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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송악산 해안산책로에 반한 아내가 딸과 꼭 한번 또 오자고 해서, 지난 8월 송악산을 찾았다. 나도 흔쾌히 동의한 여정이었다. 송악산 휴게소에 차를 주차하고 보니 바로 앞에 마라도로 가는 선착장이 보였다. 오늘 마라도에 갈까 생각했지만 코로나19 때문에 사람들이 모이는 선박을 이용하는 건 피하기로 했다. 아쉽지만 마라도 여행은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압도적인 질량감의 산방산이 주변 해안을 감싸고 있다.
▲ 송악산에서 보는 산방산. 압도적인 질량감의 산방산이 주변 해안을 감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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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 기념석을 지나 산길을 오르자 동북쪽 해안으로 산방산의 웅장한 위용이 한눈에 들어왔다. 평탄한 해안선 위에 갑자기 솟아오른 산방산은 압도적인 풍광이 언제 봐도 매력적인 곳이다. 봉우리 위로 구름 자락이 걸치고 있는 모습이 신비스럽기까지 하다. 산방산 아래로는 용머리 해안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 이름과 같이 용머리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다. 
 
제주도를 최후 항전기지로 삼으려 했던 잔악한 일제의 흔적이다.
▲ 일본군 진지동굴. 제주도를 최후 항전기지로 삼으려 했던 잔악한 일제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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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 외부능선으로 서서히 올라가는 길목,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일본군이 만들어 놓은 진지가 있다. 송악산의 지형이 전쟁 시 상륙과 방어에 유리하기 때문에 만들어진 진지이다.

1943년~1945년에 60여 개소나 만들어진 이 진지동굴은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에게 패퇴하던 일본군들이 제주도를 일본 본토를 방어하는 최후의 저항기지로 삼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전쟁이 일찍 종결되지 않았다면 제주도가 불바다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섬찟했다. 바다를 바라보는 이 절경, 송악산의 자연에 일제의 무수한 잔재들이 박혀 있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안타깝다. 

송악산은 제주 남쪽 해안가에 툭 튀어나온 동그란 반도 같이 이어져 있다. 제주도의 오름은 '산'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불리지 않지만, 이 존재감 뛰어난 송악산은 '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제주도의 화산 활동으로 생긴 이 오름은 산 정상에 2중 분화구가 있어서 지질학적으로 매우 신비한 곳이다. 송악산 정상 탐방로는 훼손된 지형의 복원을 위해 2021년 7월까지 출입이 통제돼, 아쉽기만 하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의 해안산책로는 너무나 아름답다.
▲ 송악산 해안절벽.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의 해안산책로는 너무나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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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송악산 정상부 남쪽, 제주 올레길 10코스이기도 한 해안 산책로를 걸었다. 해안절벽 위에 이어진 길을 걷다 보니 제주 올레길임을 알리는 푸른색과 붉은색의 리본이 눈에 띈다. 잔잔한 제주 앞바다와 절벽 안쪽의 진초록 초원의 색감이 너무나 아름답다.

송악산의 제주 올레길은 제법 오르막과 내리막이 있어서 가벼운 트레킹을 하듯이 즐거운 곳이다. 날씨는 더워서 아내와 딸은 살짝 부담을 느끼고 있지만 나는 가끔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계단을 오르고 내려갔다. 눈 아래의 깎아지른 듯한 해안절벽에서는 태평양의 파도가 밀려와서 송악산의 기괴한 현무암을 계속 때리고 있었다. 바다 위로는 가파도와 마라도로 향하는 배가 점이 되어 움직이고 있었다. 

송악산 안에는 꽤 넓고 푸르른 초원이 펼쳐져 있다. 산책길 옆 초원에는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제주말이 있다. 그런데 이 제주말은 옆에 있는 말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다. 자세히 보니 기다란 끈으로 매어져 있어서 멀리 가면 끈이 목에 걸려 더 움직일 수가 없다. 방목되어 있어 자유로워 보이는 말이지만 이 제주말은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자유를 느낄 수 있다.  

이 목가적인 풍경 속의 제주말을 송악산 여행객들에게 태워주는 할아버지가 계신다. 말의 이름을 물어보니 '마라도'라고 한다. 부모와 함께 온 어린 남자아이가 부모를 조르더니 말에 올라타고 송악산 초원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멀리 떨어진 몽골의 초원에서 보았던 풍경들이 이곳 제주의 풍경과 너무 닮아서 놀랍기만 하다.
 
검고 붉은 현무암층이 마치 시루떡처럼 쌓여 있다.
▲ 현무암 수평퇴적층. 검고 붉은 현무암층이 마치 시루떡처럼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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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 남단의 해안산책로 중간에 서면 각기 다른 현무암층이 해안절벽에 검고 붉은 시루떡처럼 쌓인 수평퇴적층의 위엄을 만날 수 있다. 큰 칼로 현무암층을 베어낸 듯한 날카로운 단면은 인간이 만들어낼 수 없는 자연의 기묘한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화산 분출 당시의 모습 그대로 굳은 황토색 용암덩어리는 해안에 투하된 찰흙 덩어리처럼 묽게 퍼져 있고, 현무암 주상절리에서 떨어져 나온 바위 조각들이 바다의 세찬 파도를 맞고 있었다. 나는 걷고 걸으면서 아름다운 풍경을 자꾸 뒤돌아보았다.
 
높고 낮은 계단을 딛고 올레길이 계속 이어진다.
▲ 송악산 올레길. 높고 낮은 계단을 딛고 올레길이 계속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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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 때문인지 산책로 중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송악산 전망대1에 오르니 한반도 최남단의 작은 섬, 마라도와 가파도가 손에 잡힐 듯이 들어왔다. 가파도는 바다와 별로 차이도 나지 않는 높이로 바다 위에 얇게 떠 있었다.  
흡사 인도차이나의 밀림 속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든다.
▲ 송악산 야자수숲. 흡사 인도차이나의 밀림 속으로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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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악산 정상 아래의 분지에는 마치 인도차이나의 밀림을 연상시키는 야자수의 숲도 있었다. 전망대1 언덕 위 뜨거운 햇살 아래에 산을 만나는 바닷바람이 솔솔 불어오고 해안절벽에서는 파도 소리가 아늑하게 들려왔다.     

전망대를 내려가자 평평한 대지 위에 자리잡은 하모리와 모슬포항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고, 바닷물에 풍화, 침식된 검은 화산송이 절벽이 하모해수욕장의 아름다운 해안가를 만나고 있었다. 조금 더 걸어 송악산을 한바퀴 모두 돌아가니 눈 앞에 산방산이 다시 나타났다.
   
높낮이가 있는 산책로이지만 운동 겸 가족 산책로로는 최고인 곳이다.
▲ 해안절벽 산책. 높낮이가 있는 산책로이지만 운동 겸 가족 산책로로는 최고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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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한 산책을 통해 제주의 오름과 바다를 한꺼번에 느낄 수 있는 곳이 송악산이었다. 파도도 바람도 아름다운 곳이 바로 제주 송악산이다. 아무리 사진기에 이 절경을 담으려고 해도 인간이 느끼는 오감을 표현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해안의 절벽을 끼고 걷는 송악산의 산책로는 내 인생에 길이 남을 최고의 산책로였다. 

태그:#제주, #제주도, #제주여행, #송악산, #올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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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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