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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위주의 정치의 대표주자 두사람. 적대적 연대 혹은 진정한 친구
▲ 트럼프와 푸틴  권위주의 정치의 대표주자 두사람. 적대적 연대 혹은 진정한 친구
ⓒ Wik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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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지금 우리가 목도하는 세상은 '민주주의 위기'를 말하기에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우선, 새로운 유형의 권력자들의 부상이 그 징후에 속한다. 진시황제의 야욕을 재현하려는 듯한 중국의 시진핑을 비롯해, 러시아 역사에 차르가 있음을 되새겨 주는 무소불위의 권력자 블라디미르 푸틴에 그치지 않는다. 인근 필리핀에서 법치의 경계를 오가며 인기몰이로 집권한 로드리고 두테르테는 물론이려니와 미국 대선에서 엄청난 비판을 뚫고 당당히 백악관에 입성한 도널드 트럼프까지.

세상은 민주주의를 비웃거나 월경함으로써 권력을 얻고 유지하는 사례를 지금도 쉴 새 없이 상영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자리한 권위주의 정치의 주도자가 동서양 가림 없이 등장해 부정적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21세기 정치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한 것이다.

심각한 유럽 상황  

유럽의 상황도 자못 심각하다. 이 '문명' 대륙의 지축을 뒤흔드는 위기의 쌍두마차는 '백주의 테러리즘'과 '난민의 물결'이다. 2015년 유럽문화의 심장 파리가 테러에 피 흘리고 신음하자 유럽연합의 수도 브뤼셀도 선혈 낭자한 테러의 도시에 이름을 올렸다. 장구한 세월을 서구 문명의 확고한 거점이던 유럽의 메트로폴리스들은 오늘날 테러의 위협이 상존하는 불안의 도시가 됐다. 그곳에서는 누구도 안전을 장담하지 못한다. '테러의 공포'라는 살아 움직이는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시리아 사태로 절정에 오른 '난민 위기'도 유럽 위기의 진원지다. 더 나은 땅으로 끝없이 밀려드는 난민의 물결은 이 계몽의 대륙에서 인종주의라는 괴물의 대두가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고 있다. 몇몇 국가에서 불어오던 극우정당의 회오리바람은 시리아 내전의 파도를 타고 폭풍우로 급속히 확장해나갔다.

다양한 우파 포퓰리즘 정당들이 이민 반대나 난민 반대 정책을 앞세워 민심을 얻으며 무시하기 어려운 정치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회에서 각국의 유사 극우정당이 네트워크를 결성해 '배타적 유럽연합'의 꿈을 키우고, 유럽인들은 안전한 터전이 불안의 아수라장으로 돌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이 '피리부는 사나이'들의 목소리에 잔뜩 귀기울이고 있다. '난민 공포'라는 유령이 지금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유럽에서 (극)우파 포퓰리즘의 득세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상황은 악화일로의 직선에 가깝다. 2017년의 한 연구서에서 "경악스러운 우파 포퓰리즘의 파노라마"라는 말로 지난 25년간의 유럽 상황을 설명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Thomas E. Goes and Violetta Bock, Ein unanständiges Angebot? Mit linkem Populismus gegen Eliten und Rechte: Köln, 2017, p. 40).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폴란드와 헝가리 및 덴마크는 말할 나위도 없고 이탈리아와 네덜란드, 핀란드, 스위스, 벨기에까지 (유사) 극우 정당들이 성공을 거두고 있다. 인류가 나치 전체주의와 뒤엉킨 참혹한 대전쟁의 재앙과 잿더미를 건너온 지 반세기를 지나 세상은 다시금, 다양성이나 차이를 무시하는 획일성으로 무장한 배타적인 정당이나 권위주의 정권이 안전과 안정의 이름을 걸고 정치 전면으로 개선하는 역사의 역행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독일은 지금
 
19세기 그림 '노예시장'을 이용한 AfD의 인종주의적 선전. 그림 위의 문구는 "유럽이 '이슬람화' 되지 않도록!"이다. 이슬람계 노예상들이 백인으로 보이는 여성노예의 건강상태를 감정하고 있는 그림을 앞의 슬로건과 결합하면, 이슬람 남성이 유럽 백인 여성들을 지배할 것이라는 ‘협박’로 해석할 수 있다
▲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2019년 유럽의회 선거 포스터 19세기 그림 "노예시장"을 이용한 AfD의 인종주의적 선전. 그림 위의 문구는 "유럽이 "이슬람화" 되지 않도록!"이다. 이슬람계 노예상들이 백인으로 보이는 여성노예의 건강상태를 감정하고 있는 그림을 앞의 슬로건과 결합하면, 이슬람 남성이 유럽 백인 여성들을 지배할 것이라는 ‘협박’로 해석할 수 있다
ⓒ AfD 트위터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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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유럽연합의 중심 독일의 상황이 다급하게 돌아가는 중이다. 2013년 창당한 '독일을 위한 대안'(AfD: Alternative für Deutschland)이라는 신생 뉴라이트(Neue Recht/New Right) 정당이 정치권 태풍의 핵으로 등장해 돌풍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당은 난민 반대와 인종주의 슬로건을 앞세워 수년간 지방선거에서 거둔 성공을 발판 삼아, 마침내 2017년 유사 극우세력으로는 전후 최초로 일약 제3당의 지위로 연방의회에 입성했다. 이후의 역사는 더 화려하다. 2019년 세 번의 주정부 선거 모두에서 20%를 넘기는 괴력을 발휘했고, 11%를 획득한 유럽의회 선거에서도 성공신화를 이어갔다.

이제 연방의회를 포함 독일 16개 주정부 의회에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깃발을 올리지 못한 곳은 단 한 곳도 없고, 독일 정치지형에서 이 유사 극우정당의 성채는 견고히 구축되었다. AfD가 독일에서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한 사실은 '(유사) 극우의 발호'가 이제 전 유럽적인 현상임을 분명히 보여주는 주요한 변곡점이 되었다.

독일은 히틀러와 나치 역사의 원죄 속에서 그간 유럽국 가운데 우파 포퓰리즘 정당이 전국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일종의 청정지역에 가까웠다. 이웃 프랑스나 오스트리아, 스웨덴과 이탈리아 등 각국에서 유사한 정당이 난무하고 선거 성공을 거두는 동안에도 독일은 그런 기미가 별로 없었다.

하지만 불길하게도 중첩된 위기의 시대를 배경으로 다양한 우파 포퓰리즘 세력이 결집하고 확장할 가능성은 없지 않았다. 결국, 시리아 내전의 위기의식을 이용해 난민 반대와 무슬림 반대라는 기치 아래 이뤄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가파른 성공가도 속에서 그 '불길한 가능성'은 실현되고야 말았다. 우파 포퓰리즘 정당으로 불리는 AfD는 아직 확실한 극우 판정을 받지는 않았지만, 지속적인 우향우 및 극우세력과의 인적, 조직적 교집합은 갈수록 큰 우려를 낳고 있다.

기지개 켜는 나치의 후예들

이와 함께 나치의 후예나 다름없는 진성 극우파도 독일에서 기지개를 켜고 있다. 1964년 설립돼 명맥을 유지하던 대표적인 극우 '민족민주당'(NPD)은 2013년 총선에서 3%를 상회하는 득표를 두 곳에서 얻더니, 2014년 여러 주의회 선거에서는 비록 5% 장벽을 넘지는 못했으나 세 차례나 평균 득표 3%를 넘기는 성과를 얻었다. 작센 주의회에서 NPD는 나치 희생자 묵념을 거부하고 퇴장하는 스캔들을 일으키기도 했다.

극우파에게 나치 홀로코스트보다 더 큰 죄악은 연합군의 폭격으로 인한 독일인의 희생이고 홀로코스트는 아예 부정되기도 한다. 극우정당의 불법화 논의가 끊임없이 도마에 오르는 가운데 NPD 금지 법안이 2017년 헌법재판소에서 근거 부족으로 기각됐지만, 학자들은 NPD를 친 나치 극우정당이 확실하다고 평가한다.

실제로, 독일에서 극우파는 '신나치'로 통한다. 신나치는 히틀러와 나치를 추종하고 숭배하는 극우 세력을 일컫는 말로, 나치의 목표와 근본 발상을 고스란히 껴안고 있다. 유대인과 외국인, 정치적 좌파, 장애인이나 동성애자 같은 사회약자도 모두 혐오와 증오의 대상이다.

더불어 아리안족의 단일한 인종국가라는 나치의 철 지난 유행가를 앵무새처럼 되풀이한다. 독일헌법수호청이 파악하는 신나치와 극우파 숫자는 계속 늘고 있고, 동서독이 통일된 1990년 이래 상대적으로 낙후된 구 동독지역 주민의 불만을 등에 업고 망명신청자나 외국인에 대한 공격 횟수도 꾸준한 상승곡선을 그리는 중이었다.

그 결과 극우파가 저지른 외국인 및 유대인 폭력 사건이 드물지 않게 언론을 장식하고, 정치권과 경찰이 신경을 곤두세우는 신나치 시위와 집회도 심심찮게 벌어진다. 그런 와중에 2011년 전 독일을 발칵 뒤집어 놓은 극우파 폭력범죄 사건이 발생한다. 신나치 테러 조직 '민족사회주의 언더그라운드'(Nationalsozialistischer Untergrund: NSU 혹은 Nazi Untergrund)가 2000~2007년 사이에 쾰른 폭탄테러를 비롯해 이민자 9명과 경찰 1명을 살해하고 15건의 은행 강도를 벌인 내막이 밝혀지며 독일 사회가 엄청난 충격과 경악에 휩싸인 것이다.

전후 최대의 극우 폭력테러 사건으로 그 조직(NSU)을 도운 사람의 숫자만도 200명에 달했다. 2015년에는 신나치가 독일 내 시리아 난민 수용소에 쳐들어가 경찰까지 공격한 사건이 세계적으로 언론을 탔고, 난민 수용소를 상대로 한 범죄는 그해에만 수백 건에 달했다. 독일인의 15-20%가 반유대주의 정서에 물들었다는 다소 충격적인 조사 결과는, 신나치를 둘러싼 훨씬 더 넓은 지지층이 존재한다는 의미로 연결된다.  

청소년 향해 손 뻗는 '신나치 밴드'
 
나치 문양에 나치 병사. 나치의 영광과 부활에 대한 염원을 숨기지 않는다
▲ 신나치 밴드의 음반 표지 나치 문양에 나치 병사. 나치의 영광과 부활에 대한 염원을 숨기지 않는다
ⓒ 정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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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청소년들에 대한 극우파 정치 집단의 영향력도 간과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극우정당은 외국인 혐오와 아리안족의 영광을 노래하는 '신나치 밴드'까지 앞세워 청소년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미래의 지지 세력으로 키워내는 데 발 벗고 나선다.

극우파의 문화적 첨병이라 할 신나치 밴드는 1990년대에 폭발적으로 늘어나 이미 21세기 벽두에 200개를 훌쩍 뛰어넘는다. 노래 가사는 무시무시한 인종주의적 외침과 증오가 난무하고 음반 표지에는 나치 문양과 군인이 등장하기 일쑤다. 이들 극우 밴드의 공공의 적은 외국인과 유대인과 좌파다.

이런 노골적인 혐오와 인종차별을 노래하는 극우파 음반을 선거철에 수십 만 장씩 고등학생 유권자들에게 뿌리는 일은 극우 민족민주당(NPD)의 공공연한 청소년 전략이다. 독일에서 신나치 밴드를 듣거나 음반을 가진 학생을 만나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고, 주간지 <슈피겔>은 극우파 록이 '인종 전쟁을 위한 음악'이라고 선언한 지 오래다. 

이렇게 오늘날 극우파가 청(소)년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어쩌면 가장 '신'나치답다. 역사 속 (구)나치 또한 행동하는 젊은이들을 적극 활용했다.

가령 나치는 1933년 정권을 잡자마자 '분서'를 시행했는데, 나치를 추종하는 '독일대학생연합회'가 주체였다. 이 대학생들이 앞장서 같은 해 3월과 7월 사이에 50개가 넘는 도시에서 수많은 책을, 아니 자신에 반기를 들 만한 사상들을 불태웠다. 일부 대학교수들도 가담해 나치의 광적인 행위를 열렬히 옹호하고 호도했다.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실행된 '책 화형식'에는 신임총장이던 하이데거가 나서 지지 연설을 수행했다. 오늘날까지 논란인 거물 철학자 하이데거의 친 나치 행각과 열혈 대학생들의 나치 전위활동은 지식인의 역사적 판단과 책무에 대한 깊은 고민과 질문을 던진다.
 
시인 하이네에 따르면, 대학생들을 앞세운 나치의 분서는 끔찍한 유대인 대학살의 전조일지도 모른다
▲ 1933년 베를린, 나치의 분서 장면 시인 하이네에 따르면, 대학생들을 앞세운 나치의 분서는 끔찍한 유대인 대학살의 전조일지도 모른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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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독일 시인 하이네는 '책이 불타는 곳에서는 사람도 불탄다'고 일갈했다. 시대는 달랐지만 예언은 빗나가지 않았다. 책을 불태운 나치는 세상을 전쟁의 불구덩이로 몰아넣고 수백만 유대인을 불태워 죽였다. 그만이 아니었다.

나치는 역사교과서도 '지도지침'을 내려 입맛대로 바꾸고 간섭했다. 역사를 일정한 틀 속에 집어넣고 일방적인 프리즘을 강요한 결과는 우리가 아는 그대로다. 그래서일까. 19세기 독일사민당의 걸출한 이론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자유란 언제나 나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의 자유'라고 강조했다. 나치의 지침이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의 자유를 부자유에 가두는 행위이듯, 자유롭고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그 사람들의 목소리가 갇히거나 닫히지 않을수록 우리가 더 자유로워지는 것이 아닐까.

독일 극우파의 상승세... 강 건너 불구경일까

한국 사회에서도 외국인 혐오와 차별이 점점 더 간과 못할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독일의 극우파와 그 폭력성, 테러 같은 문제는 결코 강 건너 불구경일 수 없다. 다행히 아직 테러가 자행될 정도로 극우파가 민낯의 폭력 주체로 돌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극심한 양극화의 길을 걷는 우리 사회가 외국인 공격이나 혐오로 내달려갈 극우파의 등장을 잘 비켜 가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기에 독일의 극우파 문제는 여기 우리에게도 타산지석이다.

게다가 민주주의 위기는 역사 속에서도 현재에도 종종 극우파의 대두와 연결되는 일이다. 물론, 권위주의를 앞세우고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거나 뛰어넘는 정치 권력자들의 부상과 권력 독점화 역시 민주주의의 보루를 아래에서부터 갉아 먹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서, 아니 어쩌면 그와 어깨를 걸고 외국인이나 난민에 대한 혐오로 힘을 키우는 극우세력의 부상도 민주주의라는 제도 및 사회에 구멍을 낼 수 있을 것이다. 트럼프가 국경에 세운 '인종의 장벽'을 극우세력이 마다할 이유는 전혀 없다. 독재나 전체주의로 흐를 소지가 있는 권위주의 정권과 인종주의 및 배타적 민족주의를 추종하는 극우는 서로를 떠받치며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그래서 두 진영의 의기투합과 상호강화는 민주주의에 맞서는 '위험한 연대'다.

나아가 이 연대에 추동력을 부여하는 최상의 조건도 마련되었다. 바로 전 세계가 공통으로 겪고 있지만 결코 함께 나누려고 하지 않는 코로나 팬데믹의 고통이다. 자본의 이윤지상주의가 추동한 난개발과 자연착취가 불러들인 코로나19에 속수무책임이 드러난 아메리카와 유럽의 '문명'국들은 국경과 하늘 길까지 걸어 잠그고 자국 우선주의로 신속히 회귀했었다.

그 배타적인 통제와 봉쇄의 와중에 인종주의적인 공격과 혐오가 '선진' 서구사회를 강타했음은 지구촌이 목도한 대로이다. '코로나 위기'는 결국 인종주의적 혐오와 국가 이기주의가 횡행할 최적의 조건임이 드러났고, 그 속에서 번식한 '코로나 인종주의'가 권위주의 정권 및 극우세력과 어깨를 걸고 '악몽의 삼중주'를 빚어낼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처럼 21세기 지금 민주주의의 위기 속에서, 인종주의나 배타주의를 공통분모로 삼는 다양한 적들은 이미 무시 못 할 세력이다. 불안과 위기의 시대에 권위주의의 성채 속에서 인종주의를 노래하는 그 '피리부는 사나이들'이 안내하는 길의 끝은 결국 파국의 낭떠러지다.

이는 역사가 보여주는 대로이고, 역사가 경고하는 그대로다. 결국, 그 '민주주의의 적들'에 맞서는 유일한 버팀목은 평범하지만 위대한 지구촌 시민의 경각심과 '감시의 연대'다. 그것은 참혹한 역사에 대한 기억과 성찰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나치에 열광한 독일 청년과 지식인들의 뼈아픈 교훈을 되새겨야 하고, 인종주의를 종착지까지 밀고나간 나치의 파멸적 최후가 전하는 경고를 잊지 말아야 한다. 지구촌 시민의 그 연대는 역사적 경고와 성찰 위에 세워지는 '기억의 연대'이자, 이 민주주의 위기의 시대가 요청하는 '절실한 연대'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정대성씨는 부산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현대사)입니다. 이 기사는 '대학지성 In&Out'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민주주의 위기, #권위주의 정권, #포뷸리즘, #신나치, #독일을 위한 대안(AF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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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부산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로 있으며, 저서로는 『68혁명, 상상력이 빚은 저항의 역사』, 『저항의 축제, 해방의 불꽃, 시위』(공저), 역서로 『68혁명, 세계를 뒤흔든 상상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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