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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식이 나와!"
"누구시오?"


1949년 7월 3일 경북 경주군 내남면 이조리. 최윤식이 엉거주춤 방에서 나오는데 총과 몽둥이로 무장한 민보단원 8명이 서있었다. "무슨 일이오?" "빨갱이 새끼가 왜 이리 말이 많아!" 앞에 있던 단원이 총 개머리판으로 윤식의 어깨를 내리쳤다.

최윤식(1928년생)이 끌려간 민보단 사무실에는 같은 마을의 최영조와 최영득이 이미 와있었다. 민보단원들에게 얼마나 시달림을 당했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고, 몸 전체가 피투성이였다.

민보단은 1948년 6월 만들어진 경찰 보조 조직으로 '향보단(鄕保團)'의 후신이다. 1948년 5·10 총선거를 앞두고 만들어진 향보단은 주민들에 민폐가 심했는데, 후신인 민보단도 똑같았다. 전국 조직이었던 민보단은 당시 경주군 내남면에도 만들어져 있었다. 내남면 민보단 단장은 당시 경주 염라대왕으로 불리기도 했던 이협우였다.

민보단 사무실은 경찰서 취조실이나 다름없었다. 물 주전자와 수건, 고춧가루가 이른바 고춧가루 고문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이외에도 몽둥이와 인두도 보였다. 최윤식은 어금니를 꽉 깨물며, '여기서 살아나가기는 글렀구나'라고 생각했다. 온갖 구타와 고문을 당한 후 이들은 민보단과 같은 건물에 있던 경주군(현재 경주시) 내남지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이후 이조리 최씨 일가들은 발을 동동 구르면서 대책을 숙의했다. "아! 해윤씨에게 사정해 봅시다" "그거 좋겠구만" 이구동성으로 목소리가 모아졌다.
 
 최윤식의 학살사유(출처: 제4대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보고서)
 최윤식의 학살사유(출처: 제4대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보고서)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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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해윤(당시 30대 후반)은 전직 경찰로 덕망이 높았고, 마을에서는 유지였다. 최씨 집 가장 세 명은 일가인 최해윤에게 자신들의 자식이 연행된 사유와 해결 방법을 알아봐 달라고 했다.

"각자 논 3두락(약 600평)씩 준비하세요. 해결 방법은 돈밖에 없어요." 그때부터 최씨 집안사람들 발바닥에는 불이 났다. 마을의 부유한 사람들이나 조금이라도 끈이 있는 친인척 집 대문을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하지만 시골 마을에서 누가 논 600평 값을 빌려 주겠는가. 결국 아무도 돈을 장만하지 못했다.

그리고 내남지서 유치장에 3일간 구금된 후인 1949년 7월 6일 오후 8시경 최윤식, 최영조, 최영득은 경찰과 민보단원들에 의해 내남면 용장리 뒷산에 끌려가 학살되었다(제4대 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보고서>, 1960). 

어이없이 죽은 형님 최윤식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촉발된 시월항쟁은 미군정 당국의 양곡수집정책, 경찰의 부패, 미군정에 대한 반감, 한국인 군정관리의 무능함, 실업문제, 시민과 경찰 간의 악감정이 그 원인이었다. 항쟁은 대구를 시발로 전국에 확산되었는데, 경주에서도 항쟁의 불길이 일었다.

당시 시월항쟁으로 인한 경주군 피해는 상해 인원 총 56명, 가옥 전소 5채, 가옥전파 8채, 가산소각 14세대 등으로 총 피해액은 4847만원이었다. 이 중 내남면 피해액이 3700만원에 이를 정도로, 내남면은 경주 소재 면 가운데 가장 강력한 저항과 보복이 있었다.

10월 3일 내남면사무소와 내남지서도 군중에 의해 파괴되었고, 최병윤 등 면민 300~400명이 면서기와 우익인사 집에 침입하여 가산을 망가뜨리기도 했다. 또 10월 4일~5일 정운달 등 면민 300명은 독립촉성회에 소속된 면장 및 우익인사들을 협박·구타하였으며, 이들의 가산을 망가뜨리기도 했다.(이창현, 「경주 내남면 민간인 학살사건 진상규명운동에 관한 연구」, 2009에서 재인용)

항쟁이 잦아들자 경주경찰서와 내남지서의 검거 광풍이 불었다. 주동자뿐만 아니라 집회 단순참가자도 검거되었고 그 과정에서 내남면 이조리 최윤식(당시 만 17세)도 붙잡혀 대구에서 재판을 받았다.

최윤식은 일제강점기에 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건너 가 중학교를 다녔다. 그러던 중 해방이 되자 아버지 최영우의 '귀국하라'는 성화 편지를 받고 잠시 귀국했다가 발이 묶여버렸다. 그러다가 1946년 10월 내남면 소재지에서 일어난 10월 항쟁 집회와 관련해 검거되었다. 실형 3년을 언도받은 그는 김천소년형무소에서 복역하다 49년 초에 모범수로 석방되었다.

최상춘(84세,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최영우의 삼남)의 증언에 의하면, 형 최윤식은 집회에 구경 갔다가 누군가의 사감으로 고발되어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고 한다.(제4대 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보고서>, 1960)

시월항쟁 참여 사실 여부를 떠나 최윤식은 실정법으로 3년간 감옥살이 후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일에 전념하고 있었다. 즉, 합법적으로 자연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내남면 민보단 단장 이협우는 1949년 7월 3일 최윤식을 과거 10·1사건 관련자라며 무장한 민보단원들을 동원, 불법 연행했다. 하지만 최윤식과 같은 마을 사람 2명을 내남지서 유치장에 구금한 후 금전을 요구한 것을 보면, 애초에 금전을 뺏기 위해 그들을 연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소기의 목적인 금품 갈취에 실패하자 최윤식 일행을 학살했다.

독립운동가 학살한 친일경찰 
 
경주 최부자집  경주 최부자집
 경주 최부자집
ⓒ 김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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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은 좌·우익 간 대립에서만 일어나지 않았다. 초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둔 1948년 5월 1일 경주군 대동청년단장 서영출과 그 단원들은 경주군 교리에 거주하는 최순이 기부금을 내지 않는다며 납치해 살해했다.

경주 최부잣집 12대손인 최순은 해방 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송출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본 경찰에게 적대시되었다. 그러다가 해방 후 5·10선거(초대 국회의원 선거)가 다가오자 친일 경찰 출신의 서영출 등은 독립운동을 한 최순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것을 막으려 청년단원 5명을 교사해 그를 권총으로 사살케 했다.

독립운동가 출신인 최순이 당선되면 전직 고등계 형사였던 자신이 '민족 반역자'로 낙인찍힐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경주의 최부자 집으로 호를 날린 최순의 재산을 갈취하려다 실패한 사적인 감정도 작용했다. 

이후 최순 살해 사건에 대해 수사가 시작되자 서영출은 거짓 선전물을 제작해 살포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제도 검사가 사건 공범이었던 청년단원의 자백을 받아냄으로써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게 되었다. 당시 서영출은 권총과 실탄 60발을 불법소지하고 있었다.(이창현, 「경주 내남면 민간인 학살사건 진상규명운동에 관한 연구」, 2009 / 최상춘 증언)

하지만 서영출은 그 죄상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처벌을 받지 않았으며, 이후 경주군 대한청년단장을 맡았다. 이때 이협우는 경주군 내남면의 대한청년단장을 맡게 된다.

서영출의 악행을 본받은 이협우는 돈을 갈취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학살과 가옥 방화를 일삼았다. 한국전쟁 전후로 이협우는 내남면민 약 200명을 학살했다.

이러한 악행에도 이협우는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되었고, 1954년 치러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상급자 서영출과의 대결에서도 승리해, 당선증을 거머쥐었다. 이협우는 9305표(19.38%)를 얻어 차점자 서영출의 8179표(17.04%)보다 1126표를 더 얻었다.

대동청년단, 대한청년단, 민보단으로 이어지는 극우청년단체는 경주와 내남면에서 '악마'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민중의 지팡이'라고 일컬어지는 경찰은 어땠을까?

어머니 환갑잔치를 세 번 치른 지서장

당시 경주 내남면에는 산천초목도 떨게 하는 이협우도 있었지만, 이에 뒤질세라 악행을 저지른 이가 있었으니 바로 내남지서장 정원섭이다.

대구 출신 정원섭은 내남지서 지서장으로 근무하면서 관할 내남면 34개리 이장을 동원해 어머니 환갑 잔치 비용을 걷었다. 그는 뻔뻔하게도 다음 해에 어머니 환갑잔치를 또 치렀다. 이번에도 이장들을 닦달했음은 물론이다. 그는 경주군 내동면(현재는 내동면이 없어짐) 내동지서장으로 전근한 직후에도 어머니 환갑잔치를 또 치러, 총 3번의 모친 환갑 잔치를 치르는 기염(?)을 토했다.

정원섭의 기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야산대가 습격해 식량을 가져간 것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내남리 주민들을 2열 종대로 세웠다. 그리고는 상대방이 누가 됐든 서로 간에 뺨 때리기를 시켰다. 총을 들고 감시하는 정원섭과 내남지서 경찰들 때문에, 누구도 뺨 때리기라는 악몽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당시 10대 초반이었던 최영우의 삼남 최상춘(1937년생)은 앞에 마주 서 있던 노인의 뺨을 때렸다. 그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악몽이었다.

또 정원섭은 국민보도연맹원들의 가입과 탈퇴를 치부의 수단으로 악용했다. 최상춘의 증언에 따르면, 정원섭은 돈을 가지고 오는 보도연맹원들을 명부에서 빼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한국전쟁 전후 경주시와 경주시 내남면에서는 서영출(경주군 대동청년단장·대한청년단장)과 이협우(내남면 대동청년단장·대한청년단장·민보단장), 정원섭(내남 지서주임)이라는 악의 트리오가 있었다. '악행의 경쟁'을 벌였다고나 할까.

경주유족회 활동했다고 감옥살이
 
 합동위령제 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최영우
 합동위령제 준비위원회 부위원장 최영우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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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도와줄 테니 자네가 (회장) 하소."

최영우(당시 53세, 49년 7월 숨진 최윤식의 아버지)는 자신보다 스물여섯 살이나 어린 김하종(당시 27세)에게 경주유족회 회장직을 양보했다. 회장이 명예직이 아닌 바에야 '젊고 똑똑한 사람이 하는 게 낫다'라는 생각에서였다.

1960년 4.19 혁명의 역향으로 한국전쟁 전후로 일어났던 불법적인 민간인 학살을 진상을 밝히라는 요구들이 터져나왔고 유족들도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영향으로 경주에서도 민간인학살 피해 유족들이 유족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대신 최영우는 부회장으로 이름을 올리고 유족회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자기가 일본에 편지만 쓰지 않았다면 장남 최윤식이 이협우에게 학살당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자괴감 때문이었다. 그는 유족회 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1960년 11월 13일 경주 계림국민학교에서 열린 '경주지구피학살자합동위령제' 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
 
 최영우 판결문
 최영우 판결문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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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가는 가혹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 후 그는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위반죄'로 구속되었다. 그는 10년 징역형 구형을 받았는데, 최종 선고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었다. 61년 5월 18일에 연행됐던 최영우는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았고 다음해인 62년 3월경에야 석방될 수 있었다. 

끌려간 최영우의 고초는 이루 말할 수 있었다. 그가 경주경찰서에 구금되어 있을 때 물고문과 고춧가루 고문을 당했다.

가족들도 고통을 받았다. 최영우가 서대문형무소에 있을 때 차남 최상익이 면회를 신청했다. 최상익은 국방경비대에 입대해 13년간 군 생활을 한 후 제대했고 1958년에 부산에 있던 '대한조선공사'에 취업한 상태였다. 그런데 형무소 측은 최상익의 면회를 불허했고 이에 항의하던 최상익은 '포고령 위반죄'로 한 달간 구금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

셋째 아들 최상춘은 미20병단에 근무하다가, 제대를 앞둔 1961년 11월 23일 아버지 면회를 갔다. 서대문형무소 면회는 기가 막혔다. 초겨울인데도 아버지 최영우는 홑옷을 입고 면회 시간 내내 벌벌 떨었다. 여름에 검거될 때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던 것이다. 최상춘은 제대 직후 집에 와서 이불을 뜯어 솜을 타 겨울옷을 만들어서 서대문형무소에 보냈다.

최순 독립운동가 추서가 꿈
 
 증언자 최상춘
 증언자 최상춘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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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최상춘이 농지개량조합(농업기반공사의 전신)에 근무할 때, 그는 1년에 한 번 중앙정보부의 호출을 받았다. 호출을 받은 최상춘은 경주경찰서 2층 조사실로 갔다. 탁자에는 권총이 놓여 있었고 선글라스를 쓴 중앙정보부원은 "가족관계?", "요즘 직장생활은 어때"라며 매번 반복되는 질문을 했다. 의례적인 조사가 끝난 후에는 지장을 찍었다.

일 년에 한 번 있었던 연례 행사(?)를 치르고 나면 최상춘은 직장생활 하기가 싫었다. '승진하긴 글렀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승진보다는 직장동료들이 알까봐 전전긍긍했다. 실제로 그는 6년 동안 승진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1982년 연좌제가 없어진 후에는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았다. 농지개량조합 내남(면)출장소장과 강동(면)출장소장을 했고 정년퇴직 후에는 경주시 농지개량조합 이사를 했다. 2010년부터 2019년까지는 '담배판매인조합중앙회 경주조합 조합장'을 역임했다.

아버지 최영우는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5.16쿠데타 직후 인권침해 사건'으로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받았다. 하지만 형님 최윤식 사건은 제때에 신청하지 못해 진실규명되지 못했다.

80대 중반의 최상춘은 형 최윤식의 명예회복과 더불어 한 가지 꿈이 더 있다. 경주군 대동청년단장 서영출에 의해 학살된 최순의 독립운동가 추서가 그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자금을 후원한 최순이 그의 집안 일가인데 아직도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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