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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원길의 조부 이재구
 이원길의 조부 이재구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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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제 간다."
"할아버지, 엉엉."
"울지 마라. 잠시 쉬러 간다."


이재구는 장손 이원길의 손을 꼭 잡았다. "원길아..." "예, 할아버지." "누이랑 동생들하고 싸우지 말고 잘 지내라." "네."

이재구는 숨 쉬기가 고통스러운지 얼굴을 찡그리고 간신히 호흡을 이어갔다. 그러자 이원길은 "할아버지, 근데 제사는 어떻게 할까요?"라고 물었다. 평소 할아버지 이재구가 교회에 다닌 탓으로 가족들 모두 교회가 다녔고, 그런 연유로 제사도 지내지 않았던 것이다.

이재구는 손자 이원길을 그윽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네 형편이 되거든 지내거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눈을 감았다. 이재구는 1971년 91세의 나이로 한 많은 세상과 작별했다. 그의 임종에는 딸 5명과 친손주 5명, 그리고 외손주들이 함께 했다. 아들 삼형제는 임종을 지키기 못했다. 왜 그랬을까?

공포탄을 쏘아댄 경찰

1950년 7월 29일 경북 경주군(현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초가삼간(草家三間) 작은 방에 할아버지 이재구, 아버지 이석환, 손자 이원길(당시 8세)이 나란히 누워 있었다. 이석환이 꺼내 펼친 수첩에는 세계 각국의 국기가 그려져 있었다. 이석환은 아들에게 여러 나라 국기를 설명하고 테스트도 했다.

"흰 바탕에 빨강 원이 그려진 것은 어느 나라 국기냐?" "일본요." "그럼 이건 어느 나라 국기냐?" 아버지가 짚은 것은 흰 바탕에 빨간 줄이 그어져 있고, 왼쪽 상단에 별이 50개 그려져 있었다. 이원길은 머리를 갸웃거리며 잠시 생각하더니 "미국이요" 했다. "맞추었다. 다른 말로 성조기라고 한다."

아버지 옆에 있던 할아버지 이재구도 빙그레 웃으며 "아이구, 우리 손자 똑똑하구나"라며 칭찬했다. "자, 이건 어느 나라 국기냐?" "......" 이번 문제는 어려웠다. 청색 바탕에 굵은 빨간 선이 열십자와 대각선 방향으로 그어져 있었다.

결국 이원길은 답하지 못했다. "이건..."이라며 이석환이 영국 국기를 설명하려는 순간,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석환이 밖으로 문을 열고 나가는 방문 사이로 경찰 제복을 입은 순경과 흰 옷을 입은 사람들이 보였다.

겁이 잔뜩 난 이원길은 방문을 열 엄두도 내지 못하고 손에 침을 묻혀 창호지에 구멍을 내고 밖을 훔쳐봤다. 마당에는 뒷결박을 한 어른 두 명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곧바로 아버지 이석환도 그들과 같은 신세가 되었다. 경찰은 아버지와 다른 어른들을 끌고 갔다.

이원길은 뒤에서 붙잡는 할아버지의 손길을 뿌리치고 마당을 가로질러 뛰었다. "아버지!" 하는 소리에 이석환이 뒤를 돌아보는 순간 "탕"하는 소리가 났다. 경찰이 공포탄을 쏜 것이다. 이원길은 움칫하며 더 이상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아들 셋 모두 먼저 보낸 이재구

이후 이석환은 같은 마을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안강역 창고에 구금되었다. 다음 날 경주 방향의 다음 역인 사방역에 갇혔다가 1950년 8월 1일(음력 6월 20일) 천북면 신당리에서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학살되었다. 이 와중에 이석환의 남동생 이석대 역시 총살 대열에 합류되었다. 6.25 전쟁 발발 이후로 전국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난 보도연맹 민간인 학살이었다. 적과 내통할 수 있다며, 민간인들을 재판도 없이 무차별적으로 죽였다. 

졸지에 자식 둘을 잃은 이재구에게 이제 남은 것은 둘째 아들 이석윤뿐이었다. 하지만 6.25가 발발하기 전에 군대에 간 이석윤은 전쟁이 끝나고 10년이 다되도록 감감 무소식이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이석윤의 생사를 군대에 알아보지 못했다. 10년 동안 무소식이 된 후는 '죽었겠지'하며 지내왔다.

그런데 1960년경에 김일출이라는 사람이 경주 양동마을에 와 이원길을 찾았다. "누구세요?" "네 삼촌하고 군대생활을 같이 한 사람이다. 네게 슬픈 소식을 전해줘야겠구나"라며 말을 꺼낸 김일출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한국전쟁 전 해병대에 입대한 이석윤과 김일출은 군 입대 동기로 경북 포항에서 훈련을 받고 제주도에 배치됐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얼마 안 돼 장교가 내무반에 들어 와 자고 있는 병사들을 깨웠다.

"지금부터 호명하는 놈은 즉시 연병장으로 집합한다"라고 말한 장교는 명단을 보고 몇몇을 호명했다. 그 중에 '이석윤'이라는 이름이 있었고, 불려 나간 이들은 며칠 후 목포 앞바다에서 수장되어 죽었다고 한다.(제4대 국회, <양민학살사건진상조사보고서>, 1960)

이렇게 이재구의 아들 삼형제 모두 한국전쟁 직후 국가폭력의 희생물이 됐다. 물론 이재구는 죽을 때까지 둘째 아들 이석윤의 죽음을 몰랐다. 손자 이원길이 할아버지가 충격을 받을까봐 그 사실을 숨겼기 때문이다.

피난길 내내 한숨만 쉰 할아버지
 
이석환 가족사진 우측에서 두번째가 이석환, 세번째가 이윤필.
▲ 이석환 가족사진 우측에서 두번째가 이석환, 세번째가 이윤필.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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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지에 가장을 잃은 이원길 집안의 피난 짐은 초라하기만 했다. 하지만 막상 짐을 챙기다 보니 한도 끝도 없었다. 할아버지 이재구가 막내 손녀를 무등 태우고 어깨띠를 하고는 이불을 맸다. 어머니 이윤필은 솥단지를 머리에 이었다.

뒷산을 넘어 양동철교를 지나는데 기찻길이 엿처럼 휘였고, 남산다리는 부서져 있었다. 미군 폭격으로 주요 도로가 파괴됐다. 강가에는 소와 피난민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피난길 내내 이재구는 한숨만 쉬었다. 시아버지가 한숨을 쉬는 사연을 아는 며느리는 "아버님, 너무 상심 마셔요"라고 위로했다. 이재구는 "보릿가마 세 가마만 마련했어도 될 일을..."라며 끝내 눈물을 보였다. 옆에 묵묵히 듣던 며느리도 울음을 터뜨렸다.

앞서 이석환이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연행된 후 구장(이장)이 이재구에게 오더니 "보릿가마 세 가마씩 주면 지서장한테 얘기해서 끌려간 사람들을 빼 오도록 해 보겠소"라고 했다. 하지만 자식 둘이 경찰한테 끌려가고, 둘째 아들은 군대 가 있는 이재구 집안은 보리쌀을 구할 데가 없었다. 같은 마을에서는 보리쌀 세 가마를 장만해 구장에게 갖다주어 풀려난 이도 있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이재구가 한숨을 쉴 수밖에....

이윤필은 다른 이유로 한숨을 쉬었다. 남편 이석환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학살 현장에서 살아나온 이도 있다는 소문을 들으니 가슴이 더욱 쓰라렸다. 이윤필과 같은 마을 이씨 형제가 천북면 신당리 학살현장에 끌려갔는데, 동생 이석○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온 것이다. 이석○은 '탕'하는 소리와 함께 엎드렸고, 군경과 주민들이 흙으로 대충 묻고 발로 밟는 순간에도 꼼짝하지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나고 주변이 캄캄한 때 탈출한 것이다.

시아버지와 며느리가 각각 다른 이유로 피난길 내내 한숨을 쉬었지만 죽은 이가 살아 돌아올 수는 없었다. 이제는 생존이라는 또 다른 현실적인 문제와 전쟁을 치러야 했다. 

죽을 때까지 일한 할아버지

1881년생인 이재구는 한국전쟁 당시에 집 나이로 70세였다. 당시 70세이면 상노인 소리를 들으며 자식과 손주들로부터 부양을 받았다. 아니, 50세만 넘어도 농사를 짓지 않던 시대였다. 이재구가 세상을 뜬 1965년도 대한민국 성인 평균수명은 52세였다. 그렇기에 50세만 되면 일손을 놓았다.

하지만 그는 죽은 아들 셋을 대신해야 했다. 손주들을 굶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재구는 죽기 직전까지 농사일에 매달렸다. 이재구가 세상을 뜬 1971년도 대한민국 성인 평균수명은 59세였다. 그렇기에 50세만 되면 일손을 놓았던 것이다. 그러니 85세까지 똥 장군을 진 할아버지를 손자 이원길(78세.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은 잊을 수 없다.

이재구는 죽기 전에 남다른 용단을 내렸다. 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모두 출가하고, 아들 셋은 비명횡사했기에 며느리 볼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집안 제사로부터 며느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그가 마을에 있는 '복음교회'를 다닌 것은 순전히 제사를 지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의 며느리 사랑이 얼마나 깊은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며느리 이윤필 역시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시골에서 품팔이도 하고 엿장수, 두부장수 생활을 했다.
  
 증언자 이원길
 증언자 이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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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 이원길도 어릴 때부터 마을 일 품팔이와 지게질을 했다. 양동국민학교를 졸업한 그에게 상급학교 진학은 언감생심이었다. 고모가 사납금(수업료)을 준다고 해 한때 가슴이 부풀었으나, 헛꿈이 되고 말았다. 결국 농사일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농사일과 관련해 마을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들었다.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인데, 그가 포도와 채소 등 특용작물 재배를 마을에서 제일 먼저 시작했다.

팔십을 앞둔 이원길은 현재도 정력적으로 일을 하고 있다. 그가 살고 있는 경주시 강동면 양동마을은 전국적으로 한옥촌으로 유명하다. 양동마을은 1984년 12월 20일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문화재(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다. 경주시 북쪽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경주손씨와 여강이씨 종가가 500여 년 동안 전통을 잇는 유서 깊은 반촌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기와집이 54채, 초가집에 110채가 있다.

양동마을이 1984년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된 후 한옥마을로 거듭날 때 이원길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10대 때부터 초가지붕에 이엉 얹는 기술을 배운 그는 양동마을 초가집 7채에 지붕을 얹었다.

지난 5월 20일 국회에서 과거사법이 통과된 이후 이원길의 발걸음도 빨라졌다. 아버지와 삼촌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다. 이 일을 하면서 가장 생각나는 이가 할아버지다. 죽을 때까지 손주들을 위해 일을 한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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