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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의 개인사는 임시정부의 역사와 중첩된다.

고통의 길이고 고난의 여정이었다. 대륙의 정세는 크게 변하고 있었다. 일제가 1931년 9월 만주를 침략한 데 이어 상하이를 점령하고, 이듬해 3월 만주괴뢰국을 수립하였다. 그리고 1933년 10월에는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같은 해 1월 히틀러가 독일의 수상이 되었다.

중국 대륙은 일본군의 전쟁놀이터로 변해갔다. 비록 철도와 해안을 중심으로 하는 거점도시가 차례로 장악되었지만, 침략의 최종 목표인 심장부를 향하고 있었다. 여기에 중국은 장개석의 국민당군과 모택동의 공산당군이 왜적 앞에서 벌이는 내전을 멈출 줄 몰랐다.
  
새롭게 단장한 충칭임시정부 새롭게 단장한 충칭임시정부
▲ 새롭게 단장한 충칭임시정부 새롭게 단장한 충칭임시정부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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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도 위협받게 되면서 어렵살이 임시정부를 재건했던 이시영과 임시정부 요인들은 다시 이삿짐을 쌌다.

1935년 11월 25일을 기해 전장(鎭江)으로, 이후 다시 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충칭으로 옮기는 이동시대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식민국가들이 대부분 짧은 기간 영국에 망명정부를 세운 데 비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27년 동안 무려 7차례나 이동해야 하는 고난을 겪었다. 중국대륙을 종횡한 셈이다.

이 기간 이시영은 정부의 주석이나 의정원의 의장 등 수장을 맡지는 않고 국무위원, 의정원의원, 재무부장, 정당 간부 등에 머물렀으나, 그의 존재는 민족진영의 결속에 구심 역할을 하는데 모자라지 않았다. 임시정부가 활기차게 운영될 때 그의 존재는 희미하고, 어려울 때에는 돋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광이불요'란 표현이 적합하다.

임시정부는 1935년 11월 25일 다시 진강으로 이동하였다. 여기서 또 한차례 위기를 겪게 되었다. 사회주의 계열은 1932년부터 다시 제기된 좌우합작 운동의 결과로 1934년 1월 개최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제1차 대표대회에서, 동맹을 해체하고 통일전선 정당으로서 단일정당(민족혁명당)을 결성키로 했다. 좌파계열 뿐만 아니라 의열단, 미주지역 독립운동가, 신한독립당 인사들이 두루 참여한 민족혁명당에는 한국독립당 소속의 임시정부 국무위원 7명 중 5명까지 참여함으로써 임시정부는 존립의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번에도 이시영의 숨겨진 역량이 발휘되었다. 무엇보다 송병조ㆍ차리석과 협의하여 임시정부를 이끌어갈, 공석중인 국무위원을 보선하는 일을 서둘렀다.

"1935년 11월 2일에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위원 보선을 실시하여 이시영을 비롯하여 김구ㆍ이동녕ㆍ조완구ㆍ조성환 5명을 국무위원으로 선출했다."(주석 1)

이렇게 5명을 충원하고 기존의 송병조ㆍ차리석과 함께 국무위원은 7명으로 법적 요건을 갖추게 되었다. 국무회의는 이동녕을 주식으로 선출하고 내무장 조완구, 외무장 김구, 군무장 조성환ㆍ법무장 이시영, 재무장, 송병조, 비서장 차리석을 각각 선임하였다.(주석 2)


민족혁명당의 등장은 우파 민족진영에 일대 위기였다. 그들은 공공연히 임시정부의 해체를 주장하고, 과거 임시정부에 몸담았던 인사들도 하나둘씩 그쪽으로 옮겨갔다. 이시영과 임시정부를 재정비한 이들은 1935년 11월 한국국민당을 창당하였다.

한국국민당은 이사장제를 채택하여 김구를 이사장으로, 이동녕ㆍ손병조ㆍ조완구ㆍ차리석ㆍ김붕준ㆍ안공근ㆍ엄항섭 등 7명의 이사를 뽑았다. 이시영은 조성환ㆍ양조우와 함께 감사를 맡았다. 국무위원 전원이 당의 간부직을 맡게 된 것은 당의 비중을 높이는 측면도 없지 않지만, 이 시기 임시정부의 인물난에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좌우합작 통합정부를 이뤘다. 앞줄 오른쪽 끝에 앉은 이가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김구 임시정부 주석이다.
 194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좌우합작 통합정부를 이뤘다. 앞줄 오른쪽 끝에 앉은 이가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 오른쪽에서 네번째가 김구 임시정부 주석이다.
ⓒ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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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민당의 이념은 혁명적 수단으로 국토와 주권을 광복하여 신민주공화국을 건설하고, 삼균주의가 실현되는 세계일가를 건설한다는 내용이다. 창립선언에서 "한 줌의 땅도 되찾지 못하고 쇠사슬의 유린에 울부짖는 동포들의 울음소리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들의 잘못에도 중요한 성분을 갖고 있다." (주석 3) 고 자성하였다.

한국국민당은 국내외 동포들에게 혁명적 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한민(韓民)』ㆍ 『한청韓靑』ㆍ『전선(前線)』 등의 기관지와 각종 유인물을 통한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한민』은 한국국민당의 기관지로서 1936년 3월 15일자로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한민』은 두 종류가 발행되었다. 창간호 이후 1938년 4월 3일의 제17호까지 '상해한민사'의 명의로 발행되었으며, 1940년 3월 1일자로 발행된 것은 '한국국민당 선전부'의 명의로 발간되었다.

『한청』은 한국국민당의 산하단체인 '한국국민당청년단'의 기관지이다. 1936년 8월 27일자로 창간호가 발행되었다. 이후 1937년 6월 15일까지 제2권 제4호까지 간행된 사실이 확인된다. 한국국민당청년단에서는 1939년 4월 1일자로 충칭에서 『청년호성(靑年呼聲)』을 발행하였고, 청년단 상하이 지부에서는 1937년 9월 『전고(戰鼓)』를 발행하였다.


주석
1> 「임시의정원 제28회 의회 속회」,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 임시정부 자료집 2 임시 의정원 1』, 293쪽.
2> 『대한민국임시정부 공보』 제60호,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2:헌법공보』, 190쪽.
3> 김정주, 『조선통치사료』10, 783쪽, 1976.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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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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