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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은 넓지만 경작하는 농민은 줄고 있다. 청년 농민 부부가 경작하는 논이 넓게 펼쳐져 있다.
▲ 여름의 논 논은 넓지만 경작하는 농민은 줄고 있다. 청년 농민 부부가 경작하는 논이 넓게 펼쳐져 있다.
ⓒ 손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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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만 잠 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농민가의 첫 구절이다. 이 노래가 나왔을 때 우리나라 인구가 4천만 즈음 되었으니 농민이 천만이었다는 얘기다. 그 사이 인구는 천만 명 이상 늘었지만 농민인구는 4분의 1 토막 났다. 생산과 판매까지 하는 전형적인 농민은 그보다 훨씬 줄었다. 팍팍한 삶에 지쳐 '시골에 내려가 농사나 지을까'라는 말이 유행이었고, 귀농 붐도 일었다. 그러나 농민 인구의 드라마틱한 감소가 말해 주듯 성공률은 높지 않다.

여기, 쉽지 않은 귀농을 감행한 10년차 청년 농민 부부가 있다. '서울보다 나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무작정 떠난 그들의 귀농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귀농으로 이어진 학생운동의 인연

서영건(39), 박소혜(37) 부부는 서울에서 같은 학교에 다니며 학생운동 끝물에 몸을 담았다. 당시 학생운동에 참여한 이들이 대부분 그랬듯, 쇠락하는 운동의 끝자락에서 몸도 마음도 피폐해지고 있었다. 그들이 몸담았던 서울은 더 이상 새로운 희망을 꿈꾸기 어려운 곳, 말이 홀로 춤추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곳이었다.

서울을 먼저 떠난 건 박소혜였다. 2008년 어느 날, 대학에서 쭉 농활(농촌활동) 사업을 책임졌던 인연으로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전북도연맹 교육국장을 만나 귀촌을 결심했다. 그렇다고 딱히 농사를 지을 생각은 없었다. 단지 서로에게 상처만 주던 서울을 무작정 떠나고 싶었고, 오라는 곳이 있었을 뿐이다.

전농 전북도연맹의 막내 상근자로 일하게 된 소혜씨가 가끔 만나 고민을 나누던 사람들 중에는 학교 선배 영건씨가 있었다. 냉동기계를 만드는 방위산업체에서 일하던 영건씨는 곧 연인이 됐고 장거리 연애를 이어가던 중, 갑작스레 식구가 늘었다. 자연스럽게 결혼을 하고 전라북도 완주로 내려왔다. 2010년의 봄이었다.

"그동안 농사지을 생각은 안 해봤었는데, 자연스럽게 시작하게 되더라고요. 농촌이니까. '농사 지어서 먹고 살 수 있나? 에잇, 몇 년 만 해보지 뭐'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것 같아요. 어차피 서울에서 살기는 어려웠고 그럴 생각도 없었으니 선택지가 많지도 않았고요."(영건)

서울이 고향인 소혜씨와 문경이 고향인 영건씨는 그렇게 아무 연고 없는 완주에서 청년 농부 부부가 됐다. 그러나 대학생활 때 농활로 단련된 몸이라 믿었지만, 농사는 농활과 차원이 달랐다. 처음에는 아홉 마지기 정도의 땅을 받아 트럭도 없이 삽 한 자루로 논농사를 지었다. 기계도 없고 경험도 없으니 논이 풀밭으로 변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래도 농기계가 없으면 몸으로 때우고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얼추 자리를 잡았다. 그 사이 경작하는 논도 조금씩 늘어 이제는 60마지기(12000평)를 짓는다. 그러나 마을에서 가장 젊은 '농민 부부'였던 그들에게 젊은 사람이 사라진 농촌이란 단지 농사에만 집중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농촌의 삶은 팍팍하지만, 그래도 여기에서는 집과 차, 농기계를 소유하고 있다. 서울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 약치고 있는 서영건씨 농촌의 삶은 팍팍하지만, 그래도 여기에서는 집과 차, 농기계를 소유하고 있다. 서울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 손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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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사람이니까... 영혼을 갈아 넣는 일들

학생운동을 경험했던 그들에게 농촌은 농사보다 농민운동을 해야 하는 곳이었다. 외려 농민운동을 위해 농사를 지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른다. 그러나 농촌도, 농민운동도 이미 고령화로 생기를 잃은 지 오래다. 한때 농민운동의 전성기를 이끌던 선배 농민들이 장년이 되고 노인이 되어갈수록 젊은 귀농청년의 등장은 농민운동의 역사와 전통의 무게가 조금씩 그의 어깨 위로 올라가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농사일은 물론이고, 농민회 일에다 막 시작한 영농조합의 궂은일까지 자연스레 혜성처럼 등장한 청년농사꾼의 몫이 됐다. 순식간에, 너무도 쉽게 얻게 된 세 가지 직업은 '모든 것을 갈아 넣어야' 할 정도의 헌신을 요구했다.

"이곳에 내려와서 친환경 무농약쌀을 생산하는 영농조합법인을 만들었는데 행정처리를 위한 서류 작업이나 돈 계산 등 관련 실무가 너무 많았어요. 제가 제일 젊으니까 자연스럽게 제 몫이 됐죠. 농민회에서도 재무나 사무 관련 일을 맡기더라고요. 워낙 젊은 사람이 없어서 일을 나눠 할 사람도 없으니까."

농사와 영농조합, 농민회.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었고 그에게 딱히 전문성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단지 젊다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떠맡아야할 이유로 충분했다. 특히 5억 규모의 영농조합 재정은 실수가 허용되지 않았고 항상 끝전까지 맞춰야 한다는 강박감이 짓눌렀다. 

그래도 희생과 헌신이라면 학생운동을 하면서 충분히 경험했고 단련되었다고 믿었다. 민중을 위한 무한한 헌신을 사명으로 알던 청춘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론과 얕은 경험은 현실에서 금세 깨져 나갔다.

"우리가 학생운동 하면서 배웠던 집단화된 민중과 실제 제가 얼굴 보고 사는 민중이랑은 많이 다르더라고요. 사람이라는 게 어디가나 비슷하겠지만 돈 앞에는 상당히 이기적이고 시샘이 많아요. 불쑥 '내가 이렇게 애쓰는 일이 정말 의미 있는 일일까? 내가 왜 이런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어요."

몇 해에 걸쳐 강박이 스트레스와 버무려져 차곡차곡 쌓이던 어느 날, 결국 번아웃(burn-out)이 왔다.

"한 2년 전인가... 제가 (영건씨에게) 정신과 치료를 받아보면 좋겠다고 먼저 제안했어요. 어느 순간 묵힌 감정들이 '펑'하고 터져 나오는데, 지켜보는 사람도 늘 불안하고... 여기에는 같이 스트레스를 풀 만한 동년배도 없고, 그렇다고 제가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니더라고요."(소혜) 

"약이 잘 듣더라고요.(웃음) 상담요? 처음에는 마음 속 이야기를 털어 놓으니까 조금 해소가 되긴 했는데, 털어 놓는다고 문제가 없어지지는 않으니까... 약 먹으면 좀 괜찮아 지긴 했는데, 의사 선생님도 무조건 쉬어야 낫는다고..."(영건)


쉬어야 좋아진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쉬고 싶어도 일을 넘길 사람이 없었다. 영농조합 일은 그가 손을 놔버리면 물거품이 될 것이 뻔했다. 그래도 지금은 영농조합 일 중 일부사무를 농협이 대신 해주고, 농민회 일도 옆에서 계속 도와준다는 조건으로 다른 사람에게 겨우 넘겼다. 조금은 여유가 생겼지만, 지친 몸과 마음이 완전히 치유된 것은 아니다.
  
영건씨는 귀농 후 농사와 영농조합일, 농민회 일을 함께 했다. 사진은 2017년 완주군농민회 이서지회의 풍년기원 영농발대식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서영건씨.
▲ 농민회 활동 영건씨는 귀농 후 농사와 영농조합일, 농민회 일을 함께 했다. 사진은 2017년 완주군농민회 이서지회의 풍년기원 영농발대식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서영건씨.
ⓒ 서영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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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자유전 원칙은 어디로

농촌의 삶은 팍팍하지만, 이곳에서도 젊은 사람들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부모의 농사일을 승계하고 있는 청년농부도 있고, 귀농을 시도하고 있는 사람들도 꾸준히 나온다.

"조금 시내 쪽에는 젊은 사람들이 공동체를 만들어서 함께 일하기도 하고, 귀농 프로그램으로 내려온 사람도 있어요. 성공적인지는 모르겠어요. 최근에 귀농한 어떤 분은 정책 사업을 받아서 20억 규모의 유리온실을 지었는데 지하 150미터를 뚫어서 지열냉난방을 하니까 주민들하고 마찰이 심해요. 또 어떤 청년 한 명은 농사 짓겠다고 내려와서 한 달에 100만 원 정도 지원을 받고 있는데 농사는 못 짓고 일용직 나가고 있어요. 당장 농사 지어서 수익이 안 나니까."

농촌 지역 지자체에서는 귀농을 위한 다양한 지원정책을 펴고 있지만, 성공률이 기대만큼 높지는 않다. 간혹 농사 지을 땅을 대규모로 사서 내려오는 사람들도 있지만, 경험이 쌓이지 않으면 자기 땅 규모조차 감당하지 못한다.

"쌀농사에 성공하려면 작게 시작해야 해요. 일도 이력이 붙어야 하는데, 한꺼번에 너무 많은 자원을 투입하면 몸도 못 버티고 자금도 금방 소진돼요.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양만큼 시작해서 조금씩 늘려 나가면 성공할 수 있는데, 대부분 마음이 너무 앞서요."

농사를 잘 짓는다고 잘 살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골목상권이 대기업에 쓰러지듯, 농사도 대농만 살아남고 소농은 소멸하는 추세다. 농업이 기계화될수록 규모가 커야 수지가 맞는다. 그래서 대농은 쌀값이 더 떨어지기를 원한다. 그래야 더 이상 버티지 못하는 소농들이 떨어져 나가니까. 게다가 자기 땅에 농사를 짓는 사람도 별로 없다.

"경자유전(耕者有田)의 원칙이 실현되고 있지 않아요. 여기서 농사 짓는 사람들 중에 이곳에서 쭉 살던 사람 아니면 자기 땅 가진 사람은 없다고 봐야 해요. 땅 주인이 서울에도 있고 전주에도 있고 수원에도 있는데, 농사를 지으면 수익의 1/3은 땅 주인에게 임대료로 나가고, 1/3은 생산비로 나가요. 우리는 그 나머지 1/3로 1년을 버텨요."

헌법 제121조 1항에는 "국가는 농지에 관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2항에는 "농업생산성의 제고와 농지의 합리적인 이용을 위하거나 불가피한 사정으로 발생하는 농지의 임대차와 위탁경영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인정된다"고도 되어 있다.

마치 실제 살지도 않는 아파트를 소유한 채 임대료를 받는 도시 다주택자처럼, 농사를 짓지도 않은 채 농지를 소유한 이들이 있다. 이들이 임대료에 직불금까지 챙기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농민들은 직불금을 포기하더라도, 농지를 최대한 많이 빌려 규모를 키워야 살아남는다.

퍽퍽한 삶이다. 그렇다면 청년 농민 부부는 서울로 돌아갈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까?  
 
농촌에서는 자신이 온전히 책임진다는 전제하에 자기 주도적 삶이 가능하다. 일하면서 두 딸과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간만에 가족이 패스트푸드점을 찾았다.
▲ 간만의 가족회식 농촌에서는 자신이 온전히 책임진다는 전제하에 자기 주도적 삶이 가능하다. 일하면서 두 딸과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간만에 가족이 패스트푸드점을 찾았다.
ⓒ 박소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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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힘든 일도 많았지만 다시 서울에 가서 살아보라고 하면 못 할 것 같아요. 최소한 여기서는 내가 마음먹은 대로 일할 수 있어요. 사실 대부분은 내가 일에 매달려가긴 하지만(웃음). 그래도 일하면서 아이도 함께 돌볼 수 있고, 직장 상사도 없는데, 서울에서는 상상하기 어렵잖아요?"

그렇게 힘들었지만, 부부는 귀농을 후회한 적은 없다고 말한다. 지금도 고달픈 삶이지만, 아마도 서울에 남아 있었다면 지금 수준의 삶조차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잘 안다. 여기는 그래도 집도 있고 차도 있고 내 생산수단(트랙터)도 있다. 농사로 고소득자가 될 수는 없어도 생활비는 확실히 적게 든다.

아무리 멀어도 스쿨버스가 등하교를 책임지고 단체복과 방과 후 학교도 다 지원되니 두 딸의 교육환경도 나쁘지 않다. 서울 소재의 4년제 대학에 아이를 보내겠다는 욕심만 버린다면, 농촌에서의 생활은 서울에 비할 바가 아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엄청나게 소모되면서도, 버티고 있는 이유다.

두 부부의 삶은 서울 살이에 지친 이들에게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농민 청년의 삶도 버겹다. 그러나 농촌의 삶이 팍팍하더라도, 농촌을 살리지 않고서는 이 지독한 서울-지방의 불균형을 해소할 길이 없다는 것도 분명하다.

태그:#서영건, #박소혜, #귀농, #농민, #경자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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