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11 12:54최종 업데이트 20.09.11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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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파이롯트(Pilot)', '플래티넘(Platinum)'과 함께 일본 3대 만년필 제조사로 불리는 '세일러(Sailor)'는 경쟁업체보다 한발 앞선 1911년 규고로 사카다에 의해 탄생했습니다.

일본은 만년필 역사나 품질면에서 같은 동양권인 중국이나 대만, 홍콩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습니다. 한자 문화권답게 세필에 강하며, 금촉을 장착한 모델도 비슷한 급의 서양 브랜드보다 낮은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어 이른바 가격 대비 성능이 좋습니다.


기본적으로 펜 자체의 무게도 가벼운 편인데다, 가늘게 표현하면서도 만년필 특유의 부드러움은 유지해, 장시간 필기 시 손에 부담이 덜합니다. 이를테면 큰 글씨를 시원하게 흘려 쓰는 사람보다, 다이어리에 작은 글씨로 촘촘히 메모하길 즐기는 이들에게 보다 잘 맞습니다.

보통 만년필이란 도구를 처음 접할 땐, 4만~5만 원 선의 스틸촉이 장착한 펜을 많이 씁니다. 세척과 충전의 과정을 경험한 다음, 만년필이란 도구가 영 나와 안 맞는다 싶을 땐 다시 볼펜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퇴보가 아닌 회귀의 개념입니다. 만년필이 가장 진화된 형태의 완벽한 필기구라 할 수 없으니, 거리를 두는 이들이 있는 건 당연합니다.

만년필은 성격이 급하고 외향적인 사람들보다 차분하고 내성적인 이들이 더 좋아하는 도구입니다. 충전과 세척의 과정이 누군가에겐 성가신 일일 수 있지만, 정 반대로 즐거운 놀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만년필을 쓰는 사람이 더 지적이고, 쓰지 않는 사람은 인문학적 소양이 부족한 게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 취향의 영역입니다.

비교적 저렴한 가격대의 스틸촉이 장착된 펜을 썼을 때 만족도가 높으면, "아... 몇만 원 안 하는 이 펜도 이렇게 큰 즐거움을 주는데, 금촉이 달린 만년필은 나를 얼마나 더 신나게 해줄까?" 하는 기대감을 갖게 됩니다. 처음 입문형 금촉을 접할 땐, 마음속으로 20만 원 정도를 한계 금액으로 정하면 과도한 지출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다음 모델 몇을 후보군에 올려놓고 즐거운 고민의 시간을 가지면 됩니다.

가성비 괜찮은 만년필, 세일러

그중 세일러의 프로기어는 썩 괜찮은 선택지입니다. 모델별 다양한 컬러감도 기가 막히지만, 펜의 비율이며 소소한 부분의 디테일이 그만입니다. 남녀 구분 없이 즐겨 찾는 모델입니다만, 여성이라면 피해 가기가 더욱 힘듭니다. 기본에 충실한 만년필입니다.

세일러의 핵심 라인은 크게 둘로 구분됩니다. '프로피트(Profit)' 라인과 '프로페셔널 기어(Professional Gear)' 라인입니다. 프로페셔널 기어는 줄여 '프로기어(Progear)'로 부릅니다.

프로기어는 일반 '프로기어'와 '프로기어 슬림'으로 다시 나뉩니다. 성능이 차이 난다기보단, 사이즈가 약간 다릅니다. 말 그대로 슬림은 조금 더 짧고, 가늘며, 가볍습니다. 한 자루 한 자루 따로 보면 구분하기 힘들지만, 같이 놓고 보면 알아챌 정도입니다.

프로기어가 손에 쥐는 맛이 있다면, 슬림은 보다 아담한 게 매력입니다. 세일러의 주력 모델답게 다양한 컬러의 스페셜 라인과 한정판으로 필기구 애호가들을 유혹합니다. 유럽펜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금액으로 금촉을 맛볼 수 있는 게 일본펜의 장점 중 하나입니다.

창립자가 선박 엔지니어라 브랜드명도 '세일러'라 지었고, 브랜드 상징도 배를 정박할 때 쓰는 닻을 형상화했습니다. 몽블랑의 화이트스타가 눈 덮인 흰 산의 정상처럼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겠다는 야심을 표현했다면, 세일러의 닻은 필기구 계가 아무리 치열해져도 절대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고 버텨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닻 문양이 담긴 세일러 프로기어 캡 상단부 ⓒ 김덕래

 
이 펜은 한 손에 쏙 들어오는 프로기어 슬림의 '사계(四季)' 중 은은한 블루톤으로 시선을 사로잡는 '봄'입니다. 세일러는 자체적으로 펜촉을 생산하는 내공 있는 필기구 제조사입니다. 14K 금촉은 단정하고 깔끔하며 완성도가 높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져 사람이 쓰는 도구입니다.

음식은 조금 맛이 짜거나 싱거워도 대충 그 나름의 맛으로 먹으면 그만이고, 옷이 조금 크거나 작아도 오버핏이나 스키니라 자기 최면을 걸면 그럭저럭 입을 만하지만, 만년필은 다릅니다. 밸런스가 조금만 안 맞아도 영 불편해 손에 쥐고 싶은 마음이 사라집니다.
 

세일러 프로기어 슬림 봄 MF촉 ⓒ 김덕래


이 펜이 잘 안 나오는 이유는 단차 때문이 아닙니다. 슬릿 사이가 너무 딱 붙어 있다 못해, 펜쪽 끝부분 양쪽이 서로를 밀고 있습니다. 잉크가 나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는 거지요. 펜촉이 종이처럼 부드러운 소재였다면 펜촉의 양 끝이 서로를 미는 힘만큼 뒤집혀버릴 테니 금세 표가 나겠지만, 딱딱한 금속이다 보니 눈으로만 봐선 알 수 없습니다. 마치 내 손바닥을 마주 대고 제아무리 밀더라도 손에 힘만 들어갈 뿐, 어느 한쪽이 뒤로 넘어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세척한 다음 펜촉을 확대했더니 펠릿 끝이 붙어 있습니다. 확대하면 기본적으로 이런 모습이라야 합니다. 잉크가 지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이 확보되어야 합니다. 기본적인 펜촉의 세팅 값은 표준입니다. 손에 힘을 빼고 쓸 때의 기준으로, 끊기지 않고 균일하게 나오도록 맞춘다는 의미입니다.
 

펜촉 수리 전, 상단부 끝이 맞닿음 ⓒ 김덕래

  

펜촉 수리 후, 상단부 끝이 떨어짐 ⓒ 김덕래


세일러의 MF촉은 일본펜이긴 하나 아주 가늘게 나오는 걸 원치 않는 이들이 선택하는 펜촉입니다. 흐름이 너무 답답하면 쓰는 맛이 떨어집니다. 필기 자체에 불편함이 느껴지면, "구태여 내가 왜 비싼 돈 들여가며 만년필을 쓰지? 이렇게나 번거로운걸?"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안 그래도 할 일이 산더미입니다. 만년필이라도 내 맘같이 움직여야지, 안 그러면 일상이 피곤해집니다.

MF촉은 'Medium Fine'을 의미합니다. M촉과 F촉의 특성을 다 갖고 있어, 부드러우면서도 섬세합니다. 일본펜의 F촉이 약간 가늘어 불편하고 M촉은 살짝 부담스러운 굵기라 고민했던 사용자라면 두루 만족할 만합니다. 흰색은 너무 눈에 띄어 부담스럽고, 반대로 검은색은 탁해 별로라는 이들이 중간에 걸친 회색을 선호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만년필은 어떤 종이에 쓰느냐에 따라 필기감과 선의 굵기가 극명히 차이 납니다. 흡수율에 따라 마치 다른 펜으로 쓰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듭니다. 매끄러운 종이에 쓸수록 더 부드럽게 느껴지는 건 맞지만, 항상 미도리나 로디아처럼 표면이 매끈한 종이에만 써야 하는 게 만년필은 아닙니다. 복사지나 표면이 다소 거친 일반 종이에도 쓸 일이 생깁니다. 그럴 때 일본펜의 EF촉은, 촉끝이 너무 뾰족해 과한 긁힘이 느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용자가 만년필을 쓴 지 얼마 되지 않아 볼펜 쓰던 습관처럼 손에 힘을 주고 쓰면 더 그렇습니다. 펜촉 끝이 종이를 긁으며 생긴 펄프 찌꺼기가 슬릿 사이에 끼기도 합니다. 물론 종이를 바꾸면 되겠지만, 그럴 수 없을 땐 상대적으로 조금이라도 덜 날카로운 펜촉이 마음 편합니다. EF촉이 바늘 끝과 닮아 있다면, MF촉은 상대적으로 이쑤시개 정도의 뾰족함과 비슷합니다.
 

수리가 끝난 만년필 ⓒ 김덕래


처음 인연을 잘 맺으면 쓰는 도중 펜이 말썽을 부려도 관대해지고, 나와 안 맞는 펜이란 생각이 굳어지면 멀쩡히 잘 나와도 서랍 속 신세를 면하기 힘듭니다. 사람도 만년필도 첫 만남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펜도 내 용도와 맞지 않으면 자주 쓰지 않게 됩니다. 또 펜에 욕심이 나 한꺼번에 너무 많이 들이는 것도 경계해야 합니다. 되려 소홀해지기 때문입니다. 깨끗하게 닦아 잘 보관하는 게 펜을 아끼는 거라 생각할 수 있지만, 펜 입장에서 보면 자주 써주는 주인이 최고입니다.

만년필은 보며 즐기는 장식품이 아니라, 잉크를 주입한 다음 종이 위를 내달릴 때 빛을 발하는 '쓸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먹을 것 걱정 없는 호화로운 집에 살더라도 늘 갇혀 있는 애완견보다, 안식처가 없어도 동네 구석구석 날마다 내달릴 자유가 있는 떠돌이 개가 더 행복한 것처럼 말입니다.

시집 한 권 필사하고 보니 어느새 9월
 

시필 테스트 과정 ⓒ 김덕래


벌써 3년 전 일입니다. 일이 너무 바빠 도무지 며칠이라도 여름휴가 떠날 시간을 내기 힘들었습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렇게 살고 있나 싶었습니다. 나를 위해 만년필 한 자루를 샀습니다. 그 펜에 터키옥색 잉크를 넣고 쓰면, 마치 어느 휴양지 바닷가에 와 있는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여름 내내 매일 손에서 놓지 않다 보니, 그만 정이 들어버렸습니다. 그 후 드문드문 몇 자루 선물이 들어와 펜이 제법 늘었지만, 병잉크와 같이 사도 2만 원이 채 안 되던 이 만년필은 여전히 제 책상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있습니다.

만년필은 값이 중요한 도구가 아닙니다. 저는 이 펜으로 3년 전 여름, 한동안 책장에 꽂아만 놨던 시집 한 권을 필사했습니다. 펜을 손에 쥐고 한 장 한 장 쓰다 보니 어느새 8월이 휙 지나갔습니다.
 

3년을 함께한 세일러 클리어 캔디 ⓒ 김덕래


올해 여름 여수로 가족여행을 다녀올 예정이었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내년으로 미뤘습니다. 대신 3년 전 그때처럼 다시 시집 한 권을 옮겨 쓰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9월입니다.

마음 둘 곳 없는 분이 있다면 필사를 권하고 싶습니다. 두께가 얇은 시집은 마음의 부담도 덜합니다. 집에 있는 아무 펜도 좋습니다. 연필이든 볼펜이든 상관없습니다. 필사의 묘미는 집중을 통해 나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단순히 글자를 옮겨 적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걸, 한번 써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실수로 펜을 떨어뜨리면 망가지는 것처럼, 아차 하는 순간 마음을 놓치면 바닥보다 더 깊이 추락해 깊은 상처가 생깁니다. 외상은 시간이 지나면 낫지만, 속을 다치면 아물 기색 없이 점점 더 통증이 심해집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 생각 마세요.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한 사람입니다. 다 놔 버리고 싶을 땐, 손에 펜을 쥐세요.

시간이 더 빨리 흘러 얼른 내년 여름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때까지 지금의 힘든 상황들이 다 사그라들었으면 합니다. 그리하여 내년 여름엔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올해 여름휴가를 못 간 모든 이들이 짧은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되길 소원합니다.

* 세일러(Sailor)
1911년 규고로 사카다에 의해 탄생한 일본 만년필계의 큰 축. 브랜드 대표모델로 '프로피트(Profit)' 라인과 '프로기어(Progear)'라인을 운용. '파이롯트(Pilot)', '플래티넘(Platinum)'과 함께 일본 만년필계를 견인하고 있는 필기구 명가(名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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