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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영어 가르치는 일이 수월하지 않듯, 해외에 살면 한국어를 가르치거나 유지시키는 일이 관건이다. 부모의 노력에도 한계점이 온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영어 사용이 자유로워지면 자연스럽게 한국어 능력은 저하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영어 가르치는 일이 수월하지 않듯, 해외에 살면 한국어를 가르치거나 유지시키는 일이 관건이다. 부모의 노력에도 한계점이 온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영어 사용이 자유로워지면 자연스럽게 한국어 능력은 저하되기 때문이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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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모든 개인적 만남은 사양합니다.'
  
주변에 지독한 지인들이 있다. 내가 사는 곳 호주, 캠핑 족들의 천국인 나라에서 캠핑 가자는 애원도 뿌리치고, 아이들과 바다에 놀러가자 해도 막무가내다. 차라리 신성한 일요일 아침이라고, 깊은 신앙심의 발로인 종교 행사 참석이라면 이해가 쉽겠다.

"어떻게 해야 한글을 가르치고 한국어를 사용하게 할 수 있을까?"

타국에 정착해서 아이를 기르는 한국 이민자 부모들은 만나기만 하면 묻고 또 묻는다. 행여나 뾰족한 방법이 있을까 싶어 정보를 찾아 헤매지만, 막상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뻔하다. 집에서 자주 한국어를 사용하고, 한국 아이들끼리 만나 놀게 하고, 주말 한글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는 것. 재외동포가 가진 선택지의 전부다.
  
한국에서 영어 가르치는 일이 수월하지 않듯, 해외에 살면 한국어를 가르치거나 유지시키는 일이 관건이다. 부모의 노력에도 한계점이 온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영어 사용이 자유로워지면 자연스럽게 한국어 능력은 저하된다. 더불어 아이들의 학년이 올라갈수록 부모의 갈등도 덩달아 커진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탓에 학교에서 영어 표현력이나 글쓰기가 뒤처진다는 말을 들으면 부모들은 자책한다.

'혹시 내가 한국어를 강조하다 영어를 놓친 것이 아닌가?'
  
​​​일본의 날... 교장에게 이메일을 보내다
  
호주 빅토리아주에는 총 7개의 학교가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가르치고 있다. 2018년 기준. 빅토리아주 교육부 사이트 화면 캡쳐.
 호주 빅토리아주에는 총 7개의 학교가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가르치고 있다. 2018년 기준. 빅토리아주 교육부 사이트 화면 캡쳐.
ⓒ www.education.vic.gov.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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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과 북한을 합한 면적과 비슷한 빅토리아 주(멜버른이 속한 주)에는 공식적인 한글학교가 4개 정도 있다. 호주의 로컬 학교를 빌려서 토요일 또는 일요일 오전에 주 1회 수업을 여는데, 자녀에게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 주말마다 운전하는 부모들이 많다. 대부분 수년간 30분 이상 운전은 기본이다.

2018년 빅토리아 주 교육부 통계에 의하면 빅토리아 주 전체에 1518개의 정부 학교(한국의 국공립) 중 7개의 학교가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해서 가르친다. 277개의 학교는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선택해 가르치고 있다. 내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도 그중 하나다.
  
아이 학교에선 매년 '일본의 날(Japanese Day)'이 열린다. ​​일본의 날이라 하면 전교생이 일본 문화와 관련된 옷을 입거나 각종 장신구로 머리를 장식하고 온종일 일본 문화와 관련한 다양한 행사를 하는 날이다. 열정적인 교사는 기모노를 입고 게다를 신고 출근하기도 한다. 

학교의 방침을 따라야 하는 걸 알지만, 그 속에서 내 아이가 함께 어울려야 할 생각을 하면 한국 이민자 부모는 속상하다. 결국 나는 교장에게 이메일을 보내 8월에 실시되는 일본의 날을 다른 달로 바꿔달라 요청했다. 최소한 한국인들이 일본으로부터의 식민 해방을 기념하는 광복절이 있는 달만은 피해달라 했다.

'한국어를 제2외국어로 채택하는 학교가 막 늘어나면 얼마나 좋을까?', '한국 정부가 한국어를 확산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주면 얼마나 좋을까?'
  
교육청의 언어파괴, 하나도 멋지지 않다
  
     
정체 불명의 영어와 한글을 섞어 쓰는 교육기관들
 정체 불명의 영어와 한글을 섞어 쓰는 교육기관들
ⓒ 경기도 교육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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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블랜디드 러닝 꿀팁 앙코르 라이브 방송.'

이쯤 되면 언어도단의 끝판왕이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 지인의 한탄처럼 한국어도 영어도 아닌 단순한 한글 파괴다. 이렇게 조악하고 천박한 언어를 구사하는 곳이 한국의 교육 부처인 교육청의 보도 자료란 사실에 절망이 밀려온다. 교육부를 포함한 정부 부처들이 마구잡이식으로 한글과 영어를 섞어 쓰는 관행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린 스마트 스쿨, 뉴 노멀, 언택드, 에듀테크 등 특히 코로나19 시대로 접어들면서 보지도 듣지도 못한 해괴한 표현들이 유행처럼 번져 나가고 있다. 심지어 교사들 사이에서도 조롱과 풍자가 넘쳐난다. 

글을 쓸 때의 기본자세는 독자를 배려하고 존중해서 언어를 선택해야 하고, 쉬운 표현과 겸손한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기본 상식이다. 외국인들도 이해 못 하는 정체불명의 영어로 한글을 오염시키는 행위는 멋지지도 않고, 이 표현을 접하는 상대를 불쾌하게 한다. 

"우리에게는 한글과 한국어가 있어."
  
대뜸 한국인도 중국어를 사용하냐고 묻는 센터링크(Centrelink, 한국의 구청이나 동사무소와 비슷) 직원에게 우리의 말과 글이 있다고 응답할 때가 자존심을 지키는 순간이고 정체성을 확인하는 순간이다. 세상의 거의 모든 언어가 부딪히는 호주에 살면서 재차 확인한 사실은, 내 문화를 지키면서 상대의 문화를 존중하는 것이 가장 큰 경쟁력이란 점이다. 그래서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이 부러운 만큼, 이 속에서도 한국어에 영어를 섞어 쓰지 않으려 고집하는 사람이 아름답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주체성이 없이 세력이 강한 나라나 사람을 받들어 섬기는 태도"를 사대주의라 한다. 혹시 우리 안에 자발적인 언어 사대주의가 뿌리박힌 것은 아닌가, 재외 동포는 서럽다.

덧붙이는 글 | 개인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호주이민, #한글교육, #호주 교육부, #멜버른, #재외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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