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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민간인들이 빨갱이로 몰려 학살된 대구 가창 계곡
 수많은 민간인들이 빨갱이로 몰려 학살된 대구 가창 계곡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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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0월 15일 '미녀 이중 간첩'의 대명사로 통하는 마타하리(Mata Hari)가 죽었다. 네덜란드 출신인 그녀는 29세부터 파리의 유명한 댄스홀에서 무희로 활동했다. 파격적인 춤과 미모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그녀는 드디어 프랑스 상류사회 남자들과 교제하게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독일이 마타하리를 간첩으로 포섭했다. 마타하리는 프랑스의 국방장관, 외교관, 고급장교 등을 대상으로 수집한 자료를 독일 정보국에 넘기고 돈을 받았다. 그녀는 프랑스를 위해 독일의 첩보를 빼내는 이중 간첩 역할도 했다. 하지만 끝내 정체가 드러나 프랑스에서 총살되었다.

프랑스, '이중간첩' 마타하리 처형

1905년 10월 15일 일진회는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라'는 내용의 소위 '을사늑약'(11월 17일 강제 체결) 촉구 성명서를 발표했다. 뿐만 아니라 일진회는 1909년 12월 4일에는 합방 성명서도 발표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일진회는 순종 황제·일본 내각 총리대신·통감에게 합방 청원서까지 전달했다. 마타하리는 숨어서 밀정 노릇을 했지만 일진회는 드러내놓고 간첩질을 했던 것이다.

마타하리는 그렇게 처형되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반민족 행위자들에 대한 처벌이 거의 없었다. 1945년 독립 이후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들을 그대로 등용했다. 미군정의 친일파 등용은 남한에 반공국가를 세우는 데에 그들을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친일파 척결을 통해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과제는 한국인들에게 급선무였지 미국으로서는 아무 관심도 없는 사안이었다. 친일파 청산은 오히려 미국의 국익에 반하는 일이었다.

우리나라, 친일파들을 대거 등용

미군정을 이어받은 이승만 정권도 친일파를 대거 등용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승만은 친일파를 정권 장악과 유지의 핵심 기반으로 활용했다. 나아가 이승만은 국회가 설립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도 방해하고 무력화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승만은 '친일 세력이 그 후에도 한국사회의 지배 세력으로 군림하는 길을 열어준 것은 물론이고, 한국민족주의의 좌절과 단절을 초래했다.(두산백과)'

미군정 보고서에 따르면, 해방 직후 경찰 조직에서 경사급 이상 간부 969명의 83%인 806명이 친일 경력 소유자였다. 미군정 경무국 수사국장 최능진은 흥사단 국내 조직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조만식·조병옥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친일 경찰 배척을 주장하면서 이승만·장택상·조병옥 등과 대립했다.

'친일 경찰 퇴출' 주장은 미국에 해로운 주장

하지만 결과적으로 경찰에서 쫓겨난 것은 친일 경찰들이 아니라 최능진 본인이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대규모 유혈 사태가 일어났을 때 최능진은 친일 경찰과 부패 경찰의 쌀 강제 공출이 사건 발단의 원인 중 한 가지라고 주장하던 끝에 해임되고 말았다. 국민들은 친일 경찰을 배격하고 처단하라고 요구한 데 반해 미군정은 그 반대였기 때문이다.  

"(남한 전역에서 항쟁이 일어났는데) 항쟁에 참여한 시민과 농민들의 요구는 다양하였다. 도시에서는 식량배급 실시의 요구가 가장 많았으며, 농촌에서는 식량공출의 반대, 소작료 3·7제 실시 요구가 가장 많이 제기되었다. 일부 농촌지역에서는 토지의 무상 몰수와 무상 분배를 요구하였다. 도시와 농촌지역에서 공통적으로 친일파의 배격과 처단,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이양하라는 요구가 나왔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대구십일사건〉) "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구성을 위한 총선이 실시되었다. 김구·김규식 등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인사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이 선거에 최능진은 이승만과 서울 동대문 갑구에서 겨뤘다. 민심은 친일 경찰 척결을 주장해온 최능진을 지지했다. 친일 경찰은 투표 하루 전인 5월 9일 그의 후보 등록을 무효로 처리했다.

이승만 측, 불리하니까 상대 후보 등록무효 처리

그 이후 최능진은 '서재필 대통령 추대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100만인 서명 운동을 전개했다. 이 계획은 서재필이 대통령 출마를 거부하고 미국으로 출국하면서 무산되었는데, 이 일은 이승만이 최능진을 더욱 미워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반민특위 활동을 하던 최능진은 1948년 10월 1일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 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남로당과 함께 혁명의용군을 조직했다는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최능진은 2015년 8월 27일 법원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이미 그는 재심보다 64년이나 전인 1951년 2월 11일 대구 달성군 가창면에서 총살되었다. 그를 재판도 없이 총살한 조직은 관동군 출신 친일파 김창룡의 특무대였다.
 
가창 학살 64주기 추모 행사 중 무용가 박정희(현 대구 북구의회 의원)씨의 안무 장면.
 가창 학살 64주기 추모 행사 중 무용가 박정희(현 대구 북구의회 의원)씨의 안무 장면.
ⓒ 조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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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중에 김규식, 조소앙 등과 함께 '즉각적인 전쟁 중단'과 'UN 감시하의 평화통일'을 김일성에게 제안하여 적을 이롭게 했다는 '이적죄'가 죄목이었다. 친일 반민족 행위자는 단 한 명도 처형하지 않은 대한민국이 친일 경찰 척결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만 무단 처형한 것이다.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최능진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최능진이 없다. 왜 대한민국정부는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다만 이승만에 의해 '사법 살인'된 뒤 52년이 지나 무죄 판결을 받은 조봉암도 독립유공자 명단에 없는 것을 보면 짐작되는 바는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 짐작이 맞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태그:#마타하리, #10월15일 오늘의역사, #이승만, #최능진, #조봉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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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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