동 오거리까지 도로를 정충신의 군호인 금남군에서 따와 금남로로 정한 이유다. 
 
금남로 광주의 중심 도로다. 금남군 정충신을 기리기 위해 금남로로 정했다. 이후 금남로는 교통,금융,행정의 중심지로 발전한다. 80 년도에는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가 된다. 옛 도청에는 아시아문화전당이 들어섰다.  전일245빌딩,시계탑,분수대 등 사적들이 보존되고 있다.
▲ 금남로 광주의 중심 도로다. 금남군 정충신을 기리기 위해 금남로로 정했다. 이후 금남로는 교통,금융,행정의 중심지로 발전한다. 80 년도에는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가 된다. 옛 도청에는 아시아문화전당이 들어섰다. 전일245빌딩,시계탑,분수대 등 사적들이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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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18분, 시계탑 앞에서 출발했다. 동행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 제약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천천히 투어다. 예년 같으면 각지에서 찾아온 탐방객들로 법석을 이룰텐데... 석양이 불그스레 떨어지는 오후인데도 인적이 드물다. 시계탑은 농성 광장으로 옮겨졌다가 30년만인 2015년 1월 27일 제자리를 찾았다.

이 시각이 되면 시계탑에서 어김없이 은은한 종소리의 시작음과 함께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린다. 참, 음악이라는 게 이상하다. 가슴을 파고든다. 울림과 아픔이 있다. '시계탑은 알고 있다.' 얼마나 답답했을까. 억울하고 하소연할 때 없었던 그 시절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또 하나 중요한 사적인 분수대다. 각종 집회의 연단이고 본부석이었다. 평화집회와 토론의 장소이기도 했다. 질서 정연하게 둘러앉아 구호를 외치던 시민들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광장에는 인적이 없다. 공허하다. 아니 평화롭다고 해야 할까.
 
분수대 5.18 민주광장 분수대는 민주화 운동의 상징성이 있는 중요한 사적중 하나다. 당시 광주 시민들은 이곳에 둘러 앉아 토론을 하기도 하고 집회가 있을 때는 연단 또는 본부석으로 이용되었다. 5월이면 수많은 시민이 둘러 앉아 있는 모습의 당시 사진이 언론에 보도 된다.
▲ 분수대 5.18 민주광장 분수대는 민주화 운동의 상징성이 있는 중요한 사적중 하나다. 당시 광주 시민들은 이곳에 둘러 앉아 토론을 하기도 하고 집회가 있을 때는 연단 또는 본부석으로 이용되었다. 5월이면 수많은 시민이 둘러 앉아 있는 모습의 당시 사진이 언론에 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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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우측을 지나 옛 도청 별관, 지금의 관공서야 개방형이지만 전에는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출입이 쉽지 않았다. 담장 안쪽으로 회화나무가 있었다. 대형 스피커를 달아놓고 안내 방송을 하기도 하고 각종 집회가 열릴 때는 나무 위에 올라가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2013년 태풍에 뿌리째 뽑혔다가 안타깝게 죽고 말았다. 시민들은 회화나무에 깊은 애정을 가졌다. 한 시민이 채취한 자식 나무로 회화나무 작은 숲 공원을 조성했다. 자식 나무들이 푸른 잔디 위에 굳세게 자라고 있다. 시민들의 힐링 휴식처로 거듭나기를 기원해본다.

도청은 5.18 민주화 운동 당시는 민주시민들의 항쟁 본부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들어가 본 적은 없다. 정문 입구에 흰 띠 모자를 쓴 경찰이 부동자세로 지키고 있어 감히 들어갈 수 없었다. 처리할 민원도 없었지만...

추억 속으로

금남로는 광주에서 유일하게 버스가 다니는 도로였다. 학동에서 임동을 잇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도로, 1번 버스를 타고 중학교를 다녔다. 버스 요금이 없어 먼 거리를 걸어서 다닐 때가 많았다. 도로가 좁고 하수구 맨홀 뚜껑이 깨진 것이 많아 빠지기 일쑤였다.

간혹 버스를 탈 때면 승객과 가방 사이에 끼여 옴짝달싹도 못했다. 안내 양은 마지막 손님까지 밀어(?) 넣고 '오라잇'을 외친다. 아무리 복잡한 버스 안이라도 정리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기사님이 브레이크를 몇 번만 잡으면 되니까. 뒤 공간에 승객을 채워야 새로운 승객을 태울 수 있다. 지금 생각하면 즐거운 불편함이지만.

도시 인구가 늘어나고 도로 폭이 커졌다. 도청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금융기관이 하나둘 들어섰다. 분수대가 물을 뿜었다. 광주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높은 건물들이 들어서고 2번 버스 노선이 생겼다. 광주공원, 사직공원을 중심으로 형성되던 도심이 지산유원지, 광주천 등을 넘어 외곽으로 뻗어 나기 시작했다.

80년 5월 시민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모여들었다. 울분을 토할 만한 곳이 다른 장소는 없었다. 분수대 주위에 둘러앉아 밤샘 토론하고 독재 타도, 계엄령 해제를 외쳤다. 무안에서 생활하던 나는 걸어서 광주를 향했다. 상무관에 들렀다. 내던져진 시신을 뒤지는 희생자들 엄마의 울부짖음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상무관 80년 5.18 민주화 운동 당시 희생자들의 시신을 임시 보관하던 장소다.
▲ 상무관 80년 5.18 민주화 운동 당시 희생자들의 시신을 임시 보관하던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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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관 앞에 도착했다. 5.18민주 광장 내에 위치한 곳이라 이쪽저쪽 시선만 돌리는 거리지만... 이곳은 나에게는 조금 특별하다. 학창 시절 운동을 위해 찾던 곳이다. 80 년 당시에는 시신을 보관하던 곳이다. 아직 문은 굳게 닫혀 있다.
 
전일245 빌딩 새단장을 한 전일 245 빌딩이다. 아직 개방이 되지 않았다. 맨 우측으로 상무관, 민주종각, 전일 245 빌딩 순이다.
▲ 전일245 빌딩 새단장을 한 전일 245 빌딩이다. 아직 개방이 되지 않았다. 맨 우측으로 상무관, 민주종각, 전일 245 빌딩 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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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종각을 지나 건너편이다. 전일빌딩은 '전일빌딩 245'로 거듭났다. 헬기에서 소총으로 발사한 탄흔이 245 발이어서 전일빌딩과 245를 합쳐서 지은 이름이다. 아직 거리두기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집회가 있을 때는 광주은행, 한국은행, 화니 백화점, 중앙교회 인근까지 시민들로 꽉 찾다. YMCA, YWCA, 가톨릭회관, 중앙교회 등은 쫒기는시민들의 피난 처였다. 한국은행은 금남로 공원으로 광주은행 건물은 SK 빌딩으로 바뀌었다.

가물거리는 추억들... 특히 가톨릭회관은 부끄러운 추억의 장소다. 신부님들이 단식 중일 때 달아준 검은 리본을 내려오자마자 슬그머니 떼 버리곤 했다. 겁이 났다. 그 어떤 언론도 지금처럼 보도하지 못했다.

걷다 보니 금남로 3가, 중앙교회 자리는 오피스텔을 짓는 듯 공사가 한창이다. 이곳도 도심 공동화는 피할 수 없는 듯했다. 금융기관, 관공서가 나간 자리에 숙박 시설이 여기저기 들어서고 있다. 전에는 예식장, 병원, 호텔 등이 성황을 이뤘는데 대부분 도시형 주택, 오피스텔 등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한일은행 사거리는 교통의 중심지... 광주여객, 중앙 여객, 광신 여객 등 주요 차고지였다. 광주역이 소방서 자리에 위치한 탓에 광주천에서 광주역까지의 도로를 역전통이라 불렀다. 롯데백화점이 시외버스 터미널 자리다. 역전통은 시외버스나 기차를 타기 위한 사람들로 항상 북적였다. "역전 앞(?) 내리세요!"가 틀린 말이라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이 생각난다.

여행(?)의 마지막 코스 금남로 5가다. 예전의 번화한 거리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임대' 표시한 가게들이 많이 보인다. 힘든 시기인 건만은 분명하다. 대면하지 않고 산다는 것은 가능한 것일까. 홀로 터벅터벅 걷는다. 쉽지 않은 길이다.

비록 가이드의 구수한 스토리텔링이 없고, 시간에 쫓겨 허둥대는 긴장감은 없어도 추억을 찾아 구석구석 여행하는 것 또한 언택트 시대  힐링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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