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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마산문학관의 '이은상 시비'
 경남 마산문학관의 "이은상 시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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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상(李殷相)은 1903년 10월 22일 마산에서 태어났다. 대중들에게 그는 가곡 〈고향 생각〉, 〈가고파〉, 〈성불사의 밤〉 등의 노랫말을 쓴 시조시인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또 <조선사화집(朝鮮史話集)>, <피어린 육백리>, <이충무공 일대기> 등 100여 권의 저서를 남긴 사학자이자 문장가이다. 

이은상은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은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그가 독립지사라는 사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이에 국가보훈처 독립운동유공자 공훈록의 〈이은상〉 해설을 아래에 인용하고 따로 설명하는 글을 덧붙인다. 

'1928년에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의 조선어사전 편찬위원으로 활약하였다.'

계명구락부는 최남선·오세창·박승빈·이능화·문일평 등 지식인 33명이 민족 계몽과 학술 연구를 목적으로 1918년에 설립한 단체이다. 특히 1927년 주시경·이규영 등의 <말모이> 원고를 인수하여 <조선어 사전> 편찬에 착수함으로써 조선어연구회의 모태가 된 일은 특기할 만하다.

'26세 때인 1929년에는 월간 잡지 <신생(新生)>의 편집장으로 활동하였다.'

<신생>은 1928년 10월부터 1934년까지 통권 60호를 발행된 월간 잡지로, 무게있는 글로 지식인층에 인기가 높았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31세 유형기가 발행을 시작했고, 이윤재(1888-1943)·이태준(1905-미상)·이은상 등이 편집을 담당했다.

'1931년 6월부터 동아일보에 35회에 걸쳐 빼앗긴 조국의 국토와 문화재에 얽힌 심정을 술회한 〈향산유기(香山遊記)〉를 연재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여기서 향산은 묘향산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온 태백산을 묘향산으로 비정했다. 국가보훈처 누리집은 이은상이 나라 안의 그 많은 산 중에서도 묘향산을 골라 여행기를 쓴 것을 민족의식을 고취하려는 취지의 소산으로 보고 있다.

'1934년 5월 진단학회(震檀學會) 창립의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진단학회는 한국사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학술단체로 1934년에 창립되었다. 1942년 일제가 조선어학회를 탄압할 때 진단학회 간부들도 함께 체포해감으로써 학회 활동이 중단되고 말았다.

'1934년 겨울에 민족독립사업에 유용한 국가적 인재를 양성할 교육기관으로 양사원(養士院)을 설치할 것을 이극노·안호상·이윤재 등과 추진하였다.'

그러나 민족자본가 정세권의 적극적인 후원에도 불구하고 1942년 10월 일제가 조선어를 연구한 학자들을 대거 체포하고 고문하여 이윤재와 한징이 옥사하는 조선어학회 사건이 터지면서 성공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1935년에는 조선기념도서출판관(朝鮮紀念圖書出版館)을 조직하는 데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은 조선문화 향상을 위해 도서 출판의 진흥을 도모한다는 취지로 세운 출판사로, 실제 많은 책을 출간했다. 

'1937년에 조선일보에 〈한라산 등반기(漢拏山登攀記)〉, 1938년에 〈지리산 탐험기(智異山探險記)〉를 발표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또한 1938년에 조선일보의 주간으로 있으면서 일본군의 명칭을 '아군(我軍)', '황군(皇軍)'으로 표기하는 것을 반대하고 동년 6월에 사직하였다. 1942년 10월에 일제가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 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한글 연구자들을 탄압하기 위하여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운동(朝鮮語學會運動)으로 구속되어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일제의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1943년 9월 18일 함흥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1년간의 옥고를 겪었다.'

조선어학회는 강제 해산되었다가 1949년 '한글학회'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이은상은 일제 강점 기간에 한국민족 고유의 시조 분야에서 우수한 작품을 창작하여 민족문화의 발전에 기여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상과 같이 소개하면 이은상의 좋은 점만 부각한 글이 된다. 하지만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등 7개 시민사회단체는 2015년 12월 15일 창원시청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권력을 쫓아다니며 곡학아세를 일삼은 절세의 기회주의자 이은상'은 마산 시민들과 민주혁명의 역사에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대역무도한 짓'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이은상이 마산 시민들과 민주혁명의 역사에 저지른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대역무도한 짓은 무엇일까? <경남매일> 2020년 3월 16일 기사 '친독재 행적 시인 이은상 기념물 철거하라'에 따르면 "이은상 시인은 3ㆍ15 부정선거 당시 전국을 돌며 이승만 지지 유세를 다닌 사람"이다.

사람은 당대의 시대정신에 따라 평가된다

일제 강점기 때 주로 활동한 사람은 그가 독립운동가인지, 아니면 국가와 겨레를 배신하고 자기 혼자만의 부귀영화를 도모한 친일파인지가 평가 기준이 된다. 독재정권 시기의 사람은 그가 민주화운동을 했는지, 아니면 개인의 영달을 위해 권력에 빌붙어 살았는지가 평가 기준이 된다. 이은상의 예는 그 둘이 겹친 희귀한 사례로 보인다.

그는 일제 강점기 때는 조선어학회 활동과 관련하여 문화운동 분야에서 항일 활동을 한 독립지사이다. 그런데 해방 이후에는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과 친밀하게 지내면서 독재에 부응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가 왜 20대, 30대 청년 시절과 40대 이후 시절을 아주 다르게 살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독립운동에 기여한 그가 그가 왜 민주화에는 이바지하지 못했는가 하는 점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성불사 깊은 밤에 그윽한 풍경소리
주승은 잠이 들고 객이 홀로 듣는구나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이은상의 '성불사의 밤'이다. 성불사는 황해도에 있다. 성불사 깊은 밤에 풍경소리만 그윽하다. 주승은 그 풍경소리가 아무리 그윽하다 한들 날마다 듣는 것이라 잠을 이루지 못할 일이 없다. 그러나 객은 그 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잠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이은상은 '저 손아, 마저 잠들어 혼자 울게 하여라' 하고 말한다.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손이 잠에 빠져들면 풍경소리가 더욱 그윽해진다는 표현인 듯 여겨진다. 하지만 모두들 잠이 들어 아무도 듣는 이가 없으면 풍경은 울려도 소리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즉 이은상은 풍경소리가 '지금' 너무나 그윽하다는 사실을 표현한 것이지, 손이 잠들면 그 소리가 더욱 그윽해진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너무나 잘 아는 이은상이 왜 해방 이후 독재 정권에 부역하였을까? 그의 그윽함은 일제 강점기 때까지가 한계였을까? 아니면, 독립이 되었으니 이제부터는 주승도 손도 다 잠이 든 세상이 왔다고 보았던 것일까?

태그:#이은상, #성불사, #가고파, #10월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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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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