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꽃

악의 꽃 ⓒ tvn


tvN 수목 드라마 <악의 꽃>을 보기 시작했을 땐, 끔찍한 연쇄 살인범이 마각을 드러내는 미스터리 스릴러에 집중했다. 그런데 회를 거듭할수록 스릴러는 맥을 못 추고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가여운 남매의 슬픈 인생에 이입되고 있었다. 누구도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 두 남매 현수(이준기)와 해수(장희진)는 그래서 지독히 불행했다.
 
현수와 해수는 사이코패스 범죄자 아버지 도민석(최병모)을 둔 죄로 사람답게 살 수 없었다. 죄가 아닌데 죄가 되는 부정의는 가해자의 가족에게 혹독한 대가를 요구한다. 죄가 없는데도 죄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이 아이들을 기어코 공범의 자리에 앉히고 계속 자백하라고 추궁한다.

"봤지. 니 아버지가 사람 죽이는 거."

아버지가 죽어 더는 그의 범행을 단죄할 수 없게 되자, 사람들은 대신 남매를 기어코 재단의 제물로 올린다. 남매는 살인자 아버지를 둔 이유로 즉각 공범으로 단정된다. 공범이 아니라면, 그 흉악무도한 아버지의 DNA를 물려받았으니 역시 즉시 사이코패스로 인증된다. "너 보면 니 아버지 생각나." 사람들은 이렇게 남매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낙인을 찍었다.
 
현수는 백희성이 되어야 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 남매가 살던 마을에 이장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현수는 의심 없이 살인자로 지목된다. 해수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살인자 혐의를 쓴 현수의 도피 행각은 이렇게 시작되고, 우연한 사고를 계기로 신분세탁에 성공한다. 평생 도망 다니며 위태로운 삶을 살아야 했던 현수로서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은 셈이다. 누구라고 이 기회를 잡지 않겠는가.
 
드라마는 현수가 신분 세탁을 한 이후, 귀여운 딸과 사랑스러운 아내와 단란하게 꾸린 가정생활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사이코패스의 실체는 이런 다정한 아빠와 남편의 얼굴을 하고 있을지고 모른다는 인상을 깊게 심으며, 시청자로 하여금 백희성으로 탈바꿈한 현수가 언젠가 마각을 드러낼 것을 암시하는 듯했다. 하지만 현수가 이장 살인 사건의 가해자가 아니고, 아버지의 범죄 행각과 무관하다는 반전을 일찌감치 제시하면서, 드라마는 공포물에서 현수로 하여금 아버지 범죄와 연루된 진실과 진짜 공범을 스스로 밝혀 나가는 범죄물로 전환한다.
 
과거 "이제 도현수로 안 살아"라고 다짐한 현수는 애가 탄다. 어떻게 얻은 평범한 삶인데... 사이코패스의 아들과 살인자라는 질곡에서 겨우 벗어났는데 현수의 앞날은 다시 지옥으로 급전직하하기 일보 직전이다. 그렇다면 현수는 이 위기에서 벗어나 "끝까지 백희성으로 살"수 있게 될까?
 
드라마가 회를 거듭할수록 나는, 현수의 불행과 신분세탁으로 아내를 14년간 속이고 산 남편의 배신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드라마 설정상 지원은 현수가 자신의 과거를 고백했더라도 그를 사랑했을 것을 의심하지 않지만, 사람은 그렇게 명쾌한 존재가 아니지 않은가?

어느 날 쓰나미처럼 밀어닥친 진실 앞에 지원이 배신감에 사무칠 수밖에 없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그와 헤어지기로 결심한 심정 또한 공감된다. 남편의 불행을 이해하는 일과 14년을 백희성으로 믿고 산 사람이 전혀 다른 20년을 가진 사람이라는 충격을 하루아침에 극복하는 일은 전혀 다른 일이다.

한 사람의 그럴 수밖에 없는 심정이나 상황을 이해한다고 해서, 자신의 마음에 돌이킬 수 없게 깊이 파인 상처를 사랑이라는 미명으로 싸맬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게다 형사로 남편의 사건을 파헤치며 진실을 마주하는 일은 자신의 일에 대한 신념과 사랑 사이를 줄곧 줄타기하게 하며 지원을 황폐하게 만든다. 누구도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딜레마에 처한 건 현수뿐만이 아닌 것이다.

 
 악의 꽃

악의 꽃 ⓒ tvn

 
2018년 방영했던 MBC 드라마 <이리 와 안아줘> 역시 살인범 아버지를 둔 아들 도진(장기용)의 곤경을 다룬 드라마다. 사이코패스로 승인된 아버지의 존재는 아들 도진에게 깊은 상처를 남긴다. 어린 도진에게 사람들은 너도 아비의 피를 받았으니 극악무도한 살인마가 될 거라는 저주를 쏟아붓는다. 이렇게 모두 도진을 손가락질하고 외면할 때, 도진을 구한 건 아버지와 동거하던 옥희(서정연)였다. 사회의 보살핌은 없었다. 도진을 외면해도 비난받을 처지가 아니었던 옥희는 도진을 기꺼이 아들로 받아들여 마음을 다해 보살핀다. 도진을 지킨 게 한 웅숭깊은 인간애였다는 서사는 매우 아름다운 스토리임에 틀림없지만, 돌이켜보면 사회가 그 책임을 방조하고 개인에게 그 책임을 돌렸다는 면에서 성찰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도진 아버지의 살해로 부모를 잃은 재이는 너무나 처참하다. 가장 친한 친구가 하루아침에 가해자의 아들이 되자 재이(진기주)는 가족과 친구를 동시에 잃는 아픔을 겪는다. 하지만 도진 역시 가해자의 아들로 평생 그 멍에를 지고 살아야 할 뿐 아니라 그 역시 아버지를 잃은 아이라는 처지는, 재이로 하여금 부모 잃은 아이라는 고통에선 자신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동병상련을 발견하게 하고, 마침내 도진과 심리적 공감과 화해 그리고 연대에 이르게 한다. 피해와 가해가 병치할 수 없다고 단정하는 이분법은 피해와 가해의 메커니즘이 실은 상호 작용한다는 진실을 은폐한다. 피해자 가족이라는 호명이 피해자를 더 애도하는 것도, 피해자의 가족의 고통에 더 공감하는 것도 아니라는 진실을 직면함으로써 재이가 피해의식에서 벗어나게 되는 과정은 함의하는 바가 크다.
 
해수는 스스로를 가둘 수밖에 없었다
 
연쇄 살인범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고통 속에 갇힌 건 해수 역시 마찬가지다.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삶이다. 누구와도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는 절대 고독의 삶을 이어가게 하는 건, 피 묻은 손을 씻을 수 없는 심리적 난관과 현수에 대한 죄책감이다. 현수와 같은 신분세탁은 꿈도 꾸지 못한 해수는 스스로 주홍 글씨를 달기로 한다.

헐벗은 옥탑 방은 불이 들어오지 않고, 음식을 해 먹은 흔적이 없는 방이다. 이 온기 없는 방은 스스로를 죄인으로 감옥에 가둔 사람만이 견딜 수 있다. 아버지의 믿을 수 없는 범죄, 사람들과 친구들의 끊이지 않는 손가락질, 끔찍한 성폭력과 살인의 기억이라는 트라우마로 해수는 "망가졌"다. 심각한 피해자지만 가해자로 살아야 하는 삶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사회적 공감과 지지 없이는 회복되기 힘들지만, 해수는 누구에게도 보살핌의 손길을 받은 적이 없다.
 
부모를 범죄로 잃는 피해자 자녀의 상황은 드라마 <이리 와 안아줘>의 재이처럼 처참하다. 그리고 가해자의 어린아이들 역시 부모를 상실하며 심각한 위기에 처한다. 가해자의 가족이면 동시에 가해자와 같은 존재로 상정되는 이들의 삶은 누구에게도 관심받거나 돌봄을 받지 못한다.

가해자라는 꼬리표는 이들의 인권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금기시하고, 감옥에 간 부모처럼 이들을 보이지 않는 곳에 두게 한다. 돌볼 부모가 부재하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상상하는 것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님에도, 사회는 이들에게 믿을 수 없을 만큼 냉혹하다. 교도소 수용자 가족 역시 또 다른 피해자라는 사회적 인식과 함께, 가해자의 죄와 가해자 가족의 피해는 분리해서 다루어져야 하며, 사회는 더 큰 관심과 책임으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악의 꽃>의 현수나 해수 또한 아버지 도민석의 범죄가 발각되었을 때 미성년이었다. 이 아이들에겐 손가락질이 아니라 도움이 손길이 절실했지만, 사회는 도움은커녕 연수와 해수를 적극적으로 범죄자의 자리에 놓고 돌팔매질했다.
 
우리는 내 안의 가해자성을 믿지 않는다 
 
 <악의 꽃>의 한 장면

<악의 꽃>의 한 장면 ⓒ tvN


피해자와 피해 가족만큼 가해자 가족 역시 그 가해의 자장 안에서 살아간다. 가해자 가족은 안타깝게도 "피해자 쪽을 생각하면 저희는 힘들다는 것을 호소할 입장이 아니라고 생각"(스즈키 노부모토의 저서 <가해자 가족> 중)한다. 가해자 가족에게 요구되는 속죄 의식은 침묵을 함께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에서처럼 가해 가족은 생명을 위협하는 테러의 위기에 처해 도망치듯 살던 곳을 떠나야 하는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

가해 가족은 가해자가 아니다. 누구나 알고는 있다. 하지만 실상은 인식과 행동의 부조화를 드러내며 가해 가족을 억압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사람들은 모두 자신은 결백하고 선량하므로 결코 가해자가 될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 아닐까?
 
현수가 신분 세탁이라는 범죄와 아내 배신이라는 허물로 마땅한 대가를 치러야 하고 그로써 다시 불행해지는 게 당연하다는 믿음이 상식이라면, 우리 사회는 부정의하다. 그의 죄를 단죄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자문해보아야 한다. 아무 죄도 없는 현수와 해수를 끔찍한 아이들이라고 저주하며 손가락질한 그 무리에 나는, 우리는 없었는가?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너무 늦었지만 해수의 그 컴컴한 방에 이제라도 등을 달아주고 싶다. 또한 나는 불온하게도, "끝까지 백희성으로 살 거야"라는 현수의 다짐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남매는 충분히 행복해질 자격이 있으므로.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악의 꽃] 피해와 가해 가해자 가족 재소자 가족 인권 사이코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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