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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는 세월호 생존자 24명이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월호의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안고 매일같이 안정제와 수면제로 잠을 청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전히 배를 타고, 화물차를 끌며 제주와 육지를 오가는 이들은 오늘도 세월호의 악몽을 꾸며 살아갑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6년, 아직도 그날의 참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기자말]

제주시 아라주공아파트에 사는 왕봉명(70년 8월생)씨는 자동화물 운송을 하고 있다. 사고 이후 살기 위해 화물운송을 계속한다지만 운전대를 잡는 것 자체가 위험한 일임을 알기에 항상 그만두고 싶어한다. 그러나 생계를 위해서 포기하지 못하며 오늘도 운전대를 잡는다. 왕봉명씨와는 지난 8월 2일 '수상한집'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 후 담배를 피우는 왕봉명 씨. 여전히 세월호는 고통이자 슬픔이다.
 인터뷰 후 담배를 피우는 왕봉명 씨. 여전히 세월호는 고통이자 슬픔이다.
ⓒ 제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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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지내시기는 어떠세요? 연강병원에는 가세요?(연강병원은 제주세월호 생존자의 심리상담, 치료, 지원행사 등을 지원하고 있다)
"아뇨. 행사 있을 때나 참석하고 일 때문에 쉽지 않더라고요."

- 어떤 일을 하며 지내세요?
"자동화물운전을 하며 먹고 살았죠. 10년 됐어요. 옛날에 유통 책임자로 있다가 그만두고 화물을 시작했어요. 사람이 놀면 안되니까(웃음)."

- 자동화물과 일반화물이 무엇이 다른가요?
"거의 자동화물이에요. 제주도 내에만 다니는 화물이 있고, 서울도 서울만 다니는 차가 있어요. 우리는 특수하게 배를 타고 육지하고 제주를 왔다갔다하는 거죠. 그걸 통틀어서 자동화물이라고 해요."

- 세월호에 탔던 화물기사분들은 전부터 알고 계시던 분들인가요?
"제주도에 사니까 전부터 아는 사람도 있고, 또 화물 생활 하면서 친해진 사람도 있고 그렇죠. 제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니까 여러 명 알고 있었어요."

- 육지에서 배를 탈 때 인천배를 예약하기 어려워서 보통 목포배를 탄다고 하던데.
"선박 예약은 보통 '알선소'라고 부르는 사무실에서 해요. 우리 일감도 나눠주지만 선박예약도 하는 것이죠. 우리는 사무실에서 예약한 대로 배를 타죠. 인천에서 제주 오는 배는 세월호 하나밖에 없으니까 늘 거의 꽉 차서 예약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보통 목포에서 떠나는 배를 예약해요."

- 4월 15일 얘기를 해볼까요? 그날은 어디에서 짐을 싣고 인천항으로 이동하셨나요?
"그날 강원도 진부에서 감자를 싣고, 같이 갔던 기사들 중 몇 명은 목포나 녹동으로 갔고, 나하고 이종섭(생존자) 형은 인천으로 갔죠."

- 다른 분들처럼 목포나 녹동으로 가시지 않고 인천으로 간 이유가 있으신가요?
"저는 그래요. 화물이라는게 사실상 누구에게는 중요한 것이잖아요. 그래서 운전하는 거리가 멀다 싶으면 안 가요. 가다가 타이어라도 터지면... 게다가 무거운 무게를 싣고 장거리 운전을 한다는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그래서 먼 녹동이나 목포보다는 가까운 인천으로 가게 된 거죠."

- 인천에 도착한 시간이 언제인지 기억나세요?
"도착한 때가 언제였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어요. 막 잊고 살려고 하다보니까 기억이 정확하지가 않아요. 배가 보통 6시에 출발하는데 그전에 도착했다고 보면 되겠네요. 오후 4시나 5시."

"그날따라 술이 안 먹어지더라고"
 
수상한집에서 이야기하는 왕봉명 씨
 수상한집에서 이야기하는 왕봉명 씨
ⓒ 제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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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때도 안개가 끼어 있었나요?
"막 도착해서는 안개가 없었던 것 같아요. 오히려 출항하기 직전에 안개가 꼈던 것 같아요. 안개가 끼니 자연스럽게 출항시간이 늦어졌겠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술이 안 먹어지더라고. 술 좋아하는데. 13시간 배 타려면 술 한 잔 하고 자야하니까. 그런데 그날 따라 술이 안 먹어지더라고요. 그런데 또 출항은 안 한다고 하고."

- 출항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실 예정이셨어요?
"출항이 안 된다고 하면 차를 내려서 차를 몰고 목포로 가야죠. 그 당시는 안개주의보가 내려져서 배가 출항을 못한다고 해서 포기하고 목포 쪽으로 내려가는 사람도 있었고, 일단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는데, 저는 그냥 기다리기로 했죠. 배에서 차를 빼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결국 배가 출항해서 그대로 출발했죠."

- 다른 분들은 출항 전에 항구 근처에서 드셨다는데 식사는 어떻게 하셨어요?
"배 안에서 먹었어요. 그러고 일찍 잤어요. 우리 기사 방도 좁고, 복도도 좁아요. 배가 기울면 복도가 좁기 때문에 난간을 잡고 올라갈 수 있어서 기사는 다 나올 수 있는데, 학생들은 단체 방이기 때문에 방도 커서 배가 기울면 잡고 올라가지를 못해요. 밖에서 열어주지 않는 이상 문이 열리지 않으니까 못 나오는 거죠. 또 선내방송에서 계속해서 선내가 가장 안전하다, 그 자리에 있어라 해버리니까."

- 좀 더 자세히 얘기해 주시겠어요?
"우리는 자고 눈을 뜨면 아침밥을 먹거든요. 그런데 그날 세월호에 단체학생들이 타다 보니 사람이 많잖아요. 그래서 늦게 가면 식당이 복잡할까봐 빨리 가서 먹으려고 6시 30분쯤 일어났어요. 7시 쯤 식당에서 밥을 먹고 돌아와서는 피곤해서 다시 잠을 자려고 누웠어요. 그렇게 자고 있는데 갑자기 쇠 갉아 먹는 소리가 나면서 쏠리는 현상 있잖아요. 중력 때문에. 그렇게 배가 기우는 거예요. 나는 솔직히 배가 넘어갈 줄은 모르고 화물차만 걱정 됐어요. '아이고 차 넘어가네, 차 넘어가네' 하면서 걱정을 했죠. 그리고는 상태를 보려고 나갔죠."

- 그 방에는 누구와 계셨어요?
"종섭 형님하고 둘만 있었어요. 형님이 1층 침대 쓰고 내가 2층 침대를 사용 했어요. 우리는 차만 계속 걱정하고 있었어요. 총 재산이니까. 그래서 무슨 일인가 알아보려고 기울어진 침대를 내려와 복도로 나왔죠. 복도를 지나서 밖으로 나가보니까 확실히 배가 기울어졌더라고요. 우리 뿐만 아니라 기사들도 다 나와서 차 걱정을 하고 있는데, 종섭이 형이 위층으로 올라가자고 하더라고요. 구명조끼도 없어서 구명조끼라도 입으려고 방으로 다시 들어가니 화장실이 역류하면서 바닥에 물이 차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래서 핸드폰이랑 지갑을 비닐로 싸서는 4층으로 올라갔어요. 나는 여차하면 뛰어내릴 생각으로 배 밖에 난간대를 잡고 4층으로 올라오면서 바다 쪽을 보니 저 멀리 큰 배가 떠 있는 것이 보이더라고요. 해상에서 배 사고가 나면 제일 가까운 배가 신속하게 구조를 도울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신호를 보내는 시스템이 되어있을 거란 말이에요. 그런데 그 배가 움직이지를 않더라고요. 그렇게 시간이 한참 흘러서야 헬기가 오더라고요."

- 헬기가 얼마 뒤에 왔나요?
"한 30-40분 있었나? 정확히 기억이 안 나요. 난간을 잡고 있으니까 배가 돌면서 가라앉는 게 느껴지길래 이거 큰일 났다 생각이 들더라고요."

- 헬기가 도착해서는 어떻게 구조가 되었나요?
"헬기가 도착하자 화물기사들은 나이가 많은 분들부터 타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4층에 올라와있는 학생들도 태우고 그랬죠. 그렇게 헬기를 타고 서거차도로 갔는데 이미 그곳에 사람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누군가는 전원구조라는 말도 하고 그러길래 '아이고 그래도 많이 나왔네' 하고 생각했어요. 그곳에서 나중에 동수형을 만났어요. 그래서 '배 어느 정도 가라앉았습니까?' 하고 물어봤죠. 그러니까 거의 다 가라앉았다고 하더라고. '그러면, 전원 구조 했다던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직 배 안에 사람이 많이 있을건데...' 생각하면서 서거차도에서 챙겨준 담요 두르고서 농협 배를 타고 팽목항으로 이동했죠. 그러고서 진도체육관에 잠깐 있다가 우리 자동화물 기사들은 따로 배타고 제주로 돌아왔잖아요. 우리가 거기에 있어봤자 할 것이 없었어요."

"재난 뉴스 본 날은 재난 꿈을 꾼다"

- 그럼 제주에 도착해서는 병원으로 가셨어요?
"네. 중앙병원으로 갔어요. 중앙병원에 있다가 중앙병원에는 정신과 진료가 없다보니까 s중앙병원으로 이동했어요. 그 뒤에 다시 한라병원으로 갔죠. 솔직히 말해서 해수부에서도 꾸준히 치료를 받으라고 했어요. 처음에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겪다보니 1년 6개월을 꾸준히 치료 받았는데 한라병원의 경우에는 진단서를 3년 밖에 인정 안 해줬어요."

- 진단서가 병원마다 달라요?
"그렇더라고요. 병원을 잘못 간 거지. 의사가 '내가 왜 진단서를 끊어줘야 하냐'고도 했어요."

- 그때 일을 하고 계셨어요?
"일은 못했죠. 지금도 사람들이 '너희들 돈 많이 받았지 않았냐'고 하지만, 사람 놀면서 쓰는 것 하고 일하면서 쓰는 것 하고 천지차이잖아요. 진짜 1억이 금방 사라질 수 있는 돈이라는 걸 이번에 알았다니까요. 빚만 늘었어요. 이런 거예요. 오히려 계속 일한 사람보다 치료 계속 하면서 일 못하는 사람은 보상을 덜 받아요."

- 1년 6개월동안 일을 못하시다가 다시 화물 운전을 하셨어요?
"처음엔 어떤 회사에 공동으로 일을 해보려고 일을 시작했는데 그 회사가 잘 안 됐어요. 빚만 지게 되었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차에 오르게 됐어요. 다른 일 할 수 있으면 다른 일 하는 게 좋지만 체질에 맞지 않더라고요. 차를 몰고 오다가다 매일 죽다가 살아나요. 운전하다가 꿈을 꿀 정도예요. 그러니까 나한테는 아주 위험한 일이에요. 졸음이 옛날보다 많이 심해졌거든요. 마음안정이 안 되니까 배에서도 잠을 자지 못하니 그런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생전 꿈을 안 꾸던 사람이 그 잠깐 사이에 꿈을 꾸니까. 그런데 치료도 자주 받아줘야 하는데 일하면서 바빠서 치료 못해, 내 돈 들여 치료받아야 하니 그것도 못해. 답답하죠."
  
인터뷰 중 전화를 받는 왕봉명 씨. 그는 세월호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 많은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인터뷰 중 전화를 받는 왕봉명 씨. 그는 세월호에 대한 왜곡된 인식에 많은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 제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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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까지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어요?
"몰랐죠, 우리는. 처음에는 안 된다고 알았으니까. 나도 이제는 잊으려고 아는 동생 배 타고 한치 낚시도 가보려고 하는데, 이제는 바다가 겁나요. 이겨내려고 시도해봤는데 좀 힘들더라고. 낚시 참 좋아했는데. 그런 걸 겪고 나니 이게 치유가 되나 싶죠. 내 생각에는 안 될 것 같아요. 이겨낸 사람도 있겠지만 제 생각에 이 후유증은 평생 가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 사고 이후의 삶은 어떻게 변했나요?
"나는 꿈을 안 꾸는 사람인데 뉴스에 홍수가 났다던가 지진이 났다 하면 꼭 그날 재난 꿈을 그렇게 꿔요. 가위도 눌려보고. 나는 가위 눌린 사람들을 이해를 못했었어요.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어 생각했는데 사고 이후에 가위에 눌렸어요.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아, 이게 가위눌리는 거구나. 완전 움직이지를 못해요. 꿈에서 깨어나면 움직일 텐데 안 되더라고요. 그리고 다리에 쥐가 잘 나요. 긴장을 해서 그런가. 중앙병원에서도 그 얘기를 했는데.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 언론이나 시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세요?
"하고 싶은 말이 뭐가 있겠어요. 사람들이나 언론이 하는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려야죠. 언론은 자기가 편한 대로 말하는 거니까요. 그래서 나는 뉴스를 안 봐요. 짜증나니까. 진실된 언론은 없어요. 다음에 이런 일이 안 일어난다는 보장은 없지만 기록은 바로 해야 할 것 아녜요."

- 덧붙일 말이 있을까요? 
"나는 사실상 정부에서 이 사람들이 이런 일을 겪어서 이런 피해를 겪었으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책임지고. 안 그러면 또 그런 일을 겪으라는 거 아녜요. 다시는 이 일이 되풀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태그:#제생지, #수상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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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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