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7 12:51최종 업데이트 20.10.07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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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8일 오전 서울중앙지법에서 뇌물공여, 특정경제가중처벌법(횡령), 국회에서의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위증) 위반 혐의에 대해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다. 2020.6.8 ⓒ 공동취재사진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아버지 이건희 회장의 삼성그룹 지배권을 승계하는 데 들어간 돈은 의외로 적었다. 1995년 화폐가치로 61억 4천만 원에 불과했다. 물론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한국 최대 그룹을 승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재벌의 관점에서 보면 '껌값'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 재벌들은 상속세를 제대로 내지 않고 자식에게 기업을 넘겨준다. 이를 위해 이들이 구사하는 방식은 5단계로 이뤄져 있다. ① 재벌 총수가 후계자에게 종잣돈을 주면 ② 후계자는 그 돈으로 그룹 내의 비상장회사(A)를 싼값에 인수하고 ③ 재벌 총수는 내부거래 및 일감 몰아주기로 A의 기업 가치를 높여준 뒤 ④ A를 상장회사(증권거래소에서 주식이 거래되는 기업)로 만들어 후계자의 주식 가치를 높여주고 ⑤ 그룹 내 지주회사(지배기업)나 알짜기업이 A에 합병되도록 함으로써 후계자의 그룹 지배권을 완성해준다.


후계자가 그룹 전체의 상속에 대한 세금이 아니라 제1단계 때의 종잣돈에 대한 증여세만 내는 이 같은 편법 혹은 불법 승계는 이재용 부회장의 삼성 승계에서도 나타났다. 이재용이 27세 나이로 삼성전자 경영팀에 근무할 당시인 1995년에 그룹 총수 이건희가 이재용에게 61억 4천만 원을 증여한 뒤로 위의 5단계가 무려 20년간에 걸쳐 순차적으로 진행됐다.

2015년에 이재용이 제일모직 지배권을 바탕으로 알짜 기업인 삼성물산과의 합병을 성사시켜 그룹 승계를 마무리한 데는 박근혜 정권과 국민연금의 협조도 크게 기여했지만, 상법상의 주식회사 감사위원 제도의 무기력함 역시 적지 않게 작용했다. 감사 제도가 정상 가동됐다면, 무려 20년간에 걸쳐 편법 혹은 불법이 진행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제5단계인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서는 삼성물산의 높은 가치가 저평가되고 제일모직의 낮은 가치가 고평가됐다. 삼성물산에 손해를 끼치는 방법으로 합병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는 이재용이 61억 4천만 원을 토대로 확보한 제일모직에 대한 지배권으로 알짜 기업인 삼성물산을 장악하는 데 기여했다.

이건희의 사후에 이재용이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하는 방법으로 그룹 승계가 이루어진다면, 이재용은 엄청난 규모의 상속세를 감당해야 할 것이다. 위와 같은 편법 혹은 불법 승계는 이재용이 그런 부담을 더는 데 기여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합병 총회
 

17일 오전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열린 삼성물산 임시주주총회에 참석한 주주들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승인안에 투표하고 있다. 2015.7.17 ⓒ 삼성물산

 
상법 제412조 및 제415조의2에 따라 주식회사 감사위원(감사)은 이사의 직무집행을 감사하고 회사의 영업·업무·재산을 조사할 수 있다. 이런 시스템이 정상 가동됐다면, 삼성물산에 불리한 그 같은 합병은 이루어지기 힘들었을 것이다. 삼성물산 내부의 동의 없이는 합병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감사위원 중 하나라도 이의를 표시하고 적법 절차를 밟았다면, 그 같은 승계가 그처럼 공공연히 일어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제헌절인 2015년 7월 17일 제일모직과의 합병 승인을 위한 삼성물산 임시주주총회가 열린 서울 양재동 aT센터 회의장에서 특별히 시선을 끄는 몇몇 사람들이 있었다. 이 날짜 <시사위크> 기사 '[르포-삼성물산 주총 현장] 소액주주가 이재용 살렸다'는 회의장 단상에 있는 그들의 면면을 이렇게 소개했다.
 
이날 주총 진행은 이사회 의장인 최치훈 삼성물산 건설부문 사장이 맡았다. 주총장 단상에는 최치훈 사장을 비롯한 김신 삼성물산 상사부문 사장, 이영호 부사장 등 사내이사 3명과 이종욱 서울여대 경제학과 교수, 이현수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정규재 한국경제신문 주필,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부 교수 등 사외이사 4명이 자리했다.
 
이 중에서 이종욱·정규재·윤창현은 사외이사 겸 감사위원이었다. 600석 규모의 대회의실과 400석 규모의 중회의실에 주주들이 운집했고, 140여 석 규모의 기자실에도 300여 명의 취재진이 가득 찼다. 한국 최대 재벌그룹의 지배권과 관련된 것인 데다가 삼성물산에 불리하게 합병이 추진됐으므로, 단상에 있는 감사위원 중에서 한 명쯤은 영화 속의 양심적인 주인공처럼 합병 반대를 외치다가 경호 요원들에 의해 끌려나갔을 만도 했다.

하지만 영화 같은 장면은 연출되지 않았다. 감사위원인 윤창현·정규재·이종욱한테서는 그런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 2015년 3월까지 한국금융연구원장이었으며 지금은 국민의힘 의원인 윤창현 감사위원,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직무정지 기간 중인 2017년 1월 25일에 박근혜의 변명을 방영한 정규재TV 운영자인 정규재 감사위원, 이명박 정권에서 금융위원회 중소서민금융위원장을 지낸 이종욱 감사위원은 '영화 속 주인공'이 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윤창현 의원의 오버
 

윤창현 국민의힘 의원이 1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해 있다. 2020.9.16 ⓒ 공동취재사진

 
이들은 자신들이 속한 삼성물산을 이재용에게 헌납하는 요식행위의 들러리에 불과했다. 이 중에서도 윤창현은 이재용을 적극 지지하는 과잉 행보를 보이기까지 했다.

지난 9월 20일 참여연대는 윤창현이 삼성 일가와 관련된 삼성생명법 등을 논의하는 국회 정무위원회에 소속된 것을 비판하는 성명을 내면서 "윤창현 의원은 2012년부터 지난 4월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기 직전까지 삼성물산의 사외이사이자 감사위원으로 활동해왔으며, 2015년 이재용 부회장의 불법승계를 위한 삼성물산·제일모직 부당합병 당시 합병 과정에도 적극 관여해온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 뒤 이렇게 말했다.
 
당시의 합병이 이재용 부회장이 최대주주인 제일모직에 유리하게 진행되어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손해가 발생할 것이 예상되었음에도, 삼성물산 이사회가 아무런 경영상 판단 없이 미래전략실의 지시에 따라 불과 1시간 만에 합병 안건을 승인했음이 드러났다. 그러나 당시 윤 의원은 사외이사이자 감사위원으로 부당합병을 단순히 찬성하는 것을 넘어,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합병의 정당성을 설파하면서 '합병 공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삼성물산을 지켜야 할 삼성물산 감사위원들이 도리어 제일모직의 편에 서서 부당 합병을 지지했다. 상법상의 감사위원 제도가 얼마나 허술한지 보여주는 사례다.

주주나 채권자만 재벌기업의 이해관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 재벌기업의 경우에는 국민도 이해관계인으로 포함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승만 정권 때부터 삼성그룹 등에 대한 특혜 지원에 국민 혈세가 대거 투입된 점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도 국민과 일반 주주의 이익을 대변할 마땅한 감사위원들이 없다는 것은 한국 사회의 서글픈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전태일 열사는 '대학생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표했다. 그는 근로기준법 등을 아는 대학생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노동자들이 차별과 탄압을 덜 받았을 거라는 소박한 마음을 품었다.

국민기업이어야 할 재벌기업 내에 국민과 일반 주주의 편이 될 '감사위원 친구'가 1명이라도 있었다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부당 합병이 그처럼 쉽게 일어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삼성그룹뿐 아니라 여타 재벌그룹에서도 유사한 행위가 함부로 일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한국 상법에는 감사 제도와 관련해 꽤 진보적인 조항이 들어 있다. 60년 전에 제정된 상법에 들어간 3%룰이 바로 그것이다. 1962년 1월 20일 법률 제1000호로 제정되고 이듬해 1월 1일부터 시행된 당시의 상법은 제410조 제1항에서 "감사는 주주총회에서 선임한다"라고 한 뒤 제410조 제1항에서 3%룰에 관해 이렇게 규정했다.
 
의결권 없는 주식을 제외한 발행 주식의 총수의 100분의 3을 초과하는 수의 주식을 가진 주주는 그 초과하는 주식에 관하여는 전조(前條) 제1항의 감사의 선임에 있어서는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대주주일지라도 감사 선임에서만큼은 최대 3%의 권리밖에 행사할 수 없도록 했다. 감사 선임에서 대주주의 입김을 배제하고 일반 주주와 채권자의 이익을 배려하기 위한 규정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규정이 있었는데도 주식회사에 대한 감사제도가 실효성을 갖지 못했다는 점이다. 훨씬 강력한 법률 규정 혹은 사회적 감시가 없으면 재벌기업에 대한 견제가 용이치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에 종전의 감사 제도보다 진일보한 감사위원회 제도가 생겼지만, 지금의 감사위원회 제도에는 그나마 3%룰을 약화하는 장치가 들어 있다.

현행 상법은 제542조의11 제1항에서 "자산 규모 등을 고려하여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상장회사는 감사위원회를 설치하여야 한다"고 한 뒤 제542조의12 제2항에서 "제542조의11 제1항의 상장회사는 주주총회에서 이사를 선임한 후 선임된 이사 중에서 감사위원회 위원을 선임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감사위원 선임에는 3%룰이 적용되지만, 이사 선임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사 선임에는 최대주주나 대주주의 의사가 반영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최대주주나 대주주의 지지를 받아 선출된 이사 중에서 감사위원을 선임하도록 했다. 그래서 감사위원 선임에 3%룰이 적용된다 해도, 결국에는 최대주주나 대주주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 이사를 거쳐 감사위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삼성물산 합병결의 당시의 감사위원인 윤창열·정규재·이종욱은 삼성물산 이사들이었다. 이건희 일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이 삼성물산 감사위원이 되어 합병결의 당시의 주총장을 지켰다. 감사위원들에게서 정의롭거나 양심적인 모습을 기대하기가 애당초 힘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공정경제 3법

3%룰이 무력화되는 이런 모순을 방지할 목적으로 나온 것이 지금 '공정경제 3법'으로 거론되는 상법 개정안이다. 개정안은 감사위원 중 적어도 1명에 대해서만큼은 제542조의12 제2항의 예외를 인정하도록 하고 있다.

이미 선출된 이사 중에서 감사위원을 선출하는 규정의 예외를 인정해, 감사위원 1명만큼은 여타 감사위원들과 분리해 3%룰에 따라 선출하도록 한 것이다. 최대주주나 대주주의 지지를 받는 인물들이 이사를 거쳐 감사위원 직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한 장치다. '영화 속의 한 장면'을 만들 양심적인 감사위원을 배출하기 위한 개혁 입법이라 할 수 있다.

기업 이사를 포함한 경영진은 최대주주나 대주주의 지지를 받아 구성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위원 선임마저 최대주주 등의 영향을 받게 되면, 기업을 똑바로 감시할 견제 장치가 사라지게 된다. '감사위원 친구' 1명만이라도 최대주주 등과 떨어트려 놓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렇게 해야만, 재벌이 '껌값'만 투자하고도 그룹 전체를 상속하는 부조리를 좀더 허물어뜨릴 수 있다.

재벌기업들과 보수 언론들은 감사위원 분리선임 제도로 인해 외국 투기자본의 국내 대기업 침투가 용이해질 거라며 엄살을 부리고 있다. 하지만 감사위원 분리선임은 국민과 일반 주주의 대기업 침투를 용이하게 하는 제도다. '감사위원 친구' 1명쯤은 국민과 일반 주주 편에 두기 위한 부득이한 장치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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