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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 장기수 강담 선생이 지난 21일 오후 9시 43분 충남 논산에 있는 우리들요양원에서 88세를 일기로 끝내 숨을 거뒀다.

그는 올해 초 폐암 4기 진단을 받고 봄에 요양원에 입소 투병 생활을 해오면서 2차 송환의 날을 눈꼽아 기다렸다. 죽기 전에 고향 땅을 밟아보고 지난 1965년 남쪽으로 내려오며 헤어진 아내와 삼 남매를 보는 것이 평생의 바람이었지만 뜻을 못 이루고 눈을 감았다.
 
그는 올해 초 폐암4기 진단을 받았다.
▲ 논산에 있는 우리들요양원에 입소했을 때  그는 올해 초 폐암4기 진단을 받았다.
ⓒ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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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채택한 6.15선언으로 2000년 9월 2일 63명의 장기수가 북으로 송환된 바 있다. 이때 '전향했다'는 이유로 정순택 등 33명이 송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은 74년을 전후로 중앙정보부가 주도한 강제 전향 공작의 피해자들이었다. 당시 통일부가 '전향' 여부만을 심사기준으로 삼고 당시 가해진 폭력을 고려하지 않아 강제 전향자 상당수가 배제되었다.

그 후 1차 송환에서 제외된 정순택 등 33명은 2001년 6월 3일 '장기구금양심수 전향무효선언과 북녘고향으로의 송환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에 발맞춰 비전향장기수 송환위원회가 통일부에 제2차 송환명단을 제출했다.

한편 2004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강제전향은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존엄성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이며 "강제전향에 저항하다 숨진 장기수는 민주화운동 관련 사망"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마침 2004년에 정동영이 통일부 장관에 취임하면서 2차 송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하지만 보수단체의 반발, 국군포로와 맞교환 등이 제기되면서 2차 송환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10여 년이 흘러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2018년 남북정상회담이 이뤄지자 다시 강담을 비롯 비전향장기수들은 2차 송환 기대감에 부풀기도 했다. 강담 선생의 타계로, 생존한 장기수들은 김교영, 김영식, 문일승, 박정덕, 박종린, 박희성, 박순자, 양원진, 양희철, 오기태, 이광근, 이두화 등 13명이다. 
 
젊은 청년들이 강담 선생 빈소에 헌화하는 모습
 젊은 청년들이 강담 선생 빈소에 헌화하는 모습
ⓒ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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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1일 영면한 강담 선생은 함남 홍원에서 1933년 10월12일 가난한 소작농의 6남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해방 후인 1946년에 초등학교 3학년으로 입학했다. 전쟁이 끝난 54년, 고등학교 재학 중에 해군에 입대해 두만강유역 경비함대에서 8년간 특무상사로 경비정의 갑판정에서 복무했다.

61년 제대 후 스물 아홉에 박원옥(당시 24세)을 만나 결혼하고 김책시 인근 단천수산사업소에서 선원으로 일을 했다. 군 입대로 마치지 못한 학업을 위해 62년에는 진남포 해양고등학교 특설반에 들어갔다. 여기서 항해사 자격증을 땄고 청진수산사업소의 3등 항해사로 사할린을 오가며 명태 수송하는 일을 맡았다.

1964년 8월, 중앙당 대남연락사업소의 소환을 받아 고성 해금강부대에서 기밀문서를 전하거나 연락원을 실어나르는 임무를 맡았다.

1965년 3월 5일 떠났던 3차업무 수행중 울릉도앞바다에서 잡힌 후 미군 합동수사본부와 방첩대에서 6개월간 조사를 받았다. 그해 10월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후 비밀법정에서 라병구 선장과 이준영 부선장은 사형을 언도받고 강담은 탁해섭, 최수일과 함께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강담은 그로부터 24년간이나 복역하고 1230 수번을 달았던 광주교도소에서 전남대 임경순 교수의 신원보증으로 1988년 출소했다.

강담은 광주교도소 수감 중 교도관들에게 고막이 찢어지는 폭행을 당하며 강제전향 당했다. 그런 이유로 2000년 9월2일 고향으로 가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고 그는 2차 송환 촉구 운동에 늘 적극적이었다. 또 민가협에서 주최하는 목요집회에 거르지 않고 참여했다.

출소 후 그는 모델하우스, 성당, 아파트단지 등에서 경비를 하며서 겨우겨우 생계를 꾸려갔다. 오랜 징역 생활과 야간경비일, 그 와중에도 투쟁 현장을 쫒아다니던 그에게 2005년 1차 뇌경색이 찾아왔고 2012년에는 전립선암으로 고통받았다. 2017년에는 뇌경색이 재발되어 일상생활에 큰 고통을 겪었다. 2020년 1월에 폐암 4기 진단을 받아 결국 투병 중에 숨지고 말았다. 
 
화장하여 북한산 기슭 금선사에 안치된다.
▲ 국립중앙의료원에 차려진 그의 빈소 화장하여 북한산 기슭 금선사에 안치된다.
ⓒ 민병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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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추모식은 23일 국립중앙의료원 장례식장에서 유족 최화자 여사, 비전향장기수 양희철, 김영식, 박희성, 양심수후원회(회장 김혜순) 민족자주통일 중앙회의, 한국진보연대 회원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양심수 후원회 김혜순 회장은 "구십에 가깝도록 식민지시대와 분단시대의 아픔을 겪고 살아오셨는데 이제 편안히 잠드시길 바랍니다"는 조사를 바쳤다.

강담 선생은 8월 24일 벽제승화원에서 화장하고 북한산 기슭 금선사에 안장될 예정이다.

태그:#비전향장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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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수필로 쓰는 만인보" 줄여서 '사수만보'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 민초들의 이야기를 빚어내는 일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조명을 비추고 의미를 부여코자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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