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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엔 야간통행이 금지됐다.
 과거엔 야간통행이 금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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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통행금지(夜間通行禁止)는 국민이 밤에 다니는 것을 국가가 막는다는 뜻이다. 이 말이 귀에 익숙한 사람은 2020년을 기준으로 대략 54세가 넘었을 법하다. 우리나라에서 야간통행금지 조치가 해제된 때는 38년 전인 1982년 1월 5일인데, 그 무렵 중학교 1학년이던 사람이 현재 54세이기 때문이다.

야간통행금지가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근대에는 동·서양 대부분들의 나라들이 야간통행금지 제도를 시행했다. 하지만 근대 이후 "다른 국가들은 국가비상사태에 한하거나 미성년자 안전을 위해 일시적이고 보호적인 성격의 야간통행금지를 실시하는 데 반해, (1945년 9월 8일부터 미군정이 시작한 이래) 36년 4개월 간 우리 사회에서 시행된 야간통행금지 제도는 집행 기간이나 시행상 매우 특징적이라고 할 수 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인용)

국가 전역, 장기간 실시... 특이한 야간통행금지

전등 사용 이전의 동·서양 국가들은 야간통행금지 제도를 치안 유지 수단으로 특히 유용하게 활용했다. 조선 시대에는 대략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통행을 금했다. 당시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도성(都城, 한양성)의 문은 인정(人定)에 닫고 파루(罷漏)에 연다. 2경(밤 9시~11시) 후부터 5경(새벽 3시~5시) 이전까지는 대소 인원은 출행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물론 출산, 사망, 중상, 급한 공무 등의 경우에는 예외를 허용했다. 

2경에 실시하는 인정 때는 쇠북을 스물여덟 번 치면서 성문을 닫았다. 횟수 28은 하늘의 스물여덟 별자리(二十八宿)를 뜻했다. 파루는 5경에 실시했다. 이때 쇠북을 서른세 번 치면서 성문을 열었다. 33은 우주를 이루고 있는 33천(三十三天)을 의미했다.

당시의 우주관에 맞춰 북 울리는 횟수를 정했다

조선 시대의 야간통행금지는 1895년(고종 32) 9월 29일 인정과 파루 제도가 폐지되면서 동시에 해제되었다. 야간통행을 금지하기 위해 성문을 닫고 열었고, 그것을 알리기 위해 쇠북을 세차게 쳤던 것이니, 야간통행금지 조치와 인정·파루 제도가 동시에 없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에 관한 기록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없다.  

조선조 26대 임금인 고종 때의 일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을 수 없다니 뭔가 이상하다. 인정과 파루 제도를 폐지하고 야간통행근지를 해제한 일 자체가 처음부터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인가? 

그런 뜻이 아니다. 태조 이성계부터 철종 시대의 실록만 <조선왕조실록>으로 인정되기 때문이다. 일제가 하나하나 개입한 고종과 순종 시대의 실록은 역사적 의의를 상실한 까닭에 <조선왕조실록>의 일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외세에 국권을 사실상 빼앗긴 나라의 초라한 위상이 세계기록문화유산에까지 어둡게 서려있는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가 낸 <고종시대사>의 1895년 9월 29일 부분을 본다.

"궁내부(宮內府, 왕실 업무 총괄 부처) 인정 파루 및 보시(報時, 시각을 알림) 경고(更鼓, 북을 울림) 폐지에 관한 건을 발표하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하략)" 

1945년 광복 후의 야간통행금지 제도는 미군이 1945년 9월 8일 서울과 인천 두 곳부터 실시했다. 일제는 물러갔지만 또 다른 외세가 한반도를 통치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독립의 기쁨을 누릴 밤의 시간을 송두리째 빼앗겼다. 미군은 9월 29일 '미국  육군이 점령한 조선 지역 내 인민'에게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통행을 금지하는 확대 조치를 시행했다. 

미군정의 이 조치는, 때에 따라 내용에 조금의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부터 1982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런 점에서 "일제의 감시와 처벌 방식은 야간통행금지 제도의 처벌과 감시 양식으로 이어져 식민지 국가폭력은 해방 후에도 사회 전반에 지속되었고, 이후 계엄법과 국가보안법으로 분화·적용되는 주요한 동력을 제공해 왔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인용)고 평가할 수 있다.

계엄법과 국가보안법으로 이어지는 야간통행금지

야간통행금지가 엄격히 시행되던 시대에는 국민의 생활을 국가가 통제하는 일이 많았다. 그 중의 한 예가 젊은 남녀의 머리카락과 치마에 대한 강제 처벌이었다. 장발과 미니 스커트를 대표적인 퇴폐풍조로 규정한 정부는 1976년 5월 15일부터 한 달 동안 '계몽' 기간을 거친 다음 엄중 단속에 들어갔다.

"경찰이 자를 들고 거리에서 미니 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성을 단속하였는데 단속 기준은 무릎 위 20cm였다." (국가기록원 〈금기와 자율〉)

경찰이 젊은 여성의 무릎에 자를 얹어 치마까지의 간격을 재는 세상이라니! 그 우스꽝스러운 일은 당대를 살았던 사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 풍경일 것이다. 

남성 청년이 여자로 여겨질 만큼 긴 머리카락, 귀를 덮는 옆머리, 옷깃을 덮는 뒷 머리카락, 파마, 여자의 단발 형태 머리를 하면 연행되었다. 끌려가면 경찰서 구내 이발소에서 경찰관 보기에 흡족하도록 머리카락이 잘린 후에야 풀려났다. 머리깎기와 치마 길이 재기를 거부하는 젊은이들은 즉결 재판에 넘겨졌다.

이처럼, 직접 겪어보지 못한 세대에게는 상상도 되지 않은 국가의 국민 사생활 침해가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는 비일비재했다. 민주화가 크게 진척된 요즈음 시각으로 보면 말도 되지 않는 인권 침해였다. 이는 민주주의가 발달할수록 국가 권력이 개인의 인권을 침탈하는 일이 줄어든다는 역사 발전의 법칙을 증언해주는 사례다. 민주주의는 결국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권리를 최대한 존중하려는 정치 이념인 것이다.

권위주의 시대에 겪었던 국가의 인권 침해

권위주의 시대에 겪었던 국가의 인권 침해 사례를 돌이켜보면서 근래의 코로나19 관련 정부 통제에 대해 생각해본다. 일각에서는 마스크 강제 착용 명령 등 정부가 지나치게 개인의 사생활을 통제한다고 항의하기도 한다. 심지어 코로나19를 정치에 악용한다고 비난하기도 한다.

권위주의 시대의 미니스커트 단속과 장발 자르기 등은 권력 자체를 위한 통제였다. 국민에게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강제 인권 침해일 뿐이었다. 코로나19가 요구하는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 요구는 그와 전혀 다르다. 국민 개개인의 건강과 생명을 위한 것이며, 나아가 사회 전체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국가정책이다.  

권위주의 시대 국가의 인권 침해 앞에서 '국민'들은 아무 말도 못했다. 지금의 '시민'들은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다. 그만큼 민주주의가 발전한 것이다. 그래도 '할 말, 안 할 말'은 가릴 줄 알아야 성숙한 시민의식을 지녔다는 평가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태그:#야간통행금지, #미니스커트, #코로나19, #9월8일 오늘의 역사, #인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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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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