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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시 황성공원 내에 세워진 위령탑의 피해자 비문
 경주시 황성공원 내에 세워진 위령탑의 피해자 비문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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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7일. 이날도 경북 경주시 한복판에 있는 황성공원에는 운동하러 나온 시민들이 많았다. 직장 일 때문에 1년 동안 이곳에 못 나왔던 최혜숙은 공원에 있는 운동기구에 몸을 실었다. 6.25 참전비를 지나는데 오른쪽에 웬 낯선 조형물이 있었다. '저건 뭐지?'라는 생각과 동시에 발걸음이 조형물이 세워진 오솔길로 향했다.

'한국전쟁 민간인희생자 위령탑'이라는 이름을 본 순간 최혜숙은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건 못 보던 건데 언제 세워졌지?라고 생각하며 탑 뒤쪽으로 갔다. 맨 왼쪽에 위령탑 건립기가 쓰여져 있었다.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우리 경주에서도 수많은 민간인들이 정치사회적 혼란의 와중에서 적법한 절차 없이 억울하게 희생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중략) 이제라도 860여 위의 넋을 위로하고 추모하고, 인명과 인권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다시는 이 땅에 이와 같은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함은 물론이요....'

탑이 세워진 날짜는 2016년 11월 19일이었다. 날짜를 계산해보니 거의 1년 전이었다. '누가 세운 건지?'라는 궁금증은 비석 하단에 새겨진 비문에서 해결되었다. 경주시장 최양식과 (사)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경주유족회장 김하종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위령탑 옆면에는 각 읍면별로 희생자의 이름이 빼곡히 쓰여 있었다. 최혜숙의 눈은 안강읍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가나라 순으로 된 이름에서 최씨 성을 찾았다. 최달수, 몇 칸 건너 최해근이 보였고, 바로 옆에 '최현택'이 보였다. 70년 동안 한 번도 잊어 본적이 없는 아버지 이름이 비석에서 되살아나자, 그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어진 최혜숙의 통곡은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경주유족회에 발을 디디다

최혜숙은 아버지가 6.25 때 학살당한 이후 자신과 가족이 겪은 일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그러다 보니 슬픔이 배가 되어 울음을 그칠 수 없었다. 한 시간여를 울고 나니 속이 후련했다.

하지만 무한정 울 수는 없었다. 정신을 수습하고 난 최혜숙에게 급선무는 다름아닌 위령탑을 세운 김하종 경주유족회장을 찾는 것이었다. 다음 날은 일요일이라 관공서가 쉬었는데 하루가 십년 같았다. 최혜숙은 밤을 꼬박 새우고 월요일 오전 9시에 경주시청 민원실 문을 열었다. 공무원에게 찾아온 목적을 이야기하니 자치행정과로 안내해 주었다.

자치행정과 과거사 업무 담당자는 최혜숙에게 친절하게 위령탑 건립 배경과 노무현 대통령 당시의 과거사법을 소상하게 알려 주었다. "그런데... 거기에 저희 아버지 이름도 새겨져 있던데, 그건 어떻게 된 건가요?" "글쎄요. 그건 제가 잘 모릅니다. 아무래도 유족회 김하종 회장님에게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공무원은 김하종 유족회장 연락처를 알려 주었다.

그렇게 해서 최혜숙은 오후 두 시에 김하종 유족회장과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희생자 경주유족회 사무실은 경주세무서 맞은편에 있었다. 계단을 한 칸 올라가면 아버지 생각이 떠올랐고, 또 한 칸 오르면 46세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어머니가 생각났다. 울컥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계단을 한 칸 더 오르니 자신의 살아온 삶이 생각나 앞이 뿌예졌다.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찍어내고 계단을 마저 올랐다.

3층에 오르니 입구에 '경주유족회'라는 간판이 보였다. 마치 수십 년 만에 찾은 고향 집 같았다. 조심스레 노크를 하고 문을 여니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은 이가 맞아주었다.

모심던 그해 여름

1950년 7월. 현서(가명)씨네 모 심는 날은 화창했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동원되다시피 했다. 마을 논농사 대부분이 두레(공동노동)로 짓기 때문이다. 최현택(당시 29세)도 아침 일찍 현서씨네 논으로 갔다. 종아리에 달라붙는 거머리를 처음에는 떼어냈지만, 나중에는 그것도 귀찮아 놔두었다. 그러다 보니 한쪽 다리에 거머리 네다섯 마리는 기본으로 달라붙어 피를 빨아 먹었다.

한참을 땀 흘리며 모심기를 하고 있는데, 정복을 입은 경찰이 왔다. "어이, 현택이. 이리 와 보게." 누구의 엄명이라고 거부하겠는가. 최현택은 몇몇 사람들과 함께 논둑으로 나와 거머리를 떼고 안강지서 순경에게 갔다. "잠깐 조사할 게 있으니 지서에 가세."

그 시간부로 최현택은 경북 경주군(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지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밥은 구금된 이들의 아내들이 해 날랐다. 최현택의 아내 서순필(당시 23세)은 3일을 해 날랐는데, 남편과 제대로 된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다. 그런데 4일째 지서에 갔을 때,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울 남편이 어디로 갔대요?" 지서 정문을 지키던 순경은 아무 말이 없었다. 몇 차례 되물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며칠 후인 1950년 7월 28일 경주군 보도연맹원들이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처형되었다. 경주군 내남면 틈수골과 천북면 신당리에서 보도연맹원들이 많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서순필은 집안 어른들과 함께 들것을 갖고 현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당시는 한여름이고 집단 학살이라 시신이 부패하고 훼손돼, 시신을 구별하는 게 불가능했다. 최현택뿐만 아니라 그의 작은아버지 최수범도 그 죽음의 골짜기로 끌려갔다. 

남편이 죽은 지 10년 만인 1960년, 서순필은 제4대 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특별위원회' 경북조사반에 신고했다. 2016년 경주시 황성공원 내에 세워진 위령탑은 1960년 국회에 신고된 피해자를 기본으로 하고 추가신고자 중 공증을 받은 이들의 이름이 새겨졌다.
 
 최현택의 사망일자와 연행사유가 기록되어 있는 피해신고서(출처: 제4대국회 양민희생조사보고서)
 최현택의 사망일자와 연행사유가 기록되어 있는 피해신고서(출처: 제4대국회 양민희생조사보고서)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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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밥은 제사상에만 올랐다

1950년 최현택의 죽음 이후 서순필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다. 시댁이 종가집이라 1년에 제사가 10번이나 되었다. 논 600평(3마지기)에서 수확한 쌀은 자식들 목구멍으로 한 번도 넘어가지 않았다. 겨우 제사상에나 올릴 수 있었다. 1남 2녀의 자식들에게는 보리쌀도 사치스러웠다.

기껏해야 시래기죽으로 연명했고, 그나마 자신은 부엌에서 무밥으로 때우기 일쑤였다. 시골 일거리라고 해봐야 별거 없었다. 마을에 간혹 있는 품팔이와 사과 과수원 일이 전부였다. 봄에는 사과밭에서 풀을 메고, 여름과 가을에는 수확하고, 겨울에는 전지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 입에 풀칠하기 바빴다. 입을 줄이기 위해 장녀 최해원을 일찌감치 18세에 출가시키고, 장남 최해동은 창녕 기와공장에 돈 벌러 보냈다. 서순필은 막내 혜숙이와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먹고 연명했다.
 
 경주경찰서가 1982년 작성환 신원기록편람에 최현택이 수록되어 있다.
 경주경찰서가 1982년 작성환 신원기록편람에 최현택이 수록되어 있다.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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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외 수입은 송아지 키우기였다. 남의 집 송아지를 데려다가 1년 동안 풀을 먹여 기른 후에 우시장에 내다 팔면 목돈이 생겼다. 소 값은 송아지 원주인과 반반씩 나눴다. 소를 1년 동안 키우면 논 한 마지기가 생겼다. 최혜숙이 어머니와 쌀밥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 나이 스물이 넘어서였다.

최혜숙은 스무 살 지나서부터는 농사일을 접고 우시장에서 가게를 하는 집의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그리고 식모살이를 한 지 이태 만에 어머니가 46세의 젊은 나이에 눈을 감았다.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증언자 최혜숙
 증언자 최혜숙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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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나이에 눈을 감은 어머니를 생각하면 최혜숙은 지금도 눈물부터 나온다. "그 흔한 티셔츠 한 장 못 사드렸어요. 엄마가 아플 때 약 한 번 제대로 사 드리지도 못 했고요"라며 울먹이는 최혜숙(71세, 경주시 황성동)의 눈가에는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 생전에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한 미안함과 왜 나를 두고 먼저 갔는지에 대한 그리움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최혜숙은 철도 공무원인 남편과 결혼한 후에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신혼 초에는 주로 부업을 했는데, 마늘 까기, 홀치기, 장갑 꿰매기, 아기 옷 짜기, 유도복 바느질 등을 했다. 자식들이 어느 정도 큰 후에는 남의 집 애들 돌보는 일을 했다. 15년 전에는 경주시의 한 병원장 집에서 가사 도우미를 했고, 이후 요양보호사를 거쳐 현재는 관광공사에서 7년째 근무 중이다.

이렇게 고단한 삶을 살면서도 최혜숙은 십 년 전에는 못 배운 한을 푸는 일을 했다. 어려서 '나원국민학교'를 나온 것이 학력의 전부였던 그녀는 용기를 냈다. 그렇게 해서 2010년경에 중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통과했다.

최근 3년 동안 최혜숙은 고단한 삶을 살아 온 지난 70년 세월이 보상된 것 같다. 황성공원에서 잃어버린 아버지를 찾은 후에 수시로 공원을 찾는다. 위령탑 주변에 풀이 조금만 자라도 제초 작업을 한다. 1년에 한 번 치르는 '합동위령제' 때는 열일 제치고 음식 장만하는 일부터 모든 일에 솔선수범한다.

그녀는 이제 유족회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존재가 되었다. 아버지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그녀의 생일은 양력으로 1950년 11월 16일생이다. 아버지가 학살당한 후 110일 만에 태어난 것이다.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하는 것이 그녀의 남은 과제다. 아버지의 명예가 회복된다고 해서 이른 나이에 죽은 어머니와 자신의 삶이 보상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이 바로 잡힌다면 나머지 고통은 한 순간에 눈 녹듯 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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