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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강년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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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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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기 의병장 이강년(李康秊. 1858-1908)은 22세인 1880년(고종 17) 무과에 급제했다. 그는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향해 있던 중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관리 출신이면서도 동학군에 투신하였다. 이때 동학 장수 이강년을 따랐던 농민군들이 뒷날 의병을 자원하여 창의대장 이강년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일본인들에게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났다. 사변 이튿날인 10월 9일 군부대신 조희연은 '어젯밤 조선사람 여럿이 일본옷을 입고 와서 시위대(왕궁 수비군)와 충돌했을 뿐 일본인은 현장에 없었다.'는 공문을 외부대신 김윤식 편으로 일본측에 전달했다.

조선 정부 "명성황후 죽음과 일본인은 무관" 공문 발송

다시 이튿날인 10월 10일 친일 정부는 '측근들로 당을 이루어 임금의 총명을 가로막고 매관매직을 했다'는 이유로 명성황후를 폐위시켰다. 시해 사실은 감춘 채 황후가 어디론가 피신했다고 허위로 발표했다.

시해 소문은 이내 시중에 퍼졌다. 정부 발표 당일인 10일부터 유생들은 황후 폐위 조치 반대와 일본군 토벌로 국모의 원수를 갚자는 〈토역소(討逆疏)〉를 고종에게 제출했다. 이윽고 11월 5일 문석봉(文錫鳳)이 선봉장 김문주(金文柱), 중군장 오형덕(吳亨德), 군향관 송도순(宋道淳) 등 의병 1,000여 명을 이끌고 유성에서 창의했다.
 
 을미사변 이후 최초로 거의한 문석봉 지사의 생가터(사진 가운데 네모 형태로 보이는 기와집)가 있는 고향마을
 을미사변 이후 최초로 거의한 문석봉 지사의 생가터(사진 가운데 네모 형태로 보이는 기와집)가 있는 고향마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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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석봉은 '국수보복(國讐報復)'의 기치를 내걸고 공주성을 공격했지만 관군과 일본군 연합부대에 패해 경상도로 물러났다. 문석봉은 경북 고령, 성주 등지에서 재기를 도모하던 중 고령 현감의 밀고로 대구감옥에 갇혔다. 하지만 1896년 초 감옥을 부수고 탈출하여 원주 등지에서 의병 봉기를 독려하는 통문을 돌렸다.

문석봉은 옥고로 얻은 병 때문에 끝내 운명하지만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최초로 거의한(의병을 일으킨) 그의 봉기는 의병 활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기폭제의 역할을 한 것으로서 의병사에 큰 의미를 갖는다.(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문석봉〉)'

의병 창의 계기가 된 을미사변과 단발령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일어난 첫 계기는 명성황후 시해와 유성의병 활동이었지만, 활활 타오르도록 힘을 보탠 것은 역설적이게도 친일정부였다. 민심이 부글부글 들끓고 있는 상황에도 아랑곳없이 음력 11월 15일 정부는 이틀 후인 11월 17일을 기점으로 양력을 사용하며, 그날을 새해 1월 1일로 삼는다고 예고였다. 세계 흐름에 부응하겠다는 취지였지만 조선 백성들은 그 조치를 일본 추종 의지의 공개 천명으로 보았다.

게다가 정부는 불에 기름을 붓는 조치를 발표했다. 새로운 1월 1일부터 단발령을 시행한다고 선언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나라 안의 반일·반정부 기운은 더욱 고조되었고, 문석봉의 투옥과 탈옥을 전후하여 경기·충청·강원도에서 시작된 창의는 이내 경상·함경도까지 확대되었다. 을미의병은 친일파로 지목된 관찰사·군수·순검 등을 처단·문책하고, 진압 관군 및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어수선한 정국을 틈타 친러파가 정권을 잡았다. 친러정권은 친일내각 요인들을 역적으로 몰아 단죄하는 한편 단발령을 철회했다. 또 의병을 해산하라는 조칙까지 내렸다. 임금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결국 1896년 3월 이후 의병활동은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이강년도 잠시 의병 활동을 중단하였다.
 
 이강년 의병장의 전투 현장 중 한 곳인 문경 새재
 이강년 의병장의 전투 현장 중 한 곳인 문경 새재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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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년은 1896년 2월 23일 고향 문경에서 거의했다. 이때 왜적의 앞잡이 노릇을 하며 양민 토색을 일삼던 관찰사 김석중(金奭中)과 순검 이호윤(李浩允)·김인담(金仁覃)을 농암 장터에서 효수하였다. 그후 스승 유인석(柳麟錫) 의병부대의 유격장으로서 문경·평천·조령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이강년은 군대가 해산당한 뒤인 1907년 3월 유인석과 의논 후 다시 창의하였다. 7월 7일 그는 원주 진위대(지방 주둔 한국군)를 이끌고 봉기한 민긍호(閔肯鎬) 부대와 합세해 제천에서 적병 500여 명을 격멸했다. 대승 소식을 듣고 각지의 소규모 의병군이 40부대나 몰려와 그를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 의병 총사령관)으로 추대했다.

이때 이미 이강년에게는 '4도 도체찰사(현대의 계엄사령관 격)로 임명하니 만약 말을 듣지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광역 단체장 격)와 수령(기초 단체장 격)부터 먼저 베고 파직하라'는 고종의 밀서가 도착해 있었다.

고종 밀서 "말 안 들으면 관찰사부터 죽여라"

그 후 이강년은 일제 앞잡이 김기찬(金基燦)과 일진회 회원 김상호(金商虎)를 총살하였고, 8월 3일에는 주흘산 혜국사 승려들의 지원에 힘입어 갈평에서 왜군을 쳐수었다. 이튿날인 8월 4일에도 갈평에서 순검 1명을 총살하고, 괴성에서 일본군 육군수괴 과전삼태랑(戈田三太郞)과 육군 보병 대토촌(大土村)을 잡아 효수하였다.

9월 들어 이강년 부대는 9월 16일 싸릿재, 9월 27일 죽령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10월 5일 고리평, 10월 23일 백자동에서도 적을 격파했다. 그 동안 사로잡은 적병도 580명이 넘었다. 하지만 창의 이후 12년에 걸쳐 한번도 크게 패한 일이 없었던 이강년 부대도 11월 12일 풍기 복상동 전투에서는 원철상(元哲常), 이중봉(李重鳳) 등 10여 명의 간부들이 피체되는 등 적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12월 전국 의병으로 13도연합의병부대를 편성해 서울을 공격하는 담대한 계획에 따라 호서(湖西, 충청도) 창의대장을 맡아 군사들을 이끌고 양주로 갔으나 동대문 전투 패전 후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이강년은 그 후에도 계속 1908년 2월 17일 용소동, 2월 26일 갈기동, 3월 12일 백담사, 4월 안동 서벽에서 왜적을 격파했다.

13도 연합의병부대 서울 진격 실패

이강년 부대가 왜적과 싸울 때 김상태(金尙台)·이만원(李萬源)·이중봉·백남규(白南奎)·하한서(河漢瑞)·권용일(權用佾)·윤기영(尹基榮)·이용로(李容魯)·이세영(李世榮) 등 해당 지역 출신 장졸들이 큰 공을 세웠다. 당시 이강년 의병군은 '지역의 지리에 밝고 또 엄격한 군율로 의병부대의 기강이 서 있어서 지방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한 의병 세력이었다.(국가보훈처 〈1995년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하지만 이강년은 1908년 6월 4일 청풍 까치성 전투 때 쏟아진 비로 화승총을 쏠 수 없게 되는 등 고전을 면하지 못하다가 결국 일본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10월 13일 마침내 교수형을 당해 순국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서훈 30인 중 1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은 30인의 독립지사 중 중국인을 제외한 한국인들의 면면을 살펴봄으로써 이강년 의병장이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가진 인물을 살펴볼까 한다.

01. 민영환閔泳煥(1861~1905) 계몽운동
02. 조병세趙秉世(1827~1905) 계몽운동
03. 최익현崔益鉉(1833~1907) 의병
04. 이   준李  儁(1859~1907) 계몽운동
05. 허   위許  蔿(1854~1908) 의병
06. 이강년李康秊(1858~1908) 의병
07. 안중근安重根(1879~1910) 의열투쟁
08. 강우규姜宇奎(1855~1920) 의열투쟁
09. 손병희孫秉熙(1861~1922) 3 ‧ 1운동
10. 김좌진金佐鎭(1889~1930) 만주 방면
11. 이승훈李昇薰(1864~1930) 3 ‧ 1운동
12. 윤봉길尹奉吉(1908~1932) 의열투쟁
13. 안창호安昌浩(1878~1938) 임시정부
14. 오동진吳東振(1889~1944) 만주 방면
15. 한용운韓龍雲(1879~1944) 3 ‧ 1운동
16. 김    구金  九(1876~1949) 임시정부
17. 김규식金奎植(1881~1950) 임시정부
18. 조만식曺晩植(1883~1950) 문화운동
19. 서재필徐載弼(1864~1951) 계몽운동
20. 이시영李始榮(1869~1953) 임시정부
21. 신익희申翼熙(1894~1956) 임시정부
22. 조소앙趙素昻(1887~1958) 임시정부
23. 김창숙金昌淑(1879~1962) 임시정부
24. 이승만李承晩(1875~1965) 임시정부
25. 임병직林炳稷(1893~1976) 미주 방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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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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