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22 13:28최종 업데이트 20.09.22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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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가을학교에 교실수업을 재개하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지만, 상황은 여전히 불안한 상태다. ⓒ 강인규

 
나는 반년이 지난 뒤에야 교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지난 봄, 코로나 사태로 인해 대학이 갑작스레 문을 닫으면서 모든 수업을 비대면으로 바꿨다. 봄학기가 끝나고 긴 여름방학이 지난 뒤에야 학교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학교 측은 교수와 학생들에게 가을학기 교실 수업 재개를 놓고 의견을 구했고, 구성원의 안전을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 결과 대면 수업을 위해서는 강의실 수용 인원을 대폭 줄이고, 강의실 환기 시설을 개선해야 하며, 건물 내에서는 교수와 학생 모두가 마스크를 착용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아울러 모든 유증상자에게는 검사를 시행하고, 확진자와 접촉한 학생과 교직원은 격리하기로 했다. 동시에 모든 학생과 교직원을 대상으로 일정 비율을 무작위 추출해서 검사하기로 했다. 하지만 교실수업을 재개할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펜실베이니아 주의 확진자 수가 지속적으로 감소해 왔기 때문이었다. 대규모 확산 초기에 주지사가 식당, 술집, 극장, 공연장, 체육시설 등을 폐쇄하면서 공공시설 내에서는 모두가 마스크를 쓰도록 의무화했다.

이 험난한 과정을 거쳐 나는 교정으로, 연구실로, 그리고 교실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학교의 모든 강의가 대면으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교수들 절반 이상이 비대면으로 수업하기로 했고, 나머지 절반가량이 교실수업과 비대면을 혼합한 형태로 진행하고 있다.

나는 학생들에게 의사를 물었다. 대다수가 교실 수업을 선호했지만, 일부는 매우 타당한 우려에서 온라인 수업을 원했다. 대면인가, 비대면인가. 이 문제를 두고 오래 고민해야 했다. 학생들의 안전, 내 안전, 학생과 내 가족의 안전이라는 여러 개의 저울추가 한쪽을 누르는 한편, 반대쪽에는 '교육 효과'라는 하나의 큰 추가 놓여 있었다.

물론 교육효과에는 강의 전달 효과뿐 아니라, 학생들간의 교류라는 사회적, 심리적 요인도 포함돼 있다.

대면인가 비대면인가
 

지난 4월 20일 오전 서울 용산구의 한 가정에서 용산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한 신입생 어린이가 노트북 앞에서 학교 유인물을 바라보며 입학식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결국 교실 수업을 하기로 결정했다. 교실에 오기를 꺼려하는 학생들에게는 비대면으로 들을 수 있는 다른 온라인 수업을 추천해 주었다. 안전을 최대한 도모하기 위해 강의 정책도 대폭 수정했다. 출석을 아예 평가 항목에서 제외하고, 몸이 조금만 아파도 수업에 나오지 말고 집에서 쉬면서 검사를 받도록 한 것이다.

이번 학기에는 컴퓨터랩에서 코딩 수업을 하기 때문에, 공용 마우스와 키보드를 사용하기 전에 (물기를 최대한 제거한) 소독용 천으로 조심스레 닦고, 수업 후에는 꼭 손을 씻으라고 당부했다. 다행히 현재까지는 탈 없이 수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상황이 언제 어떻게 바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아랑곳없이 알록달록 갖가지 마스크를 쓴 채, 시간만 나면 수다 떨기에 바쁘다.

내가 대면수업을 하기로 결정하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지난 학기의 비대면 수업 경험 때문이었다. 지난 학기 인터넷으로 강의를 하면서, '비대면 비수업'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화면에 얼굴 하나를 최대 크기로 띄워도 상대 표정을 읽기 어려운 마당에, 수십 명 얼굴을 손톱만한 크기로 층층이 쌓아놓고, 각 학생의 사정을 살피며 '소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금이 위기상황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이 시점에서 비대면 수업이 필요악이라는 점도 잘 안다. 하지만 비대면 수업이 제대로 된 '수업'이 되기 위해서는 특별한 조건과 지원이 필요하다. 비대면 수업에서의 지원이라면 흔히 기술적인 것을 떠올린다. 예컨대 와이파이 등의 인터넷 서비스, 화상카메라, 컴퓨터와 같은 하드웨어처럼 말이다.
 

비대면 수업에서 널리 사용되는 플랫폼 '줌'. 특별한 대안이 없는 탓에 유사한 형태의 비디오 화상회의 시스템이 사용되고 있으나, 소통의 비효율, 학습 관리의 어려움, 소외감, 정서적 혼란, 피로 등의 원인으로 지적받고 있다. ⓒ 줌

 
물론 기술적 지원은 필요하고 또 중요하다. 하지만 건물만 지어놓고 책상과 칠판만 설치한다고 가르침과 배움이 이뤄지지는 않듯, 최신 설비를 마련한다고 교육이 저절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가장 중요한 요인은 따로 있다. 바로 '사람'이다. 대학에서 10년 넘게 가르친 교육자로서, 나는 '관심'을 교육의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 여긴다. 관심을 쏟으면 학생의 필요를 알게 되고, 그것을 채워주기 위해 노력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학생과 선생의 삶 모두가 변화한다.

다른 모든 자원과 마찬가지로, 교육자 개인이 베풀 수 있는 관심의 양에는 한계가 있다. 이는 더 어린 학생들을 더 넓은 영역에서 보살펴야 하는 유치원, 초중고 교사들에게 더욱 그러하다. 코로나 대유행 이후 교사들로부터 '마치 24시간 대기조가 된 느낌'이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교실에서 아이들을 볼 수 없게 되면서, 관찰과 보호의 영역이 삶의 전 영역으로 확장되었지만, 직접 대면할 수 없기에 간접적 단서와 신호들을 끊임없이 찾아 나서야 한다.

많은 교사들이 깊은 피로와 좌절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대부분 성인 학생을 가르치는 내 경험으로도, 비대면으로 최대한 대면 수업에 가깝게 가르치려면 학생이 절반 이하여야 한다.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는 이보다 노동 강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학생들을 잘라낼 수는 없으므로, 유일한 대책은 교사 수를 늘리는 것이다. 충분한 교사 확충과 지원이 학생 개인에게 충분한 관심을 쏟을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이다.

하지만 정부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아동 학대의 증가, 신고의 감소

코로나 대유행 이후 전 세계적으로 독특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아이들이 가정 내에 머무는 시간이 늘고, 다수의 부모나 보호자가 실직하거나 수입이 줄고, 활동의 제약으로 인해 정신적, 심리적 문제 발생의 소지가 높아졌는데도, 아동학대 신고는 급속히 줄어든 것이다. 반면 심각한 부상을 입고 병원 응급실에 실려오는 아이들의 수는 늘었다. 한국 또한 예외가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아동학대를 가정 내에서 신고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초·중·고 교사나 보호기관 종사자들이 학대의 정황을 인지하고 신고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비대면 교육상황이 얼마나 섬세하고 높은 집중력과 관심이 요구되는지를 말해준다.

현재 학교에서 쌍방수업이 잘 이뤄지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인력과 시간의 문제 때문이다. 비대면 수업과 대면 수업의 차이는 그저 전송 방법만이 아니다. 효율적 수업을 하려면 비대면 소통의 한계 내에서 수업계획을 다시 짜야 하며, 그동안 익숙하지 않았던 기술적 문제와도 싸워야 한다.

교사가 화면으로 학생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이유로 그들이 마치 같은 공간에 있는 듯한 착각을 갖기 쉽지만, 학생들은 각기 다른 공간에서 각자의 문제로 씨름하면서 얼굴만 비추고 있을 따름이다. 학력격차가 비대면수업의 고질적 문제로 지적되는 까닭이다. 교사와 돌봄 노동자가 화면의 이미지를 넘어 각 학생들의 상황과 필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실 수업의 몇 배에 해당하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한국 정부는 이런 교육의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비대면 수업을 강화하고, 규제를 풀어 비대면 수업 일수를 늘리겠다면서, 교사 수는 줄이겠다는 것이다. 그 이전에도 현 정부에서 기간제 교사 비율은 가파르게 늘었다.
 

오랜만에 학교로 수도권 지역 유·초·중·고 학생들의 등교가 재개된 21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원일초등학교에서 학생들이 등교하며 체온을 재고 있다. ⓒ 연합뉴스

 
아둔한 '스마트 교육'

학생 수가 줄고 있다고 하나, 한국은 학생 대 교사 비율과 학급당 수에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평균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정부는 교사 임용 축소를 결정한 동시에 '디지털 뉴딜'을 발표했다. 이 정책의 핵심은 정보산업체에 파격 지원을 하는 동시에 정보관련 규제를 푸는 것이다. 코로나 정국에서 오히려 더 잘 나가는 네이버와 카카오 등의 뉴미디어 기업에 특혜를 베풀면서 개인정보 보호의 빗장까지 벗겨주겠다는 것이다.

현 정부가 이명박 정부로부터 계승한 '스마트교육' 역시 기업 지원 정책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대학에서 디지털 기술을 가르친다. 기술의 사회적 진화로 박사논문을 썼고, 대학에서 프로그래밍, 디지털 저널리즘, 멀티미디어 제작을 가르친다. 첨단 기술의 발전과 활용 가능성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지만, 기술의 한계 또한 잘 알고 있다.

뉴욕대의 메레디스 브루사드 교수는 <인공무지능>(Artificial Unitelligence)이라는 책에서 '디지털 기술이 사회문제를 해결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하버드대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콜롬비아대학에서 데이터 저널리즘으로 박사를 받은 그는 기술과 사회를 두루 이해하는 드문 지식인이다.
 

메레디스 브루사드의 책 <인공무지능>. 첨단기술이 사회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오히려 해결을 미루고 은폐하는 기제로 사용되는 문제점을 비판하고 있다. ⓒ MIT 출판부

 
그는 '스마트 교육'이 기술에 대한 터무니없는 맹신과 사회적 무지에서 번져가는 현실에 주목한다. 빈곤지역의 학교일수록 표준화된 전국 시험점수가 낮은데, 교육당국은 '학력을 높이기 위해' 가난한 학교에 컴퓨터와 태블릿을 보급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곤 한다. 그래도 점수가 오르지 않으면 학교 지원금을 줄이고, 더 나아가 학교를 폐쇄하기도 한다.

하지만 가난한 학교의 시험점수가 낮은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학생들이 시험 주관 기관이 발행하는 참고서를 살 돈이 없고, 가정에서 학생의 공부를 도와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스마트'한 교육정책이 훨씬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그것은 태블릿 기기를 배치하고, 정기적으로 교체하고, 이를 관리할 직원을 채용하기보다, 책을 사주고 공부를 도울 인력을 늘리는 것이다.

무엇을 위한 혁신인가

코로나바이러스와의 싸움이 치열했던 지난 4월 말, 대통령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는 3기 첫 공식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윤성로 위원장은 "디지털 인프라에 기초한 온라인 교육, 비대면 진료, 언택트 산업 등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면서 "우리 사회의 디지털 혁신이 더욱 촉진될 수 있도록 관계 전문가 의견을 모아 규제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위 발언이 보도되었을 때 주목한 이들은 많지 않았다. (기사 밑에 달려있던 '댓글 0'이라는 표시가 이 사실을 입증한다.) 정부정책과 관련해 늘 들어온 듯한, 식상한 표현들이 잔뜩 담겨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무척 놀라운 주장이었다.

나는 디지털 전문가지만, 아직까지 '4차산업혁명위원회'가 무엇을 위한 조직인지 모른다. 국제적으로 비판과 조롱을 받아온 '4차산업혁명'이라는 허술한 개념을 간판에 달고 있어서도 아니고, 시민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괴상한 용어들을 남발해서만도 아니다. 예컨대 이들은 '규제개혁 해커톤'이라는 말을 즐겨 쓰는데, '해커톤(hackathon)'이란,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목표를 정해놓고 밤을 새든, 며칠이 걸리든, 완수하기 전까지 작업을 계속하는 것을 말한다.
 

4차산업혁명위원회 웹사이트에 수록된 '규제 제도혁신 해커톤' 홍보물. 이 기관은 기술발전을 구실로 탈규제를 강행하는 역할을 하며, 이들이 말하는 '제도혁신'은 언제나 규제 철폐라는 친시장주의로 나타난다. 이 조직은 정부 인사, 재계 대변자,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교수들로 구성돼 있다는 점에서 놀랄 일은 아니다. ⓒ 4차산업혁명위원회

 
흔히 피자와 콜라가 배달되고, 피로에 지친 프로그래머들이 잠시 눈을 붙이기 위해 침낭이 동원되기도 한다. 개발자들에게 일상화된 밤샘작업과 청년들의 놀이문화가 결합된 독특한 행사로, 여러 팀이 경합을 벌이기도 하고, 단일팀이 분초를 다투며 특정 기능의 프로그래밍에 뛰어들기도 한다. 어느 경우든 목표는 '어쨌든 작동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한 사회의 정책결정은 소프트웨어 개발 작업과 판이하게 다르다. '규제개혁 해커톤'의 문제는 사회구성원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정부정책을 (말 그대로 '해커톤'처럼) 일사천리로 끝내려 한다는 점이고, 그 목표가 언제나 '규제개혁', 즉 규제철폐에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정책 목표에서 시민은 사라지고 (구색 맞추기 용으로 몇 명 끼워 넣는 것을 제외하면), 모든 초점이 재계와 기술에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장의 말을 다시 한 번 들어보자.

"디지털 인프라에 기초한 온라인 교육, 비대면 진료, 언택트 산업 등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우리 사회의 디지털 혁신이 더욱 촉진될 수 있도록 관계 전문가 의견을 모아 규제개혁을 추진하겠다."

교육과 보건은 시민들의 현재와 미래의 삶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며, 그런 까닭에 이 분야의 규제는 시민들의 기본적 필요와 맞물려 있다. 비록 '관계 전문가 의견을 모은다'고 하지만, 교육부, 보건복지부, 질병관리청 등의 전문부서를 제쳐둔 채 기술 중심의 비전문가 집단이 공공영역의 '속성 규제개혁'을 주도하면서 대통령에게 직접 조언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리고 이 위험성이 이후 발표된 빗나간 교육과 기술 정책으로 현실이 되었다.

'사람이 먼저'라는 현 정부의 철학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교육의 목표를 '디지털 혁신'이나 '규제개혁'이 아니라 학생의 삶에 둘 일이다. 그것이 디지털 교과서 도입이든, 코딩 의무교육이든, 비대면 수업이든 말이다. 이 모든 것을 기획하고 추진하고 이익을 얻고 있는 이들보다 훨씬 오래 이 땅에서 살아갈 그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다.
 

현 정부는 일반 시민이 알아듣기 어려운 기술 용어를 즐겨 쓴다. '샌드박스'란 어린이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도록 부드러운 모래로 채워놓은 공간을 뜻하지만, 개발자들 사이에서는 미완성 소프트웨어를 안전하게 시험해 볼 수 있는 가상의 공간을 의미한다. '샌드박스 규제'로 풀려난 규제는 시민들 현실의 삶에 직접적이고 돌이키기 어려운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샌드박스'라는 용어는 매우 부적절하다. ⓒ 대한민국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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