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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간다. 하늘이 높고 맑아 기분이 한껏 고양되는가 싶더니 어느덧 조금씩 물들어 가는 나무들을 보니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해진다. 한 해가 끝나려면 아직 몇 달이나 더 남았는데도 이상하게 한 해를 다 보낸 듯하다.

봄부터 시작된 생명의 한 살이가 끝나는 것을 지켜보게 되는 계절이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마음이 어수선해지는 계절에 다른 이야기를 건네는 그림책이 있다. 바로 전소영 작가의 <연남천 풀다발>이다.
 
 연남천 풀다발, 전소영(지은이)
 연남천 풀다발, 전소영(지은이)
ⓒ 달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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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제천이라고 더 알려진 도심의 한 가운데를 흐르는 연남천에 핀 풀꽃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연남천 풀다발> 속 풀꽃들은 그들이 세상에 자리하는 모습처럼 조심스레 한 옆으로 비켜서서, 여린 풀꽃의 색채를 은은하게 풍겨낸다. 그리고 풀꽃을 닮은 필체의 글은 유약하지만은 않은 풀꽃들의 삶을 들려준다.

'모든 것은 가을로부터 시작되었다.'

<연남천 풀다발>을 여는 이 한 마디에 가슴이 울린다. 아마도 그건 내가 '가을'의 시절을 맞고 있는 나이라 그런 듯하다. 잎을 떨어뜨린 나무들처럼 이제 더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생각했는데, 책은 다르게 말을 건다.

'모든 것은 가을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말의 의미
 
 연남천 풀다발
 연남천 풀다발
ⓒ 달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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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이 그렇다. 그림에 곁들여진 글이 어느 한 장면에서 마음으로 훅 들어온다. 마치 잠언록처럼 어떤 장문의 글보다 더 곡진하게, 어떤 논리적인 글보다 명쾌하게 읽는 이를 설득해 낸다.

'떨어진 단풍 사이로 / 노오란 꽃이 피었는데 / 모두가 질 때 피는 꽃이 있다는 것'을 '모두에게 저마다의 계절'로 받는다. 나이듦의 시간은 삶보다 죽음에 더 친숙해져가는 시간이기에 무기력해지기 쉽다. 사회적으로 할 수 있는 것, 해야 할 것들이 점점 더 줄어드는 시간이기도 하다. '늦가을'같은 시간에 '자존감'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거리에 나뒹구는 '낙엽' 같은 시간을 <연남천 풀다발>은 '저마다의 계절'이 있다고 말한다. '앙상한 가지 끝에 /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것들이 / 첫 서리를 맞이해 / 반짝이는 구슬처럼 빛이 났다'고 한다. '지는' 시간에 대한 찬사가 이보다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90세가 넘도록 장수했던 심리학자 에릭슨이 처음부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환경은 아니었다. 덴마크인 부모에게서 태어났지만 유태인과 재혼한 어머니 덕분에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어린 시절부터 하게 된 에릭슨은 자신의 고민을 학문적 성취를 통해 승화시켰다. 그는 인간은 평생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상호작용을 통해 '자아'를 형성하며 인생의 단계마다 성취해야 할 과제가 있다고 했다. 심지어 죽음을 앞둔 노년기마저.

노년기에도 성취해야 할 과제라니! 에릭슨은 죽음을 앞둔 노년기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현재의 상황을 수용하면 '자아 통합'의 지혜를 얻게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삶에 대한 절망감과 혐오감으로 인한 깊은 우울감에 빠져들게 된다고 말했다.

생명의 한 살이가 마무리되는 가을, 그리고 겨울에 대해 끝이라고 바라볼 것인지, '시작'이라고 바라볼 것인지처럼. 노년기만이 아니다. 인생은 어느 시절이든 나의 성취에 따라 '자존'과 '자괴'가 엇갈린다.

생명을 시작한다는 계절 가을로부터 다시 다음 해의 가을까지, '어느덧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 언제나 똑같은 계절은 없'으니 '반복되는 일에도 / 최선을 다하'라는 글들은 에릭슨이 말하고자 하는 '자아 심리학'의 요체를 고스란히 담는다. 이보다 더 적확한 '자기 계발서'가 어디 있으랴.

삶의 순리를 말해주는 작은 존재들
 
 연남천 풀다발
 연남천 풀다발
ⓒ 달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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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처럼 '가을'의 시절에 천착하는 사람은 '시작하는 계절' 가을에, 그리고 아직도 빛이 날 수 있는 시절에 대해 눈길이 가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땅 / 버려진 화분 / 아스팔트 틈새에서 / 몸을 웅크리고 다음 해를 기다'리는 씨앗에 마음을 뺏길 것이다.

'뽐내려고 서두르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이곳에서 꽃을 피워내는 풀들을 보면 그림책 속의 문구처럼 '힘을 내'야겠다고 다짐하거나, '고개를 숙일 줄 알지만 / 부러지지 않는' 강인함에 마음을 적시기도 할 것이다.

그림책의 묘미다. 읽는 사람, 그 누구라도 각자 자신의 처지에 맞춰 그림은, 그리고 곁들여진 글들은 '힘내'라고 어깨를 두드려준다. 저마다 빛나는 계절을 찾으라 독려한다. 그런데 이 '삶'의 순리를 말해주는 것들이 산책길에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것들이 아니다.

돌틈에서 자신을 피워낸 늦가을의 민들레처럼, 걸음을 옮기는 우리의 시선 아래 낮게 낮게 하지만,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 그 자리에서 묵묵히 / 잎을 키우고 / 열매를 맺는' '좁고 오염된 땅'에 뿌리를 내리고 '탁해지는 공기'에 마주 서는 푸른 것들이다. 산책로 주변에 애써 시선을 돌리지 않으면 그저 '잡초'로 한 시절을 마감하는 '풀'들이 '갑남을녀'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동병상련'의 공감을 전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블로그 https://blog.naver.com/cucumberjh에도 실립니다.


연남천 풀다발

전소영 (지은이), 달그림(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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