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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해옥 학살 자료(출처: 제4대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보고서)
 최해옥 학살 자료(출처: 제4대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보고서)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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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왜 여기 있어? 집에 가자."
"난 너하고 사는 것보다 여기서 사는 것이 더 좋다."
".....저 남자는 누군데?"
"내가 새로 결혼한 남자다."


엄마가 갑자기 집을 나간 이후 몇 달 동안 최상희는 엄마를 찾으며 울기만 했다. 목이 쉬기를 여러 차례였지만 보고 싶은 엄마는 돌아오지는 않았다. 경북 월성군 양남면 다내골 외할아버지 집에 가서 "엄마 어디 갔어요?"라고 물었지만, 누구도 엄마가 있는 곳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아무리 울며불며 매달려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집 나간 지 3년 만에 그리운 엄마를 찾았다. 그런데 찾아간 곳에는 웬 낯선 아저씨가 같이 있었고, 엄마의 입에서는 "너하고 사는 것보다 여기가 더 좋다"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나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최상희는 멍해지면서 주변이 뿌예졌다.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고 볼에 눈물만이 주르르 흘렀다. 최상희는 문득 3년 전 일이 생각났다. 명절에 외가 집에 이모들과 천척들이 모여 앉았는데, 눈이 어두운 외할머니가 "야야, 니 혼자 살아서 머하노. 좋은 사람 있다카이 결혼해라"라고 했다. 엄마 옆에 앉아 있던 8세 소녀 최상희의 입에서는 순간 "가면 안 돼"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물론 소녀는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외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학교 갔다 오니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숙모, 엄마 어디 갔어요?"라고 물었지만 돌아온 답은 없었다. 1957년 여덟 살 소녀 최상희는 유일한 가족인 엄마와 그렇게 헤어졌다. 왜 최상희는 천애고아가 되었을까?

스물한 살에 끌려가 죽은 아버지

한국전쟁 직후 스물한 살 최해옥은 경북 경주군(현재의 경주시) 양남지서 경찰에게 끌려갔다. 최해옥은 보도연맹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날인 1950년 7월 20일 최해옥의 사촌처남 홍순도도 경북 울산군 강동면 대안동으로 끌려 가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제4대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보고서>, 1960)

당시 최해옥은 결혼한 지 불과 1년밖에 되지 않았고, 열일곱 살 아내 박말순의 뱃속에는 아기가 있었다. 그해 12월 14일 태어난 딸 최상희는 아버지 얼굴도 보지 못했다.

남편은 난리 통에 죽고, 갓난아기와 둘이 살아야 하는 박말순의 삶은 지옥 그 자체였다. 그녀가 남편이 죽고 개가하기까지 살았던 경북 월성군 양남면 집골 시댁 상황도 녹록지 않았다. 게다가 시동생이 고주망태여서 한 울타리에서 살기에는 너무나 힘들었다.

결국 박말순은 최상희가 여덟 살이 되자 경주시 외동읍 입실마을로 개가를 했다. 그리고 3년 후에 찾아온 딸에게 정을 떼기 위해 매정하게 대했던 것이다. 어차피 재혼한 남편과 헤어질 수도, 최상희를 데리고 살 수도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엄마 없는 집에서 살 수는 없었다
 
 지난 2018년 11월 19일 한국전쟁 전후 경주지역  민간인학살  희생자를 기리고 추모하는  위령탑  제막식과  합동 추모제가 경주시 황성공원에서 열렸다.
 지난 2018년 11월 19일 한국전쟁 전후 경주지역 민간인학살 희생자를 기리고 추모하는 위령탑 제막식과 합동 추모제가 경주시 황성공원에서 열렸다.
ⓒ 한국전쟁유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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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희는 엄마 없는 집에서 살고 싶지는 않았다. 열두 살에 당숙 집으로 일하러 갔다. 열두 살 최상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빨래, 설거지 등 식모 일이었다. 어느 해인가, 명절 때였다. 당숙모가 당신 자녀들에게는 골덴(코르덴의 비표준어) 옷을 해 입혔다. 당시에는 골덴이 한창 유행이었다.

그골 보고 최상희 가슴도 한껏 부풀었다. '나한테도 골덴 옷을 사주겠지'라는 생각이 망상이었음은 오래지 않아 확인되었다. 당숙모는 자기가 결혼할 때 입고 온 명주옷을 뜯어 최상희의 설빔을 만들어주었다. 사실 명주 옷도 귀했는데도 당시 최상희는 그게 그렇게 서운했다.

어느날 사촌고모가 찾아왔다. "고모, 나 양남(면)에 갈라요." "와?" "여기 있기 싫어요." "그럼 가자." 당숙 집에서 식모 일을 하는 게 편치가 않았던 최상희가 도로 양남면 집골 마을로 돌아왔지만 그곳 생활은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마을 처녀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말이 있었다. "부산 가면 엄청 좋다카더라."

그렇게 해서 최상희도 부산에 갈 결심을 했다. 같은 마을 출신으로 부산에서 식모 생활을 하던 친구가 부산 범일동에 있는 '삼화고무' 공장에 소개시켜 주었다. 당시 최상희는 16세였는데, 기숙사까지 갖춘 공장이 마냥 신기했고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설렘도 잠시, 최상희는 얼마 가지 않아 공장의 열악한 노동조건에 혀를 내둘렀다.

특히 고무신을 만드는 과정에서 나오는 화학약품 냄새는 참기 어려웠다. 코가 허는 것 같았고 만성두통에 시달렸다. 결국 오래지 않아 공장 생활을 접고 어느 집에 식모 겸 노동자로 취업했다. 가내수공업을 하는 집이었다.

집장만 위해 몸이 부서져라

가시내야 가시내야 범띠 가시내야 / 사내 마음 알고 싶은 범띠 가시내 / 울고 가는 사내들도 한심하다만 / 돌아서면 그리워라 범띠 가시내 / 가시내야 가시내야 범띠 가시내야 / 사내마음 알고 싶은 범띠 가시내

김준식은 그해 내내 <범띠 가시내>라는 노래를 입에 달고 살았다. 1970년 지명길 작사, 정민섭 작곡의 <범띠 가시내>는 가수 양미란이 불러 공전의 히트를 쳤다. 이 노래는 그해 윤정희, 이대엽 주연으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렇게 김준식은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범띠 가시내'를 부르며 다니다가 진짜 '범띠 가시내' 최상희(1950년생)를 만났다. 둘은 7살 차이였는데, 첫 눈에 서로 반해 불꽃같은 연애 생활을 거쳐 살림을 합쳤다.

최상희의 남편 김준식은 고속버스 운전기사였다. '삼화여객'이라는 시내버스에 입사한 후 시외버스를 거쳐 동부그룹에서 운영하는 고속버스를 했다. 이후 부산·경남이 근거지인 '천일고속'에 입사해 직장 생활을 하다가 범띠 가시내 최상희를 만났다.

둘 다 가진 거라고는 몸뚱이뿐이었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서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처지였다. 남편이 천일고속에 출근하면 최상희는 마을에서 연탄을 배달했다. 트럭은 물론이고 그 흔한 리어커도 없었다. 빨래판에 연탄 6장을 이고 산비탈 꼭대기 집에 배달했다. 당시 부산 서구 안남동은 송도 바다가 바라보이는 산비탈마을이었다.

연탄 한 장 값이 15원이던 시절, 여섯 장을 배달하면 6원의 이문이 생겼다. 하루에 5~6번 배달하면 온 몸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결국 하루에 30원가량 수입이 생겼다. 한 달 꼬박해야 1천원이 안 되는 돈이지만 그녀는 악착같이 일했다. 당시 남편 월급이 4만5000원이었는데, 그것에 비하면 하품 나는 돈이지만 그녀는 자기 집을 장만하기 위해 몸이 부서져라 일했다.
 
 증언자 최상희(왼쪽) 부부
 증언자 최상희(왼쪽) 부부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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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 신혼 셋방살이 시절, 김준식과 최상희의 슬레이트 집은 장마철이면 비가 줄줄이 샜다. 방안에는 양동이를 몇 개씩이나 들여놓아야 했다. 남편과 함께 개미처럼 일한 최상희는 1970년대 내내 연탄배달과 물 배달을 했고 그 결과 1982년에는 부산 금정구에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

경남 양산에서 돼지 200마리를 키우던 남편 친구가 부산에서 식당을 겸업했는데, 김준식에게 식당을 인수하라고 권유했다. 그렇게 인수한 식당이 처음에는 장사가 불티나게 잘 되었다. 하지만 고기 굽는 그을음 때문에 건물주와 주변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80평 규모의 식당은 손님이 바글바글했지만, '앞으로 벌고 뒤로 밑진다' 더니 꼭 그 짝이었다.

그래서 돼지고기 집을 때려치우고 이번에는 횟집을 차렸다. 횟집이 지하철 앞이라 위치는 좋았지만, 이번에는 주방장이 속을 썩였다. 툭하면 지각에 결근이었다. 결국 주방 기술이 없었던 김준식·최상희 부부는 횟집도 정리했다.

그때부터 최상희 부부는 자영업은 하지 않고 각자도생하기로 했다. 남편은 트레일러 운전사로, 아내는 식당에서 찬모, 즉 반찬 만드는 일을 했다. 최상희가 식당 찬모로 일한 지도 어느덧 30년 세월이 다 됐다.

애증관계의 어머니

최상희는 여덟 살에 자기를 버리고 간 엄마가 미웠다. 아니, 지금까지도 마음속으로는 온전히 용서가 안 된다. 그런데도 최상희는 의붓아버지가 죽은 후부터는 엄마와 왕래를 했다. 어느 날 엄마가 말했다.

"6.25 때 죽은 니 아버지 신고해봐라."
"뭔 말이래요?"
"(경주) 입실에 사는 콩나물 공장 하는 사람이 6.25때 아버지가 죽었다는데 보상 받았다카더라. 양남면사무소에 가봐라."


그렇게 해서 돌고돌아 최상희는 경주유족회를 찾았다. 그가 경주유족회 사무실에 발길을 한 지도 올해로 6년째다. 그동안 유족회 활동을 하면서 최상희는 얼굴도 못 본 아버지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하고 자기를 버리고 간 어머니를 이해하는 마음도 생겼다.

오죽하면 하나뿐인 딸을 버리고 갔을까. 지금은 치매가 와 요양원에 있는 엄마를 가끔 찾아가면 그 얼굴 속에 아버지가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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