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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함의 기습 공격을 받아 무너진 대가야의 도읍이 있었던 경북 고령 주산 아래(현 대가야읍)
 사다함의 기습 공격을 받아 무너진 대가야의 도읍이 있었던 경북 고령 주산 아래(현 대가야읍)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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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2년(진흥왕 23) 9월 대가야가 신라에 반기를 든다. 진흥왕은 이사부를 대장으로 삼아 정벌군을 파견한다. 선봉장은 사다함이었다. 사다함이 3000 기병을 거느리고 지금의 경북 고령 주산 아래에 있는 대가야 왕성을 기습한다. 그가 회천을 건너 성안으로 들어가 흰 깃발을 꽂으니 대가야 사람들은 두려워서 어쩔 줄 모른다.

이사부가 본군을 이끌고 공격해 대가야의 항복을 받아낸다. 진흥왕은 사다함을 1등 공신으로 칭찬하고 그에게 좋은 논밭과 포로 200명을 준다. 사다함이 세 번 사양하다가 왕의 강권에 마침내 상을 받아들인다. 사다함이 포로들을 석방해 양민으로 만들어주고 논밭은 함께 싸운 병사들에게 나눠준다. <삼국사기>는 "나라사람들이 그를 칭찬하였다(國人美之)"라고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사다함의 나이가 나오지 않지만 열전에는 당시 15~6세였다고 밝혀져 있다(斯多含年十五六). 진압군이 조직될 때 그가 종군하겠다고 나서자 진흥왕은 너무 어리다며 허락하지 않는다(幼少不許). 하지만 사다함의 출전 의지가 너무나 강고해서 결국 왕은 그를 귀동비장(貴幢裨將)이라는 이름의 부장으로 삼아 이사부를 보필하게 한다.

사다함은 화랑이었을까?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도 열전에도 사다함을 화랑으로 명시한 대목은 없다. 다만 그가 대가야를 향해 출병할 때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其徒從之者亦衆)는 열전의 표현이 참고가 될 뿐이다. 진흥왕이나 총사령관 이사부로부터 받은 정식 군사들을 '따르는 무리'라고 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즉 사다함에게는 평소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그가 화랑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는 말이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신라본기에는 576년(진흥왕 37)에 '잘생긴 사내를 뽑아 화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받들게 했다(取美貌男子 名花郞以奉之)'라고 기록되어 있다. 화랑이라는 제도가 이때부터 국가 주도하에 본격적으로 운영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해주는 표현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화랑과 그를 따르는 낭도들은 서로 도의를 연마하고, 노래와 음악을 즐기면서 산수를 찾아 유람하였는데, 먼 곳이라도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품이 판별되면(知其人邪正) 그 중 선량한 인재를 조정에 추천했다(擇其善者 薦之於朝).' 단체 생활을 통해 사회성을 기르고, 국토 답사를 통해 나라사랑의 마음을 연마했다는 뜻이다.

김부식은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인용해 '왕을 잘 보필하고 충성스러운 신하, 훌륭한 장수, 용맹한 병사들이 화랑에서 나왔다'라고 기록해두었다. 또 중국 당나라 영호징의 <신라국기>를 인용해 '나라사람들이 모두 화랑을 높이 받들었다'라고 증언했다. 

나라의 기둥 역할을 한 인재가 모두 화랑에서 나왔다 
 
압록강 철교 아래로 '단교'와 신의주가 보이는 풍경. 조선소년군을 창단한 조철호 독립지사는 만주로 망명하려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된다.
 압록강 철교 아래로 "단교"와 신의주가 보이는 풍경. 조선소년군을 창단한 조철호 독립지사는 만주로 망명하려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된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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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정신을 계승하려는 소년 단체가 1920년대에도 존재했다는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독립지사 조철호(趙喆鎬, 1890-1941) 선생이 1922년 10월 5일 창단한 조선소년군(朝鮮少年軍)이 바로 그 조직이다. 우선 조철호 지사에 대해 알아본다.

구한말 대한군관학교와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일본 육사 재학 중 동기생 지청천(池靑天)과 함께 조선독립을 위해 헌신하자고 맹약했다. 1917년 졸업하면서 조선군 제20사단 용산 부대에 배속되었다. 그는 군사 기밀을 빼내어 상해 임시정부로 가는 망명하려다가 신의주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이때 총살을 당할 뻔했는데 우여곡절 끝에 살아났다.
     
군대에서 쫓겨난 지사는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중학교에서 체육교사로 근무했다. 이때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독립전쟁에 대비하여 구한국군 교련 방식으로 학생들을 훈련시켰다. 1919년 3월 조만식(曺晩植) 교장을 도와 정주 지역 3·1운동을 주도한 후 만주로 망명했지만 봉천에서 일제 헌병대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서울 중앙학교 체육교사로 일하면서 역시 학생들에게 구한국군 교련방식의 체육교련을 실시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했다. 이윽고 1922년 10월 5일 조선소년군을 창설하여 청소년들을 독립전쟁 전사로 키우기 위해 힘을 쏟았다. 그러던 중 1926년 6·10만세운동 때 중앙학교 학생대표들을 지도하고 후원하다가 일경에 다시 체포되었다. 

1922년 10월 5일 조선소년군이 창단될 때 중앙기독교청년회 소년부 정성채(鄭聖采) 간사도 조선소년척후대(朝鮮少年斥侯隊)를 결성했다. 군대식 조직체인 조선소년군에 견줘 조선소년척후대는 종교적 색채가 강했다. 두 단체는 1924년 3월 1일 소년척후단조선총연맹을 결성하면서 통합했다. 총재는 이상재 선생이 맡았고, 전국에 78개 조직을 두고 활동했다.

하지만 소년척후단조선총연맹은 성격이 다른 두 단체의 이질감을 극복하지 못한 채 분리되었고, 각각 별도의 지방조직을 구성해 활동하던 중 1937년 일제에 의해 결국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한국스카우트연맹 누리집은 이들이 '1946년 3월 1일 사단법인 대한 보이스카우트 중앙연합회로 재발족'했으며 '1948년 8월 국호 변경에 따라 대한소년단으로 개칭'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해방 후 중등학교와 대학에서 실시된 군사 훈련

해방 후에는 정부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1948년부터 군사교육을 실시했다. 이어 1949년 9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에 학도호국단(學徒護國團)을 조직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정부의 학도호국단 창단은 '사상 통일과 단체적 훈련을 강화'하는 데에 목적이 있었다.

교내 군사훈련은 고등학생 주 4시간, 연 156시간, 대학생 주 2시간, 연 70시간 실시되었다. 군사훈련은 종전 이후인 1955년에 중단되었다가 1969년 들어 재개되었는데 고등학생 주 2시간, 연 68시간, 대학생 주 2시간, 연 60시간 실시되었다. 그러다가 대학은 1990년, 고등학교는 1993년에 폐지되었다.

학도호국단은 1960년 4월혁명 이후 폐지되고 '학생회'가 태어났다. 그 이후 1975년 학생회가 폐지되고 다시 학도호국단이 고등학교와 대학에 설치되었다. 재차 운영되었던 학도호국단은 1985년 대학에서, 1986년 고등학교에서 사라졌다.

필자는 군사훈련과 학도호국단과 관련해 정권의 불순함을 짧게 지적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모든 정권은 20대 초반의 대학생들보다 10대인 고등학생에게 더 많은 군사훈련을 시키고 학도호국단도 더 오래 유지했다.

'사상 통일'도 전쟁에 대비한 '단체적 훈련'도 대학생에게 더 필요하다는 것은 굳이 따져보지 않아도 헤아려지는 일이다. 그런데도 어린 10대에게 과중한 군사훈련을 시키고 반발 가능성이 높은 대학생에게는 적게 시켰다.

고등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한 후 독재에 저항할 의지와 사고를 가지지 않도록 만들려는 정치적 계산을 깔지 않고서는 그럴 수 없다. 삼국 통일을 일궈낸 화랑정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오히려 반대되는 목적에서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강제한 독재정권은 그런 점에서도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태그:#사다함, #소년척후대, #조선소년군, #군사훈련, #학도호국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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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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