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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 고려말 야은 길재 선생 사당 경모각에서 바라본 금오산
▲ 금오산 고려말 야은 길재 선생 사당 경모각에서 바라본 금오산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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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깐한 유학자 할아버지

나의 할아버지는 구한말 1900년에 태어나서 소년시절(1910년)에 망국을 보았고, 청장년 시절은 일제 치하에 살았다. 말년에는 해방과 6·25전쟁을 겪은 후 불의의 사고로 56세에 세상을 떠났다.

송당(松堂) 박영(朴英)의 13대손으로 태어난 할아버지는 청년기에 나라 잃은 비분으로 동학 계통의 보천교에 몰두했다. 그리하여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와 종가의 위토답까지 모두 보천교에 헌납하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할아버지는 일본 도쿄에서 잡화상, 고물상 등 갖은 고생으로 돈을 모은 뒤 일찌감치 귀국했다. 그리하여 당신 고향인 도개면에서 오십 리 떨어진 당시로는 개화지 구미 금오산(金烏山) 자락에 정착하였다.

할아버지는 젊은 날 일제강점기 일본에서도 살았지만 민족정신이 투철한 탓으로 일본말이나 일본냄새를 조금도 내뱉거나 풍기는 일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망국의 비운 속에서도 조선의 얼을 평생토록 지켰다.

할아버지는 무척 애주가로 하루에도 몇 차례씩 약주를 드셨다. 한 잔 드신 후면 한시나 시조, 또는 회심곡 같은 걸 큰소리로 암송하였다. 할아버지는 양풍을 몹시 싫어했다. 나의 어머니가 그 당시 한창 유행하던 파마머리를 남보다 뒤늦게 하고도 구미에 오면 할아버지의 꾸중이 두려워 늘 머리에 수건을 썼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구미 역전에 미군 부대가 주둔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당신뿐만 아니라 가족들에게 그 일대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하구미 광평동 논에 갈 때도 일부러 그곳을 우회해서 다녔다.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며, 말하거나 행하지도 말라'는 옛 성현의 말씀을 그대로 행한 분이다.

옛 격식을 존중했기에 시대에 뒤떨어진 분으로 동네 아낙네들과 집안 친지들은 할아버지를 되도록 피했다. 할아버지는 조상에 대한 예의, 특히 제사 의식에 엄숙했다. 추운 겨울날에도 제사에 참례하기 전에는 나에게 반드시 우물에 가서 찬물로 세수를 하게 했다. 나는 한밤중에 일어나 캄캄한 우물에 가서 세수하던 일은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금오산 도선굴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구미 시가지
 금오산 도선굴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구미 시가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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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대들보

할아버지는 한학과 천문에 조예가 깊었다. 글씨는 언제나 단정하였다. 집안의 대소사 의식, 새로 태어난 아이들 작명을 도맡아 했는데 나의 이름 '박도(朴鍍)'도 할아버지의 작품이다. 음양오행과 하늘의 별자리, 달무리로 일기예보를 했고, 우리 집 마당 한가운데서 빤히 바라보이는 금오산이 명산이라고, 너새니 얼 호손의 '큰 바위 얼굴'에서처럼 이 고장의 인물을 예언하곤 했다.

"저 산기슭에서 인물이 많이 나왔고, 앞으로도 많이 나올 거다."

할아버지는 이따금 산이나 들에서 돌아올 때면 산딸기나 오디(뽕나무 열매)를 칡잎이나 호박잎에 싸와 나에게 말없이 건네주었다. 할아버지는 옛것을 지키겠다고, 꺼져가는 조선의 혼을 이어가겠다고 안간힘을 다하며 고래고래 소리쳤다. 하지만 해방과 6·25전쟁으로 미군들과 함께 밀물처럼 밀어닥친 양풍의 도도한 물결은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어느 가을 추수를 끝낸 후 햅쌀 한 가마니를 열차로 부치고, 부산 아들집에 가다가 부산역 대화재 후 컴컴한 밤길에 그만 개천에서 실족, 머리를 크게 다쳐 일 년여 고생하다 운명했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해 어느 날 학교에 온 적이 있었다. 수업 중인 나를 보고선 아무 말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 길로 집을 나가신 뒤 1주일 만에 돌아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당시 자유당의 횡포와 이승만 대통령의 독재가 극에 달했다.

그런데도 고향 출신의 자유당 국회의원(김우동 의원)이 국회에서 바른말 한마디 못한 채 여당의 거수기 노릇만 한다고 분개, 상경하여 항의하고 왔다고 했다. 떠나기 직전, 왜 나를 찾으셨을까? 아마도 그날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으로 당신의 장손인 나를 다시 한 번 보고 싶어 왔던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해 여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임종이 임박하여 내가 부모님을 모시고자 부산에 다녀올 동안까지 연명했다. 내가 도착하자 곧 나의 이름을 부르면서 눈을 감았다. 할아버지는 우리 집안의 대들보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안은 서서히 기울기 시작하여 이태(두 해) 만에 기왓장까지 내려앉고 말았다.
  
 나의 할머니(강시선) 회갑 날(1956년), 할아버지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
 나의 할머니(강시선) 회갑 날(1956년), 할아버지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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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나의 할머니는 신천 강(康)씨로 친정은 선산군 고아면 대망동이다. 1896년 태생으로 16세 때 네 살 연하인 나의 할아버지와 혼인하였다. 나는 어린 시절 주로 안방 할머니 품에서 잤다. 할머니는 이야기를 참 잘하셨다. 그때 이불 속에서 자주 들은 얘기다.

1946년 10·1항쟁 때 박상희 선생이 경찰서 바로 아래 벼가 누렇게 익은 논에서 충청도에서 내려온 경찰의 총에 맞아 거적때기에 둘둘 말려 끝내 형곡동 어귀 공동묘지로 갔다는 얘기, 그날 진압 경찰들이 총을 마구 쏴 경찰서와 가까운 우리집 식구들은 무서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지냈다는 얘기, 그때 유치장에 갇혔던 아버지 옥바라지한 얘기 등이었다.

또 당신 시집살이 시절 도개마을 옆집에 살았던 한 여인(김호남)의 기구한 팔자 얘기도 자주 했다. 그 인물도, 솜씨도 좋은 김호남 여인이 구미 상모동의 까맣고 쪼고만 신랑(박정희)과 혼인한 뒤 소박을 맞고 여러 절로 전전한다는 가슴 아픈 얘기였다. 사내가 조강지처를 버려도 자식도 있는데 살 방도도 해 주지 않고(위자료도 한 푼 주지 않고) 그렇게 모질게 버려서 안 된다는 등의 얘기를 자주 말씀했다.

내 어린 시절 별명은 '죽고지비'였다. 성장 이후에도 동네 어른들은 나만 보면 "미꾸라지 용 됐다"는 말을 자주 했다. 나는 그 말이 가장 듣기 싫었다. 갓난아이 때 태열이 몹시 심한 데다가 어머니가 곧 둘째를 갖자 젖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와 동년배인 사촌형제 어미인 고모들로부터 젖동냥으로 주린 배를 채우거나 암죽 같은 것을 먹고 자랐다고 한다.

한 번은 어머니가 어린 나를 업고서 친정에 갔다. 아마도 그날이 외할머니 생신이었던 모양이다. 막내딸이 시집을 간 뒤 아들을 낳아 업고 친정에 오니까 외가에서는 엄청 반가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 아들을 마루에 내려놓자 곧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렸다. 외할머니가 그런 나를 보더니 딸에게 말했다.

"어서 시집으로 가거라. 남의 집 귀한 자손 친정에서 무슨 일이 나면 평생 구박을 받는다."
 

그 말에 어머니는 친정에서 하룻밤도 쉬지 못하고 그대로 나를 업고 발길을 돌렸다고 한다. 나의 할아버지는 점쟁이들을 싫어하는 깐깐한 분이었다. 그런데도 할머니가 손자를 위해 점을 치거나 액땜을 한다면 할아버지는 모르는 척 사랑방 문을 닫거나 집을 비웠다고 한다.
  
 금오산 저수지로 가뭄 때문에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이 사진은 1950년 한국전쟁 전후 미 공군 정찰대가 촬영한 것으로 NARA에 소장된 것을 눈빛출판사에서 입수하여 기자에게 제공했다. 그 당시 금오산 정상에는 미 공군 항공 탐조대가 주둔했다. 그 당시 대부분 산들은 벌거숭이였고, 가뭄도 무척 심했다. 그 당시 시대상을 가늠할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사진이다.
 금오산 저수지로 가뭄 때문에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이 사진은 1950년 한국전쟁 전후 미 공군 정찰대가 촬영한 것으로 NARA에 소장된 것을 눈빛출판사에서 입수하여 기자에게 제공했다. 그 당시 금오산 정상에는 미 공군 항공 탐조대가 주둔했다. 그 당시 대부분 산들은 벌거숭이였고, 가뭄도 무척 심했다. 그 당시 시대상을 가늠할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사진이다.
ⓒ NARA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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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산에 팔다

내가 할머니에게 맡겨진 이후의 일이다. 어느 하루 스님이 우리 집에 탁발을 하러 왔단다. 할머니는 공양미를 스님에게 건네면서 손자의 건강이 시원치 않다고 하소연을 했다. 그러자 스님이 딱 한 마디 했단다.

"저 애를 살리려면 금오산에다 파시오."

할머니는 그 말을 듣고 날을 받은 뒤 나를 업고 금오산으로 갔다. 거기 저수지 둑에서 금오산에다 손자를 파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그 며칠 후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구미 역전 '영수약국'에 데려가서 탕약을 지었다. 이영수 약사는 진맥을 한 뒤 탕약을 지어 건네면서 말했다.

"아주 쓴 약이라 어린아이가 먹어낼지 모르겠습니다."

(이영수 약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구였던 이준상의 아버지로 후일 장태완 수도경비사령부 사령관의 장인이기도 하다. 그 댁에서 아들 친구 박정희에게 도시락을 싸주거나 집에 데려다 자주 주린 배를 채워주었다.)

"참 얄궂어라. 네가 그 쓴 약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꿀떡꿀떡 다 마시더라. 아마도 살려고 그랬던 모양이제."
 

할머니는 그 약이 떨어지자 또 한 첩을 더 지어 먹였다. 그러자 앞산만 했던 내 배도 점차 꺼지고 태열도 사라지면서 비로소 얼굴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더란다. 그 이후에도 영수약국을 자주 드나들었다. 나도 그때 쓴 약을 먹었던 기억들이 어슴푸레 남아 있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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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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