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간호 로봇인 간호중은 환자를 돌보는 동시에 보호자의 안위까지 살핀다.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의 고민거리가 된 돌봄 노동을 대체하는 로봇이 환자의 생명과 보호자의 삶 사이에서 고민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며 미래와 동시에 현재의 문제를 다룬다.
 간호 로봇인 간호중은 환자를 돌보는 동시에 보호자의 안위까지 살핀다. 현재 대부분의 사람들의 고민거리가 된 돌봄 노동을 대체하는 로봇이 환자의 생명과 보호자의 삶 사이에서 고민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며 미래와 동시에 현재의 문제를 다룬다.
ⓒ MBC 시네마틱드라마 SF8 - 간호중

관련사진보기

  
가까운 미래의 대한민국. 오늘날 누구나 예상하는 것처럼 그곳에서는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신하고 있다. 그것도 '돌봄 노동'을 말이다. 로봇이 만족할 만한 수준의 돌봄 노동을 할 수 있는가에 관한 문제는 여전히 논쟁적이긴 하지만, 1999년 작 <바이센테니얼 맨>으로부터 시작해서 원제 <Her>로 더 잘 알려진 최근의 <그녀>(2013)에 이르기까지 로봇이 인간의 신체를 어르고 감정을 매만질 수 있다는 상상력은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영상 콘텐츠 플랫폼 웨이브에서 스트리밍하고 MBC를 통해 방영된 <에스에프 에잇>(SF8, 2020)의 첫 번째 이야기, <간호중>도 바로 이런 맥락을 담고 있다. 이 시네마틱 드라마의 기저에 깔린 질문은 매우 극단적이고 그런 점에서 또한 급진적이다. 식물인간 환자의 보호자가 생활고에 지쳐 극단적 선택을 하려 할 때 돌봄 로봇은 선택의 기로 위에 놓인다. 환자를 살릴 것인가, 보호자를 살릴 것인가. 이 질문을 짧게 번역하자면 이런 것이다.

생명의 존엄을 지킬 것인가, 차 안의 고통으로부터 해방할 것인가.

돌봄노동의 디스토피아
  
돌봄이라는 사회적 행위는 우리 인간을 끝없이 시험 들게 한다. 사실 돌봄이 노동이 됐다는 것은 극적인 측면이 없지 않다. 가사 및 육아와 더불어 친밀성의 행위가 임금노동이 된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 거부감이 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본주의적 관계 바깥에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행위가 자본주의의 대표적 상품인 노동으로 변환된다는 것은 서글픈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또 하나의 상투어가 되는 '예술 노동'이란 말에서도 마찬가지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돌봄과 노동의 연결을 마냥 거부하기도 어렵다. 돌봄의 수행은 오랫동안 불평등의 지표로 자리를 잡아 왔었다. 특히나 누군가는 공적 세계에서 노동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으며 자아실현과 임금노동의 아슬아슬한 평형감각을 발휘할 기회를 얻고 있는 동안, 다른 누군가는 현모와 양처라는 상징적 보상 외에는 아무런 대가 없이 돌봄의 독박을 쓰면서 자기 자신을 희생해야 했다. 더군다나 오늘날처럼 성차에 관계없이 누구나가 평등한 개인이라는 이상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통용되는 세상에서, 현대인의 적정한 사회적 삶의 유지를 위해 돌봄이라는 행위는 개인 또는 가족의 구매력 수준에 따라 얼마든지 외주화가 가능한 세상이 되기도 했다.

<간호중>은 돌봄 노동에 대한 미래 이미지를 구현하는 것임과 동시에 현재적 상황에 대한 철저한 은유이기까지 하다. 도시 곳곳에 요양 병원이 줄 서 있는 풍경은 우리가 사는 사회적 상태에 대한 초점화인 셈이다. 우리는 이렇게 미래를 보는 구슬로부터 현재와 맞닥뜨린다. 이미 우리는 노부모에 대한 가족 간병이 사실상 불가능한 세계에 살고 있지 않은가.

효심이라는 오랜 가치를 통해 어떻게든 버티며 스스로를 돌봄의 주체로 갈아 넣을 수도 있지만, 이런 선택은 부득불 불만족스러울 수밖에 없다. 누군가는 요양 보호에 대한 자신의 전문성 부족에 가슴 아플 것이고, 누군가는 다른 삶에 대한 기회를 버리고 있는 것에 아파할 것이며, 또 누군가는 환자와의 소통 불가능성 때문에 지쳐 감정 조절조차 불가능한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 우리가 맞이할 디스토피아는 이와 같은 불행들이 켜켜이 쌓인 풍경과 다를 바 없다.

외주화되는 돌봄노동

간병을 비롯한 돌봄 노동이 외주화되는 것은 현대인들이 자신의 정상적 삶을 유지하기 위한 거의 유일한 출구일 수밖에 없다. 가족을 돌보는 것과 나의 삶을 유지하는 것 그리고 어쩌면은 상해의 충동에 빠지지 않는 것. 이런저런 조건들을 충족하기 위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선택은 지극히 제한적이기 마련이다. 돌봄의 외주화. 그런데 이렇게 하면 환자가 느낄 불안감과 고립감은 또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물론 기술이 발전한다면 내가 아닌 남이 가족을 돌보더라도 가족적 친밀성의 유지 강화는 보충될 수 있을지 모른다. <간호중>은 간병 로봇이 보호자 얼굴의 외피를 씀으로써 보호자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다는 환자의 공포, 나아가서는 환자에 대한 보호자의 도덕적 죄책감이 유예될 수도 있다는 흥미로운 상상력을 제시한다.

하지만 끝내 회피할 수 없는 문제가 다가오게 된다. 간병노동자를 통해서든 또는 가장 완벽한 로봇을 통해서든 돌봄의 외주화가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간호중>은 어쩌면 가장 우울한 시나리오를 제시하는 셈인데, 근미래의 대한민국에서 어떤 보호자들은 뛰어나고 사려 깊은 '고급형' 로봇을 구매할 수 있지만, 다른 보호자들은 어쩔 수 없이 기본 기능만 갖춘 '보급형' 로봇밖에는 구매할 수가 없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보호자의 금전 능력이 그 차이를 가져올 뿐이다. 우리는 환자 가족이 느낄, 또는 보호자 당사자가 느낄 서비스 편차와 상대적 박탈감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증발된 돌봄 노동의 온기

더 근본적인 문제는, 아무리 그럴듯하게 돌봄을 외주화하더라도 보호자 자신은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효심은 물론이거니와 가족적 우애를 성취할 수 없다는 데 있다. 환자와 가장 밀접한 이는 어차피 간병 로봇이 아니겠는가. 혈연 가족에 관한 신화가 유지되는 한 돌봄을 독박 쓰거나 외주화함으로 얻을 수 있는 이상적 가족 상황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게다가 그런 상황에서 주인공 연정인처럼 생활고까지 겹쳐 더 이상 고급형 로봇을 사용할 수 없고 봉양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할 수 없게 된다면? 답은 뻔하다. 우리 인간은 더 이상 온전한 의미에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삶을 유지할 수가 없다.

여기서 극단적 선택을 고민하는 연정인을 보면서 간병 로봇 '간호중'은 또 다른 고민에 빠지게 된다. 환자와 보호자 사이에서 최대 행복 추구라는 합리적 선택의 기준에서 본다면 '사실 살려야 하는 존재는 환자가 아니라 보호자가 아닐까'라고 말이다. 이 지점에 이르게 되면 <간호중>은 단순한 SF를 넘어 한편의 사이코 드라마로 읽히기까지 한다. 실제로 감독 민규영이 로봇 '간호중'과 보호자 '연정인'을 배우 이유영의 1인 2역으로 연출한 것도 바로 이런 측면을 내포한다. 극단적 선택과 합리적 선택이라는 두 가지 내적 고민이 일종의 거울 이미지처럼 외화되어 나타나는 장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수녀 '사비나'가 생명 존엄성에 위협이 되는 간호중을 처단하고자 할 때면 마치 초자아가 작동해서 패륜에 가까워가는 우리의 행위를 차단하고 심판하려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것이 패륜일지 아니면 합리적 선택일지는 불분명하다. 수녀에게 결박되어 포효하는 간호중의 외침은 어떤 식의 판단도 최선일 수 없다는 현재 상황을 떠올리게끔 하기 때문이다. 간호중은 내지른다.

"위선자, 알량한 자기 양심의 무게를 덜기 위해서 도움을 거부해?"

돌봄노동의 미래가 제기하는 질문

여느 로봇물처럼 이 작품 역시 '인간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관계되어 있다. 흔한 말처럼 우리는 인간은 가축화되고 동물이나 사물은 인간처럼 취급되는 세상, 나아가 인간이야말로 비인간적이고 로봇이 오히려 인간적일 수 있는 세상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 같다. 인간다운 삶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을 구한다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간호중>이 이와 같은 내면적 갈등에 대한 형상적 외화이자, 우리가 현재 직면하는 곤란들에 대한 일종의 은유적 시도라는 점이다.

이렇게 불행이 다가오는 순간들에 맞서, 우리 중 대다수는 "알량한" 자기기만으로 내면의 목소리 중 몇몇을 억압하면서 위태위태하게 현재와 미래를 버텨나갈지도 모른다. 물론 콘텐츠 바깥의 실제 세계에서는 전혀 다른 선택지가 있을 수도 있긴 하다(가령 사회적으로 여전히 논의가 부족한 돌봄의 사회화 같은 것들). 그렇지만 작품은 돌봄 노동의 독박과 외주화라는 양자택일적 선택지를 통해 이야기의 산만함을 줄이고 인간적 삶의 아이러니를 조명하는 데 집중했다.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어떤 선택의 정당성도 부정하는 <간호중>은 진정으로 취해야 할 선택은 선택지 바깥에 있다는 점을 역설하는 작품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문화사회연구소 연구원이신 김성윤 님이 작성하셨습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 <일터> 9월호에 연재한 글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모든 노동자의 건강하게 일할 권리와 안녕한 삶을 쟁취하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