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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11월 5일 상하이 비행장에서 임정 요인들의 귀국을 환송하는 모임 사진. 화환을 걸친 김구 주석 왼편으로 조완구, 김규식 선생이 보이고 오른편으로 며느님 안미생, 이규열(이시영 선생 차남), 이시영 선생이 보인다. 김구 선생 앞에 태극기를 든 소년이 어린 시절의 이종찬 전 의원이다. 1945년 11월 5일 상하이 비행장에서 임정 요인들의 귀국을 환송하는 모임 사진. 화환을 걸친 김구 주석 왼편으로 조완구, 김규식 선생이 보이고 오른편으로 며느님 안미생, 이규열(이시영 선생 차남), 이시영 선생이 보인다. 김구 선생 앞에 태극기를 든 소년이 어린 시절의 이종찬 전 의원이다.
▲ 1945년 11월 5일 상하이 비행장에서 임정 요인들의 귀국을 환송하는 모임 사진. 화환을 걸친 김구 주석 왼편으로 조완구, 김규식 선생이 보이고 오른편으로 며느님 안미생, 이규열(이시영 선생 차남), 이시영 선생이 보인다. 김구 선생 앞에 태극기를 든 소년이 어린 시절의 이종찬 전 의원이다. 1945년 11월 5일 상하이 비행장에서 임정 요인들의 귀국을 환송하는 모임 사진. 화환을 걸친 김구 주석 왼편으로 조완구, 김규식 선생이 보이고 오른편으로 며느님 안미생, 이규열(이시영 선생 차남), 이시영 선생이 보인다. 김구 선생 앞에 태극기를 든 소년이 어린 시절의 이종찬 전 의원이다.
ⓒ 우당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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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으로 나치스와 싸우다 해외에서 반 나치스 운동을 한 망명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시에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이 있다. 1944년 작품이다.

           살아 남은 자의 슬픔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 보다 오래 살아 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한 자는 살아 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김광규 역)


브레히트는 시어에 나오는 "그 많은 친구들"을 모스크에서 병사한 슈테핀, 스페인 국경에서 자살한 벤야민, 베를린 시대의 영화감독 콕흐 등을 꼽았다.

이시영의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은 달랐을 것이다. 6형제 중 자신만이 살아 남았기 때문이다.

굶어 죽은 형도 있었고 뤼순감옥에서 고문으로 숨진 형도 있었다. 영양실조로, 병들었으나 치료는커녕 약값이 없어서 죽은 형과 형수들 그리고 독립전선에서 행방불명이 된 조카들이 있었다. 재혼한 지 얼마 후 함께 망명했던 재취 부인도 병사하였다. 가족과 일가뿐만 아니라 수많은 동료ㆍ지사들이 희생되어, 해방의 날을 맞지 못하였다.

김구 주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1945년 11월 5일 장개석 정부가 내준 비행기를 타고 5시간만에 충칭에서 임시정부가 출범했던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러나 국내 귀환을 위해 미국이 보내주기로 한 비행기는 상하이에 머문지 18일만인 11월 23일에야 도착했다.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환영대회에 참석한 김구 주석, 김규식부주석, 엄항섭 선전부장 등(1945년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환영대회에 참석한 김구 주석, 김규식부주석, 엄항섭 선전부장 등(1945년 12월 19일)
▲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환영대회에 참석한 김구 주석, 김규식부주석, 엄항섭 선전부장 등(1945년 12월 19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환영대회에 참석한 김구 주석, 김규식부주석, 엄항섭 선전부장 등(1945년 12월 19일)
ⓒ 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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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김구 등 1진 15명은 미군 C-47 중형 수송기편으로 3시간 만에 김포공항에 도착 환국하였다. 그나마 2진은 일주일 후 군산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국내에는 임시정부 환영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었으나 미군정측은 이를 알리지 않아 공항에는 환영객 하나 없었다.

미군정은 임시정부 요인들을 개인자격으로 귀국케 하는 등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10월 16일 미국 태평양 방면 육군총사령관 맥아더가 주선한 비행기를 타고 도쿄를 경유해 서울에 도착했다. 미 육군 남조선 주둔군사령관으로 임명된 존 하지 중장은 이승만이 일본 도쿄에 도착했을 때 그를 만나려 일본까지 가서 맥아더와 3인회담을 가진데 이어 대대적인 귀국환영 대회를 연 것과는 크게 대조되었다.

미국은 투철한 민족주의자인 김구 등 임시정부 요인보다 친미성향이 강한 이승만을 처음부터 점찍고 크게 우대하였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환영준비위원회에서 마련한 경교장과 한미호텔에 머물면서 해방정국에 대처하였다. 12월 19일 대규모적인 '임시정부 개선 환영식'이 열렸다. 미군정은 냉대했지만 국민은 임정요인들을 뜨겁게 환영했다. 식장에는 조선음악가협회가 제정한 〈임시정부환영가〉가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임시정부 환영가

 1. 원수를 물리치고
   맹군이 왔건만은
   우리의 오직 한 길
   아직도 멀었던가
   국토가 반쪽이 나고
   정당이 서로 분분
   통일업신 독립없다
   통일만세 통일만만세

 2. 30년 혁명투사
   유일의 임시정부
   그들이 돌아오니
   인민이 마지하여
   인제는 바른 키를
   돌리자 자주독립
   독립업신 해방 없다
   통일만세 통일만만세.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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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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