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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자궁 없는 박보검이 맞는 자궁경부암 주사'라는 제목의 기사가 눈에 띄었다. 제작자의 인터뷰 내용을 보니, 성인 남녀의 '건강한 관계'의 중요성을 알리고자 제작 과정에서 넣은 에피소드라고 했다. 

그리고 얼마 전 친한 동생을 만나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던 중 동생의 조카가 HPV(인유두종 바이러스) 예방접종을 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보호자의 동행 없이 혼자 의젓하게 병원에 가서 접종을 하였다는 이야기. 그 말을 들으며 내가 알고 있는 HPV 지식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궁경부암 예방접종은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야. 남성이 함께 접종해야 돼."
"응? 남자가? 왜?"
"자궁경부암의 가장 큰 원인이 바이러스 보균자인 남성과의 성관계에서 여성이 걸리게 되는 암이거든. 그래서 남성이 함께 접종을 해야 돼."


필수예방접종도 성차별하는 나라
 
자궁경부암 예방접종은 남녀모두가 받아야 한다.
 자궁경부암 예방접종은 남녀모두가 받아야 한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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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들은 동생의 반응은 기사 제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궁 없는 남자가 왜? 자궁경부암 예방접종을 맞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의 반응. 이러한 반응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찾는다면 '자궁경부암 예방접종'이라는 이름 때문일 것이다.

자궁에 암세포가 자라게 되는 원인보다는 암덩어리의 결과에 따른 병명이기에 여성에게만 해당되는 듯한 인상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모든 필수예방접종이 남녀 구분 없이 동일하게 적용되지만 성과 관련된 질병인 HPV 접종만은 예외이다.   

내 딸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며칠 전 12번째 생일이 지나 집 근처 소아과에 가서 HPV1차 접종을 하였다. 접종 전 의사 선생님의 문진에 대한 답변을 하며 물어보았다.

"HPV 접종은 남성에게도 해당된다는데 왜 여아만 필수예방접종인가요?"
"그러니깐 성차별이죠. 남아도 맞아야 하는데 국가에서는 여아에게만 해당사항이라 하니... 오전에 어떤 어머님도 같은 질문을 하시더라고요."


의사 선생님은 만 12세 이후의 남아나 남성이 HPV 접종을 하려면 총 3번에 걸쳐 고액의 접종비를 내고 맞아야 한다는 설명도 친절하게 해 주셨다. 접종을 마치고 병원을 나서며 둘째 아이에게 좀 어떤지를 물어보았다.  

"엄마, 공포의 주삿바늘이 아직도 내 팔과 다리를 휘감고 있어."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걷기가 힘들다는 아이를 부축하며 왜 보호자 동행이 필요한지 의문이 풀렸다. 딸아이의 고통을 보며 그 동생의 조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리고 이 극한의 근육통을 6개월 후에 한 번 더 겪을 둘째가 안쓰러웠다.

권한은 없고 의무와 책임만을 묻는 나라

극한의 고통이 어디 내 딸아이에게만 해당될까 싶은 일이 현 정부에서 일어나고 있다. 헌법불합치 결정에도 불구하고 '낙태죄 유지'를 고수하고자 하는 정부의 입법예고안은 여성에게 또 다른 책임과 의무만을 덧씌우려는 법안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이번 개정안에 여성 사회는 크게 반발하고 있다. 14주 이내는 여성의 선택에 따른 '전면 허용'을 24주까지는 이전처럼 조건부 조항을 둠으로써 주수에 따른 낙태죄를 유지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결국엔 여성에게 자신의 신체에 대한 권한인 자기 결정권을 온전히 넘겨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고 젓가락도 한쌍이어야만 음식을 집어 먹을 수 있다.  성행위 이후 법에 접촉되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 그건 한 사람이 아닌 한쌍이어야만 한다. 낙태가 '죄'이므로 진정 법을 존치하고자 한다면 그 죄를 온전히 여성에게만 적용하는 것은 오류이고 모순이기에 어불성설인 것이다.  

낙태죄 유지 입법예고에 관한 찬반 입장의 기사들이 포털사이트에 올라오면서 반대 입장의 기사 댓글들 중에는 '낙태죄가 사라질 경우 무분별한 낙태 시술이 만연할 것'이라는 글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도대체 어떤 근거에 의해, 어떤 구체적인 자료를 통한 의견인지 알 수 없는 분별없는 댓글이란 생각을 떨칠 수 없다. 여성이 자신의 신체 결정권을 찾으려 하는 것이 어떻게 생명경시 현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여성이 임신 중지에 대해 신중한 선택을 하길 바란다면 법과 제도로 강제할 것이 아니라 충분한 정보와 방법을 제공하여 건강하고 안전한 선택을 할 '권한'을 주어야 한다. 권한은 없고 의무와 책임만을 강조하는 것은 폭력이다.

경제성장과 함께 성평등 또한 성장하는 나라이길

우리나라 2분기 경제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운데 성장률 2위라고 한다.  그러나 성평등 지수는 여전히 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는 아직도 성차별이 만연한 사회이다.   

자궁암에 대한 예방조차도 내 나라는 바이러스 보균 확률이 높은 남성이 아닌 딸들에게만 의무를 지운다. 이러한 산물의 원인은 낡은 성 프레임에 갇혀 사고하도록 만드는 사회와 법체계의 결과이다.  

한 여성 감독이 사회관계망 서비스(SNS)에 '#난 낙태했다 릴레이 선언' 해시태그 운동을 제안하며 낙태 경험담을 공유하였고 그 움직임에 여성들이 연대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처럼 세상은 빠르게 인식 변화를 거치며 같은 경험을 공유하고 불합리에 함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금이 시작이다. 성차별에 대한 사회와 법체계의 패러다임을 강화할 때 비로소 우리나라는 경제성장과 함께 성평등 인식 또한 성장하는 건강한 나라가 될 수 있다. 대한민국 일반시민으로서 간절히 소망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의 브런치에도 게재됩니다.


태그:#HPV예방접종, #성차별 예방접종, #낙태죄, #여성의 자기결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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