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뮬란> 스틸컷

영화 <뮬란> 스틸컷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어려서부터 뛰어난 기를 지녀 무예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뮬란(유역비)'. 그녀는 좋은 집안과 인연을 맺어 가문을 빛내길 바라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본래 자신의 모습을 억누르며 지내지만 자신의 본모습이 무엇인지를 거듭 고민한다.

어느 날, '보리 칸(제이슨 스콧 리)'이 이끄는 유목 민족은 뮬란처럼 기를 지닌 마녀 '시 아니앙(공리)'의 도움을 받으며 실크로드의 주요 기지들을 점령해 나가고, '황제(이연걸)'는 전국에 징집령을 내린다. 이에 자신의 상황을 비관하던 뮬란은 한쪽 다리를 다친 아버지를 대신해 몰래 전장에 나간다.

자신의 성별이 발각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운 와중에도 타고난 기를 활용해 가며 역경과 훈련을 극복해 나가던 뮬란. 마침내 '텅 장군(견자단)' 밑에서 도착한 전쟁터에서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시아니앙을 마주하고, 자신의 본모습에 대한 의문을 해결해 미래를 선택할 기로에 선다.

<말레피센트>, <미녀와 야수>, <알라딘> 등 디즈니 애니메이션 실사화 프로젝트가 꾸준히 진행될 수 있는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이미 애니메이션 원작을 봤던 관객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면서 상업적으로 비교적 안정적인 흥행을 기대할 수 있다. 또한 이른바 '디즈니 프린세스'로 일컬어지는 여러 공주 캐릭터를 재해석하면서 변화하는 사회상에 발맞추겠다는 시도 역시 이 프로젝트의 주요한 원동력이다.

문제는 지금까지 실사화된 일부 작품들이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변화라는 공통의 문제점을 노출한다는 점이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예정보다 뒤늦게 개봉한 <뮬란>은 일부 디즈니 애니메이션 실사 영화들이 보여준 문제점을 그대로 이어받았고, 심지어 더 큰 문제점을 보여준다.

원작에 없었던 '기'라는 능력을 갖게 된 뮬란

1998년에 개봉한 동명의 원작 애니메이션을 리메이크한 <뮬란>은 여성주의적 메시지를 강조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낸다. 근래 디즈니 작품들의 공통된 흐름이기도 하고, 여성 감독과 여성 작가 등 다수의 여성 제작진이 참여한 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뮬란>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원작에서 뮬란은 이미 디즈니 프린세스 중 가장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이라는 점이다. 그녀는 본인이 가지지 못했던 체력, 무술과 전략적인 식견을 의지와 끈기, 노력으로 성취한 인물이었다. 그 결과 그녀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고,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억압하던 사회의 편견을 뚫을 수 있었다. 이 과정이 남긴 감동은 뮬란이 아버지 대신 전쟁터로 나가는 시퀀스가 명장면으로 남고, OST였던 'Reflection'이 불후의 명곡으로 기억되며, 뮬란이 몇십 년 간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이유였다.

이에 <뮬란>의 제작진은 원작에 없었던 '기(氣)'라는 능력을 뮬란에게 선물한다. 작중 기는 영웅에게 주어지는 능력이다. 하지만 여성이 기를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며, 기를 사용하는 여성은 마녀라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이러한 배경에서 특출 나게 강력한 기를 타고난 뮬란은 자신의 능력을 알면서도 부정한다. 하지만 기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추방당했던 시아니앙을 만나 그녀의 사연을 알게 된 후, 뮬란은 그녀의 전철을 밟지 않을 거라고 선언하고 자신의 능력을 당당히 사용한다.

이렇게 뮬란과 시아니앙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고리로 활용된 기는 한 여성의 성장뿐만 아니라 여성 간의 연대라는 메시지를 제시하는 도구다. 또한 여성의 연대의식을 토대로 과거의 차별을 극복하는 새로운 세대의 탄생이라는 확장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장치로도 활용된다.
 
 <뮬란> 스틸컷

<뮬란> 스틸컷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문제는 확장된 메시지가 아이러니하게도 본래 뮬란이라는 캐릭터가 지녔던 가치와 여운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이다. 선천적인 능력이 없는데도 중국 최고의 영웅으로 거듭나는 과정에 담긴 감동, 남성들 속에서 밀리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려던 비장함과 절실함은 원작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하지만 이미 강력한 기를 타고난 영웅으로 캐릭터의 설정을 변경한 결과, 새로운 뮬란이 아버지를 대신해 전쟁터로 가거나 능력을 깨닫는 대목은 원작의 여운을 따라갈 수 없다. 체감되는 역경의 정도가 덜하고 그녀의 서사에서 극적인 면모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기'라는 설정은 뮬란만의 차별화된 매력도 없애버린다. <겨울왕국>의 엘사나 <캡틴 마블>의 캡틴 마블과 같은 캐릭터들의 이야기와 비교했을 때, 선천적인 능력을 부정하다가 특정 계기로 인해서 태도가 바뀐다는 뮬란의 서사가 내세울 수 있는 특별함은 더 이상 없다. 따라서 <뮬란>의 리메이크는 본래 알고 있던 고유한 뮬란을 만날 수 없다는 점에서 실망스럽다.

사실 이처럼 캐릭터의 재해석이 원작의 장점을 파괴하는 결과는 디즈니 영화를 볼 때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뮬란>은 디즈니의 무지라는, 이전에 드러나지 않았던 문제점까지 노출하고 있기에 더욱 실망스럽다. 영화가 가장 핵심적인 변화로 내세운 '기'라는 설정이 중국과 동아시아의 문화적 맥락에 대한 이해가 전무함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작중 뮬란이나 시아니앙은 자신의 기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마녀라고 손가락질받는다. 그러나 중국과 한국 등의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애초에 마녀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기에 이러한 플롯은 어색하고 작위적이다.

역사적으로 중국 문화권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된 여성은 양귀비나 초선처럼 경국지색이라 불리며 섹슈얼리티로서 나라의 운명을 기울게 한 경우가 많았다. 또한 직접 몸으로 부딪히며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은 여장부들에 관한 설화도 많았다. 당장 뮬란만 해도 남북조시대의 시가인 <목란사>의 주인공인 화목란을 각색한 캐릭터다. 또한 <홍계월전>의 홍계월 역시 수차례나 조국을 전쟁과 반란에서 구해낸 영웅이며, 역사적으로도 명나라 말기에 활동한 진양옥 장군은 무너져 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투한 여성이었다.  

반면에 서양에서는 그리스 신화 속 메데이아를 비롯해 아서왕 전설의 모건 르페이와 같은 마녀에 대한 전승과 전통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판타지 소설인 <나니아 연대기>에서도 하얀 마녀가 절대악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중국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기를 사용하는 마녀의 등장은 문화적 맥락에 대한 고려가 불충분했다고 볼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이는 뮬란을 동양의 잔 다르크 정도로 해석하고 서양권의 전통을 곧이곧대로 가져와 배경만 바꾼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현실성 떨어지는 액션
 
 <뮬란> 스틸컷

<뮬란> 스틸컷 ⓒ 월트 디즈니 컴퍼니 코리아

 
더 나아가 영화의 전체적인 방향성을 흐트러뜨리는 액션 시퀀스 역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물론 거대한 스펙터클은 디즈니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기는 한다. 눈사태 시퀀스나 더 스케일이 커지고 다양한 전법과 무기를 활용한 전투 시퀀스 등은 충분히 흥미롭고 탄성이 나올 만한 장면들이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니키 카로 감독이 개봉 전 인터뷰에서 <뮬란>을 현실적인 전쟁 영화로 만들겠다고 밝힌 것과 달리 액션의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작중 액션 장면은 현실성과는 거리가 먼 판타지 혹은 무협 영화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기를 활용하는 인물들 간의 초현실적인 액션을 보여주거나 비교적 좁은 공간 혹은 벽이 있는 공간을 활용할 때 90도로 카메라 구도를 돌리는 식의 연출을 통해 비현실적인 효과를 거듭 강조하기 때문이다.

현실감을 살리기 위해 조상들의 신령이나 무슈처럼 원작의 판타지적 요소들을 모조리 배제했다면서, 정작 러닝타임 내내 판타지 영화의 액션이 가득하다보니, 영화가 지향하는 바가 뭔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이는 다른 디즈니 리메이크 영화들에서 대체적으로 호평받은 화려한 영상미와 거대한 스펙터클마저 <뮬란>의 장점이 되기 어렵다는 의미다.

<뮬란>은 개봉 전부터 걱정이 많았다. 원작의 캐릭터들이 삭제되거나 쪼개지고, 새로운 캐릭터들이 다수 등장하며 원작의 OST가 사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은 팬들의 우려를 사기 충분했다. 코로나19로 인해 개봉일이 연기되었던 것도 좋은 소식은 아니었다. 심지어 주연 배우인 유역비가 홍콩 민주화 사태와 관련해 중국 옹호 발언을 하고, 신장 위구르 자치구 공안처럼 위구르족 인권 탄압과 관련된 단체의 이름들이 엔딩 크레디트에 수록된 것이 알려지는 등 각종 논란이 일면서 보이콧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마침내 공개된 <뮬란>의 결과물은 영화 외적 논란들이 영화의 성공에 있어서 결코 큰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상술한 모든 논란과 걱정을 차치하더라도, <뮬란>은 영화 그 자체로 제목이 같다는 것 말고는 도저히 원작의 감흥을 느낄 수 없는 리메이크 작품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에 게재한 글입니다.
영화리뷰 뮬란 디즈니 애니메이션 페미니즘 오리엔탈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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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읽는 하루, KinoDAY의 공간입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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