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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진 다산초당 전경. 신유박해 때 유배된 다산 정약용이 생활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강진 다산초당 전경. 신유박해 때 유배된 다산 정약용이 생활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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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 군주시대에 특정한 정파의 활동과 책임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임금에 따라서 권한행사에는 차이가 있어도 "짐이 곧 국가"라는 권력의 위상에는 동서가 다르지 않았다.

조선중후기 그러니까 숙종 초기에 서인 내부에서 정치운영 방식을 둘러싸고 송시열을 중심으로 갈라져 나온 노론은 18세기 말에는 사도세자의 존위에 대한 입장 차이로 시파와 벽파로 다시 분파되었다.

노론은 같은 서인의 뿌리인 소론을 격파하고,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북인과 남인을 차례로 무너뜨리면서 300여 년 동안 집권한 권력의 실세이고 실체였다. 성리학을 신봉하면서 중원에서 명나라의 멸망으로 끊어진 천하의 정통성을 조선이 이어받는다는 이른바 소중화사상과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삼았다.

중원에서는 이미 성리학이 약화되고 이용후생을 본질로 하는 새로운 세계관이 자리잡아 가고 국내에서도 북학파에 의해 세계의 객관적인 인식과 과학문명이 들어오고 있음에도 노론계열은 공리공담론에 빠져 국리민복보다 낡은 질서와 기득권의 유지에만 집착하였다. 자신들은 군자당(君子黨)이고 반대파를 소인당(小人黨)으로 몰아 숙청하면서 권력을 독점하였다.

정조 대에는 그나마 시파와 남인 세력이 있어 어느 정도 견제와 균형의 추가 유지되었는데, 순조 집권 후 안동 김씨, 현종 대에는 풍양 조씨, 철종 시기에는 다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로 나타나고 마침내 망국으로 막을 내렸다. 이 시기 권력의 중추는 모두 노론벽파였다.

주자학을 유일사상으로 받들어 양명학을 이단으로 만들고, 수많은 천주교도를 도살했으며, 위로는 임금을 독살하고 아래로는 신분제를 강요해 백성을 노예로 만든 노론, 그 결과 조선 후기 사회는 '노론 천국, 백성 지옥'이 되었다.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제와 결탁한 이들도 노론이다. 나라를 팔아먹는 데 조직적으로 가담한 노론은 한일강제병합 이후 일제에게 작위와 막대한 은사금을 받은 76명의 수작자(受爵者) 중 80퍼센트에 가까운 57명이다. 제일 매국노 이완용과 왕실 인사들을 제외하면 '노론당인 명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석 1)


노론의 권력놀음에 쫓겨 정약용은 1801년 11월 전라도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1790년 스물아홉 살에 충남 서천 해미현의 첫 유배는 10일 만에, 두 번째 장기현의 유배는 7개월 남짓, 세 번째 강진의 유배는 그야말로 기약이 없는 길이었다.
  
사촌서당 유배당시 정약전이 마을아이들을 가르쳤던 서당. 현판은 사촌서당 대신 복성재나 사촌서실 현판을 달아야 맞다. 글씨는 정약용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 사촌서당 유배당시 정약전이 마을아이들을 가르쳤던 서당. 현판은 사촌서당 대신 복성재나 사촌서실 현판을 달아야 맞다. 글씨는 정약용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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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는 왜 강진이고 형 정약전은 나주목의 흑산도(현 전남 신안군 소속)인지, 알 길이 없었다. 형제는 나졸들에게 이끌려 11월 말 나주 성밖에 있는 율정점(栗亭店)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하루밤을 묵고 다음날 각각 유배지로 떠나야 했다. 이제 헤어지면 생전에 다시 만나게 될지 기약없는 이별의 순간이었다.

정약용의 「율정별(栗亭別)」이란 시에 남다른 감회가 서린다. 실제로 형제는 이때에 헤어지고 생전에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정약전은 1816년 유배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초가 주막의 새벽 등잔 가물거려 꺼지려는데
 일어나 새볔별을 보니 이별할 일 참담하구나
 묵묵히 마주 보며 둘이서 말이 없고
 목청 바꾸려 애쓰니 목이 메어 울음 터지네
 흑산도 아득하여 바다와 하늘 맞닿은 곳이니
 그대 어쩌다가 이 속으로 들어가시는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중앙의 중죄인을 반갑게 맞이하는 곳은 없었다. 지금도 형무소(감옥) 등 이른바 '혐오시설'이 자기 지역에 들어오는 것을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지는 경우를 보게 된다. 강진의 주민들도 다르지 않았다. 어느 집에서도 죄인 정약용이 머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겨우 동문 밖 주막의 노파가 받아 주었다.
  
 강진에 유배 당한 정약용을 최초로 품어 준 사의재 주모와 처녀 동상입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기도 합니다. (2017.3.11)
 강진에 유배 당한 정약용을 최초로 품어 준 사의재 주모와 처녀 동상입니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기도 합니다. (2017.3.11)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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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진에서 배소를 몇 차례 옮겨 다니기는 했지만 장장 18년의 유배는 한민족에 길이남을 저서 500여 권을 지었으니, 그의 불행은 곧 민족사에는 축복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인류사의 명저는 대부분이 감옥이나 유배지에서 쓰여졌다. 그런 면에서 해방 이후 양심수들의 옥중 집필을 금지시킨 이승만ㆍ박정희ㆍ전두환은 조선시대 위정자들보다 못한 인간들이다.

주나라의 문왕은 포로의 몸으로 『주역』을 썼고, 공자는 액을 만나 떠돌면서 『춘추』를 지었고, 좌구명(左丘明)은 실명해서 『국어』를 집필하고, 손자는 두 다리를 끊긴 후 『병법』을 완성하고, 여불위는 촉나라로 귀양가서 『여람(呂覽)』을 썼으며, 한비(韓非)는 진나라에 붙들려 『세난(說難)』을 지었다.

사마천은 옥에 갇혀 남근(男根)이 잘리는 치욕을 겪으며 『사기』를 썼고, 볼테르는 왕실에 대한 담시를 썼다는 이유로 11개월을 바스티유감옥에 갇혀 『앙리아드』를 지었고, 존 번연은 왕군에 잡혀 베드포드 군 형무소에서 11년간 옥살이하면서 『천로역정』을 집필했다. 세르반테스는 왕실 감옥에 갇혀 『라만차의 돈키호테』를 쓰기 시작했으며, 마르코 폴로는 포로생활을 하면서 『동방견문록』을 썼고, 오 헨리(본명:윌리엄 시드니 포터)는 『점잖은 약탈자』 등 단편을 옥중에서 집필하였다.

프랑소와 비용은 종교비방 혐의 등으로 사형을 선고받고 지하토굴에 갇혀서 대표작 『유언시』를 지었으며, 오스카 와일드는 동성연애 혐의로 투옥되어 『옥중기』 등을 썼고 『살로메』 등 명작을 남겼다. 리 헌트는 왕실비방 혐의로 2년간 감옥에 있으면서 『시인의 축제』라는 책을 지었다. 자와할랄 네루도 10여 년간 옥중에서 『세계사개설』을 썼다. (주석 2)


주석
1> 이주한,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 뒷표지, 역사의 아침, 2011.
2> 김삼웅, 『금서ㅡ금서의 사상사』, 18~19쪽, 백산서당, 1987.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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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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