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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는 국가 공권력의 고문과 폭력으로 간첩으로 조작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 대부분은 제주 4.3 이후 또는 해방 이전부터 일본에 살고 있었던 친인척을 통해 일본으로 밀항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훗날 조국으로 돌아온 이들은 북한을 다녀왔다거나 불법체류자 신분에서 받은 월급이 공작금이라는 등의 터무니없는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들이 자신이 고문당했던 터, 공간과 마주하고 주변의 사물을 탁본하는 용기 있는 발걸음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개인의 치유뿐만 아니라 파괴된 우리 사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노구의 몸으로 한발 한발 다가가는 이들의 용기에 수상한집과 평화박물관이 함께 응원합니다.[편집자말]
 
 과거 연행될 당시 거주했던 집 대문을 탁본한 강희철
 과거 연행될 당시 거주했던 집 대문을 탁본한 강희철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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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천읍 신촌에서 태어났어. 아버지는 내가 태어날 무렵 일본으로 밀항으로 가버렸어. 당연히 먹고 살기 힘드니까 떠난 거지. 먹고 살기 힘드니 3살짜리 어린애를 남겨놓고 어머니마저 일본으로 가버렸어. 난 할머니(김만덕) 아래에서 중학교까지 컸어.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에 일본에서 연락이 왔어. 부모님이 일본으로 들어오라는 거지. 그래서 75년도에 일본으로 밀항해서 들어갔어."  

조천의 한 집 앞에 선 그는 어렸을 적 기억을 꺼냈다. 어려서부터 부모 없이 조모에 의해 자란 강희철은 부모를 잊고 살아야 했다. 부모가 일본에서 간간이 생활비를 보내와 그 도움으로 생활했지만 그것만으로 부모님의 체온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는 바다 건너 부모가 있는데도 제주에서 고아 아닌 고아처럼 지내야 했다.

그런 그에게 일본의 부모에게서 일본으로 들어와 같이 살자는 연락이 왔다. 부모님으로부터의 연락은 어린 강희철에게 더없이 기쁜 소식이었다. 오직 부모님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기대감만 있었을 뿐, 죽을 뻔한 위험한 밀항의 뱃길도 참아낼 수 있었다.

"일본에 가니까 고등학교를 가려면 일본에 있는 학교를 가야 하는데 내가 밀항자 신분이니까 학교 입학을 할 수 없는 거라. 아버지는 그래도 고등학교는 졸업해야 한다고 해서 조선학교를 보내주셨어요. 오사카에 있는 조선고급학교였는데 우리로 치면 고등학교지. 조총련에서 운영하는 학교였는데 한국말로 수업하고, 한국 문화와 역사를 가르치는 곳이라 수업에 어려움이 없었지요."

197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스스로 경제활동을 시작했다. 신발공장, 프레스공장 등등 종업원으로 전전했다. 그러나 그는 어딜 가더라도 밀항자, 불법 체류자였다.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항상 긴장하며 살아야 했다. 그러다 결국 1981년경, 오사카 시내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중, 누군가의 신고에 의해 출동한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는 말도 문화도 다른 일본보다는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부모님하고 있어도 어린 시절을 함께 한 기억이 없으니까 뭔가 어색하고 늘 싸우기만 했어. 부모님이야 내가 잘되기를 바라시겠지만 말도 통하지 않고, 신분도 불법 외국인인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회의도 들었죠. 차라리 한국으로 돌아가자. 제주로 가면 친구도 있고, 뭐라도 하면 먹고 살 수 있으니까."
  
 연행될 당시의 집 대문을 탁본한 강희철
 연행될 당시의 집 대문을 탁본한 강희철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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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는 부모님의 만류에도 제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제주로 돌아온 강희철은 1982년 3월 13일부터 1983년 5월 18일 사이에 부산 국군통합병원 방위병으로 복무했다.

"원래 군에 있으면 기념사진들 많이 찍잖아요. 난 국군병원 매점에서 관리병으로 일을 했거든. 그래서 매점에서 일하며 찍은 사진, 병원건물에서 찍은 사진, 중대건물, 간호장교 건물 뭐 이런 데서 폼 잡고 기념사진을 막 찍었지. 아, 그런데 그게 나중에 경찰 조사받을 때 전부 군사기밀 탐지한 걸로 되는 거예요."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의 제주시 연동에 있는 아라장(구 삼원장)을 찾아가자고 했다. 그 앞에 서니 이미 아라장은 사라지고 신축 건물이 들어섰다.

"내가 군대 제대하고 여기서 한 1년 근무를 했어요. 그런데 근무하는 그때 전두환이가 대통령 순시라고 내려온다는 거야. 그때가 85년 2월이었는데 대통령 내려오기 전에 수도경비사령부 직원이 150명 넘게 우리 여관에 먼저 내려와서 숙박을 하면서 경호 준비를 하더라고. 대통령이 내려온다니까 난리가 난 거지. 매일 객실로 경호 인력이 들락날락하고 시내에는 경호원들이랑 군인들이 쫙 깔리고. 그때는 제주시에 좋은 호텔이 몇 개나 되겠어요. 대통령이 오면 자는 곳이 도지사관사 아니면 그랜드호텔이나 칼호텔이지. 그거 모르는 제주 사람이 어딨어요. 삼척동자도 다 아는 그런 것도 안다고 나보고 간첩했다고 하니 죽어 나가는 거지."
  
 간첩으로 조작되었던 곳 중 하나인 아라장 여관 앞에서 강희철과 일행
 간첩으로 조작되었던 곳 중 하나인 아라장 여관 앞에서 강희철과 일행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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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제주로 돌아와 처음으로 취업했던, 그러나 그것으로 너무도 큰 고통을 받았던 그 자리를 손으로 기억했다. 

간단히 점심을 먹고 다시 일행은 이날의 마지막 지점인 제주도경 대공분실 자리로 향했다. 느닷없는 연행, 터무니없는 조사, 고통스러웠던 고문, 절망적인 판결, 기나긴 무기수로의 삶, 가족의 파괴, 보호관찰수, 전과자........
  
 과거 대공분실이었던 곳의 바닥을 탁본하는 강희철
 과거 대공분실이었던 곳의 바닥을 탁본하는 강희철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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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본 만이 아니라 비석이라도 세워 끔찍한 불법을 기억해야 한다는 강희철
 탁본 만이 아니라 비석이라도 세워 끔찍한 불법을 기억해야 한다는 강희철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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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4월 28일, 잊어버리지도 않아. 아침에 출근하려고 하는데 느닷없이 젊은 남자 둘이 들이닥쳐서는 강희철이지 하더니 수갑을 딱 채우는 거야. 현○○ 수사관 놈하고, 박○○수사관놈 둘이서. 뭐 영장이니 뭐니 이런 것도 없고, 뭐 때문에 간다, 이런 말도 없었어. 그렇게 3달 넘게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받았어요. 간 적도 없는 북한에 다녀왔다, 조총련에 가입해서 활동을 했다, 제주에서 온통 본 건 전부 간첩을 했다 조작하고는 전부 그걸 다 외워야 돼요. 검사 앞에서도 판사 앞에서도 똑같이 말해야 하니까. 못 외우면 물고문, 전기고문 당하는 거야."

일도이동의 광양 ○○○ 아파트, 그 자리는 석 달간 이 자리에서 강희철이 당했던 고통을 오롯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가 고통으로 소리쳤던 비명과 흐느낌, 경찰들의 호통과 비웃음을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제주법원에서 나를 재판한 사람이 양승태야. 대법원장 했던 그 놈. 내가 고문했다고 법정에서 주장을 해도 그냥 무기징역을 때려버린 거야. 난 북한에 간적도 없고, 다 조작됐다고 주장해도 듣지를 않아. 기록에도 다 나와 있잖아. 불법 감금된 날짜도 나오고. 그런데도 그 놈은 진실대로 판결하지 않고 권력대로 판결하더라고. 그게 이 나라 사법부야.

지금 이 아파트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모를 거 아냐. 여기가 고문했던 무서운 곳이라는 걸. 여기에다 박아놔야지. 여기 인간백정들이 끔찍한 짓을 저질렀던 곳이라고 알려야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지. 탁본만 할 게 아니라 여기에 그런 이야기를 해서 비석이라도 박아놔야지. 우리 죽으면 다 잊어버리고 또 아무도 모를 거 아냐." 

 
 탁본을 마친 피해자들. 탁본을 끝낸 후 이들은 자신의 소감을 나누는 이야기잔치를 열었다.
 탁본을 마친 피해자들. 탁본을 끝낸 후 이들은 자신의 소감을 나누는 이야기잔치를 열었다.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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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말하고 싶다. 특별히 억울하고 답답한 일을 당한 경우에는 누구라도 붙잡고 이야기 하고 싶다. 말을 하면 마음의 짐이 덜어지고 불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 사회는 말하지 말라고 한다. 입을 열면 이해해주기보다는 오해할 거라며 침묵을 강요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말하지 않으면 언제나 나의 과거, 나의 상처가 다른 이들에게 알려질까 불안감을 지닌 채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숨기던 중에 행여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장소나 사람을 마주쳐야 한다면 그것만큼 끔찍한 경우도 없을 것이다. 우연히 돌렸던 채널에서 보이는 양승태와 같이 부정의한 권력자를 본다면 말이다.

그래서 오늘 이들은 진실을 말하고 기억하려 하고 있다. 더 이상 피해자가 불안하지 않도록 말이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정성을 들여 상처의 기억을 어루만지듯 문지른다. 나는 괜찮다고, 그리고 잘 지내고 있다고, 스스로에게 위로하며 더 이상 상처의 기억을 회피하거나 도망가지 않고 똑똑히 바라보는 그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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