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11 20:40최종 업데이트 20.08.11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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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에 술을 부어 돌린다는 뜻으로 행주(行酒)라는 말이 있다. 뜻 그대로라면 우리의 술잔 돌리는 문화를 대변하는 개념 같다. 하지만 행주는 아주 굴욕적인 의미를 지닌 말이다.

행주는 중국 진(晉)나라(265~316년) 3대이자 마지막 황제가 된 회제(懷帝 284~313년)의 청의행주(淸衣行酒)에서 유래했다. 회제가 흉노의 유총(劉聰)에게 포로로 잡혀, 비천한 자가 입는 푸른 옷을 입고 술을 따라 잔을 돌렸는데, 이를 본 진나라 신하들이 통곡했다고 한다.
 

백제시대 토기잔, 투박하고 단아한 커피잔처럼 보인다. ⓒ 막걸리학교

 
백제 의자왕도 행주의 굴욕을 맛보았다. 660년 가을 8월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항복한 뒤에 항복 의식으로 행주가 행해졌다. 신라왕 김춘추, 무장 김유신, 왕자 법민, 당나라 소정방과 유인원이 자리를 차지하고, 의자왕은 태자 효와 왕자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단상의 승자들에게 술을 바쳤다.

이 모습을 보고 백제 신하들이 오열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이 모습을 회상하며 훗날 조선시대 문인인 남효온(1454~1492)이 '부여 회고'라는 시를 남겼다.


육백년 백제 왕업 가을 달이 찬 듯하니 / 六百年來秋月盈
당나라 군사의 북과 피리 소리 밤에 울려퍼지네 / 唐兵鼓角夜來鳴
백마강 어귀에서 푸른 옷 입고 술 따랐으니 / 靑衣行酒馬江口
백관들의 통곡 소리 차마 들을 수 있으랴 / 忍廳百官哭泣聲

반월성 언저리가 모두 전쟁터 되었어도 / 半月城邊皆戰場
군왕은 술상에서 술잔만 돌렸다네 / 君王據案浪傳觴
짧은 인생 멋 모르고 만년 계획 세웠으니 / 百年便作萬年計
문밖에 소정방이 올 줄 어찌 알았으랴 / 門外安知蘇定方


추강 남효온은 생육신의 한 사람이며, '육신전'을 지어 사육신의 존재를 알린 사람이다. 그는 김종직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김굉필, 정여창과 함께 공부했다. 18살에 현덕왕후 능의 복위을 상소했으나 상달되지 못하여 크게 실망하였다.

20살에 생원시를 합격하였으나 더 이상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고, 22살에 신영희, 홍유손 등과 죽림거사(竹林居士)를 맺어 동대문 밖 죽림에 모여 소요건(逍遙巾)을 쓰고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며 지냈다.

그는 전국을 유람하며, 요사이로 치면 여행작가라 불러도 좋을 만큼 많은 여행기를 남겼다. 그는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능 복위를 상소한 것과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것 때문에 사후 12년이 지난 갑자사회(1504년) 때에 양화진에서 부관참시까지 당했다.
 

당나라 화가 염립본이 그린 벡제 사신의 그림. 대만국립고궁박물관에 있다. ⓒ 막걸리학교

 
그의 문집 <추강집>에는 술을 마시고 쓴 시편이 여럿 있는데, 그 중에서 술을 경계하는 '주잠(酒箴)'이라는 시가 있다.

술자리 처음에는 예의가 엄숙하여 / 初筵禮秩秩
손님과 주인이 거친 행동 경계하니 / 賓主戒荒嬉
오르고 내림에 진실로 예법이 있고 / 升降固有數
나아가고 물러날 때도 절도가 있네 / 進退抑有儀
석 잔 술이면 말이 비로소 많아져서 / 三桮言始暢
법도를 잃음을 스스로 알지 못하고 / 失度自不知
열 잔 술이면 소리 점점 높아져서 / 十桮聲漸高
주고받는 얘기가 더욱더 어지럽네 / 論議愈參差
뒤이어 언제나 노래하고 춤추니 / 繼以恒歌舞
온몸이 피로한 줄 깨닫지 못하네 / 不覺勞筋肌
술자리 마칠 때면 동서로 치달려서 / 筵罷馳東西
저고리 바지가 온통 진흙투성이라 / 衣裳盡黃泥
올라탄 말 머리가 향하는 곳마다 / 馬首之所向
아이들이 손뼉 치면서 비웃어대고 / 兒童拍手嗤
끝내 비틀대다 넘어지고 자빠져서 / 終然顚與躓
부모가 주신 몸을 손상시키고 마네 / 而傷父母遺
술의 재앙을 모르는 바 아니건만 / 非不知酒禍
스스로 좋아하기를 단 엿처럼 하네 / 顧自甘如飴
무풍은 『서경』에서 경계하였고 / 巫風戒於書
「빈지초연」은 『시경』에 실려 있네 / 賓筵播於詩
양웅은 일찍이 주잠(酒箴)을 지었고 / 揚雄曾著箴
백유는 술 때문에 죽었거늘 / 伯有死於斯
어찌하여 이러한 광약을 마시는가 / 胡爲此狂藥
덕을 잃음이 항상 여기에 있다네 / 失德常在玆
술에 대한 경계가 서책에 있으니 / 酒誥在方策
의당 생각하여 법규로 삼아야 하리 / 宜念以爲規


추강 남효온이 28살 때인 1481년 2월 5일 남산 자락에서 과음으로 실수를 하고 난 뒤에 스스로를 경계하면서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술을 엿처럼 좋아했다하니, 얼마나 좋아했는지 상상이 간다. 당시에 술이 지나쳐서 바지 저고리가 진흙투성이가 되고, 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몸을 다치기까지 했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술잔에는 술만 아니라 마음도 담기 좋아서, 축배가 되기도 하고 독배가 되기도 한다. 모두를 슬프게 하는 술이 있는가 하면, 나를 춤추게 하는 술도 있다. 술 속에 기쁨과 슬픔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술은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연주하는 악기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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