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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딱히 일이 정해져 있는 사람이 아니다. 아내의 수행을 돕는 정도가 전부이고 그 일도 대기하는 시간이 많아서 항상 손이 비어 있다. 즉 백수다. '노니 이 잡고 노니 염불한다'고 짬짬이 거제 경기의 부활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기 위해 거제도에서 영업하는 곳 중, 추천할 만한 곳을 찾아 소개하려고 한다.[편집자말]
멍게 양식장 멍게는 2월부터 6월까지 먹을 수 있으며
거제와 통영에서 전국 소비량의 80%를 생산한다.
거제의 멍게비빕밥은 지역 특색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 멍게 양식장 멍게는 2월부터 6월까지 먹을 수 있으며 거제와 통영에서 전국 소비량의 80%를 생산한다. 거제의 멍게비빕밥은 지역 특색 음식으로 자리잡았다.
ⓒ 이승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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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의원인 아내를 운전 수행 차 쫄쫄 따라다니다 보니 눈물겹도록 감동적인 순간을 접하곤 한다. 평생동안 학교에서 훈장 노릇만 하다 폭삭 늙어버린 내가 호기심에 찬 어린아이처럼 세상을 기웃거리며 다니게 만드는 힘이다.

지난달 거제시 고현동의 한 사무실에서 진솔하게 보이는 70대 중반의 남편과 귀티가 넘치는 60대 후반의 아내를 만났다. 민원 청취의 자리에서 함께한 노부부였다.
아내는 민원 내용을 청취했고 나는 옆에서 그분들의 살아 온 이력에 귀를 기울였다.

거제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학교를 마친 후 귀향한 부부는 고향 바다에서 멍게 양식의 선두 주자로 원 없이 돈도 벌었다. 그러나 몇십 명의 직원을 둘 정도로 번창하던 멍게 양식 사업은 남편의 잘못된 보증으로 한순간에 몰락했다.

사업에 실패한 후 결심한 것 

당장 끼니가 걱정되던 그 시절, 남편은 돌연히 장례업을 하기로 결심하고 면소재지에 장의사집을 열었다. 해 본 적도, 곁에서 본 적조차 없던 그 장례 일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고 말했다. 나에게는 그 특이한 직업을 가지게 된 동기가 없다는 것이 더 특이했다. 당시의 궁핍했던 생활을 상상하게 하는 부분이었다.

사업 초기에는 염사를 고용했는데, 3일장 뒷바라지를 한 자신들보다 단 몇 시간의 작업으로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을 본 아내는 염사가 되기로 작정했단다. 지금이야 대학에 장례지도과가 있어서 학문적인 교육과정 속에서 전문가를 배출하고 있지만 당시에만 해도 도제교육으로 장례 과정을 배워 독립하던 시절이었다.

장례 과정을 눈여겨본 날 저녁에는 남편을 대상으로 염습 연습을 했다. 남편을 뉘어 놓고 삼베로 동동 몸을 싸는 법, 매듭짓는 법, 코와 입에 솜으로 처리하는 법, 입관하기까지 꼼꼼하게 반복적으로 실습했다.

내가 남편분에게 "그때, 할 만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다른 별 수가 없었으니까요"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흔들리는 눈동자에서 지나간 시간들이 비치는 듯했다. 이어서 남편분은 이렇게 말했다. 

"아내에게 내가 '죽으면 당신이 염하지 마소. 어깨도 아프고 다리도 쪼이고 말이야. 그리 서툴러서. 원'이라고 불평을 했어요. 그랬더니 '그것은 산 사람의 배부른 불평이요, 이 작업은 죽은 사람을 위한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산 사람들을 위한 일일 것이니 좀 참으소'라더군요."

살기 위해서 죽는 연습을 하던 기막힌 시절이었다.

나는 그 심정을 이해하겠다. 아내가 결혼 후 느닷없이 미용 일을 배우겠다고 나섰을 때, 나는 남자머리 커트 연습 상대였다. 거의 1시간 동안 조몰락거리는 시술을 견뎌야 하던 내 고통은 시신 역할을 한 사람의 고통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그녀는 아내보다 확실히 세다. 어릴 때 시멘트 한 포대를 졌고 8자 농짝을 혼자서 옮기던 아내도 그 용기와 담대함을 인정했다.

드디어 염사가 되었다

드디어 세 번째 장례 때부터 그녀는 직접 염습을 하고 입관했다. 염사가 된 것이다. 여자 고인은 곱게 화장을 해 드렸고 남자 고인은 수염을 깎은 후 스킨까지 발랐다. 당시에는 없던 특별한 예우였다.

원래 유족들은 망자를 최대한 예우를 다하여 존엄하게 보내 드리고 싶어 하기에
이처럼 진중한 절차는 금세 인근에 퍼졌다. 10년 동안 500분의 시신을 장례하며 가세는 점차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명정에 놓는 노잣돈은 모두 걷어서 장애인보호시설에 기부했다. 그 뒤에 시작한 다른 사업에서 큰 건이 성사되어 돈이 들어오면 거르지 않고 1000만 원씩을 꼬박꼬박 떼서 아프리카 기아 퇴치, 우물 파기 사업 기금으로 내놓았다. 그 선행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독실한 카톨릭신자인 그녀는 "하느님은 노력하지 않으면 절대로 복을 주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생전의 1만 원, 사후의 10만 원

장례는 생전에 못다 한 예와 효를 다하는 의식이기 때문에 불효를 한 자식들일수록 노잣돈을 더 많이 올린다고 한다. 그는 "생전의 1만 원이 사후의 10만 원보다 낫다"고 충고했다.

시신을 목욕시키고 수의를 입히는 '습'과 삼베를 이용하여 고인의 몸을 묶는 '염'의 과정인 '염습'을 거쳐 입관을 하게 된다.

옛날, 집에서 운명하면 홑이불을 덮고 곡이 끝난 후에도 깨어나지 않으면 상례를 행했다고 하는데,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입관 절차는 가장 애통하고 슬픈 순간이다.
그 과정은 무릎이 꺾일 정도의 슬픔이 휘몰아치는 시간이라고 담담하게 이야기했지만, 눈빛에는 지나간 시절의 많은 이야기와 인간사의 희노애락을 담고 있었다.

만일 지금도 장의업을 하고 있다면 휴머니즘에 감동한 나머지 지인들에게 자주
이용해 달라는 실언을 했을 수도 있겠으나, 지금은 다른 사업을 운영하며 두분이 알콩달콩 살아가고 있다. (^^)

이렇게 나는 아내를 쫄쫄 따라다니며 천사를 만난다. 세상은 아직도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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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2월에 퇴직한 후 백수이나, 아내의 무급보좌관역을 자청하여 껌딱지처럼 붙어 다님. 가끔 밴드나 페이스북에 일상적인 글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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