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42>의 한 장면. 재키 로빈슨(채드윅 보스만)은 브루클린 다저스의 브랜치 리키(해리슨 포드)에게 발탁돼 메이저리그에 데뷔한다.

영화 <42>의 한 장면. 재키 로빈슨(채드윅 보스만)은 브루클린 다저스의 브랜치 리키(해리슨 포드)에게 발탁돼 메이저리그에 데뷔한다. ⓒ 워너브러더스코리아

 
"봄부터 몬트리올에 있는 우리 마이너 팀에서 뛰게. 거기서 잘해내면 여기로 한 번 데려와 보겠네. 다저스 말이야."

야구 구단 단장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한 청년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설마?' 하는 얼굴. "백인들로 이루어진 브루클린 다저스." 단장은 조건을 붙였다. "백인들의 야구에 흑인이라니 얼마나 난리가 나겠나. 그 독설이 상상이 돼?" 그는 어떤 도발이나 욕설에도 발끈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1945년 8월 28일. 브랜치 리키(해리슨 포드) 단장 앞에 앉아 있는 청년의 이름은 재키 로빈슨(채드윅 보스만). 그러니까 야구장 안팎에서 인종차별이 당연시하게 벌어지던 세상에서 흑인 한 명이 백인들의 세계에 들어가 야구를 하는 거다.
 
이렇게 시작하는 영화 < 42>(감독 브라이언 헬겔랜드, 2013).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로빈슨은 상대 팀 선수, 같은 팀 동료, 백인 관중들에게 야유를 받는다. 경기 중 "검둥이는 백인선수들과 경기 못해"와 같은 말을 듣기까지 한다. 참았다. 실력으로 버티고 버텼다. 남들보다 빠른 발로 베이스를 훔쳤다. 정면 승부를 피하지 않았다. 같은 흑인들의 응원을 받았다.

1947년 4월 15일이 되었다. 등 번호 '42'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1루수로 나가 2만 6000여 관중 앞에 섰다. 영원히 기억될 로빈슨의 메이저리그 데뷔전. 이게 어떤 의미냐고? 영화 앞에 나오는 자막을 보면 안다.

"1946년엔 메이저리그에 총 16팀이 있었고 등록된 야구 선수는 400명이었다. 그 400명 모두 백인이었다. 하지만 1947년 시즌 개막일에 그 숫자는 399명으로 줄었다."
 
 영화 <42>의 한 장면.

영화 <42>의 한 장면. ⓒ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야구 영화? 이건 흑인 인권 영화
 
로빈슨이 야구를 할수록 공고했던 벽이 하나씩 깨졌다는 이 이야기는 실화다. 사람을 인종으로 가두고 차별이라는 이름으로 나뉘어진 세상을 그는 철퇴가 아닌 방망이로 조금씩 바꿔나간다. 로빈슨이 백인 이상으로 뛰어난 야구실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온갖 멸시를 받고도 인내하고 또 인내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기도 하다.

로빈슨을 조롱하고 욕하는 사람이 생길수록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조금씩 늘었다. 진짜 실력 있는 사람은 자신의 영역에서 실력을 보여줄 뿐이다. 로빈슨을 향한 야유는 응원으로 바뀌었고 그를 적으로 대했던 상대도 따뜻한 동료가 되었다.
 
그래서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 야구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지만, 그 이전에 인종 차별의 그늘에서 흑인들의 영역을 확장한 흑인 인권 영화다. 이제 로빈슨은 야구팬이면 모두가 기억하는 사람이 됐다. 메이저리그가 로빈슨을 기리며 2004년부터 매년 4월15일 '재키 로빈슨 데이'를 열기 때문이다. 

이날은 메이저리그 전 구단 선수들이 등 번호 '42'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뛴다.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시즌이 늦게 시작해 8월 28일(미국 현지시간) 열렸다. 8월 28일은 1963년 워싱턴 D.C에서 인종 차별을 반대하는 행진 시위가 열린 날이며 앞서 로빈슨이 리키 단장을 처음 만났던 날이기도 하다.
 
 영화 <42>의 한 장면.

영화 <42>의 한 장면. ⓒ 워너브러더스코리아

  
"존중 받든 말든 상관없어, 난 내가 누군지 아니까"
 
"날 좋아하든 말든 신경 써 친구 사귀려고 여기 온 게 아니야. 존중 받든 말든 상관없어. 난 내가 누군지 아니까. 내가 날 존중하면 돼. 하지만 지는 것만은 싫어."

난 로빈슨이 말하는 이 대사가 좋았다. 메이저리그라는, 야구 선수라면 누구나 평생 꿈꿀 무대. 어떤 거친 바람이 불어와도 끝내는 내가 이겨내겠다는 저 강인한 말. 그게 마음에 박혀 버렸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연기한 한 사람. 웃는 얼굴보다 긴장하며 자신에 대한 모욕을 기필코 참아내는 로빈슨의 수많은 이미지를 깊은 얼굴로 표현한 배우, 채드윅 보스만. 20대 로빈슨을 스크린에 만들어낸 그의 연기를 이제는 더이상 볼 수 없게 됐다. 이 영화를 통해 다른 흑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을, 그의 단단한 여정이 떠올라 그의 얼굴을 쉽게 잊지 못할 것 같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42 재키 로빈슨 해리슨 포드 채드윅 보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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