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6 08:30최종 업데이트 20.08.06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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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말 프랑스 페미니즘 운동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상징이 되었던 두 사람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지치지 않는 열정적 페미니스트, 낙태 합법화의 불씨를 세상에 전한 변호사 지젤 알리미(Gisèle Halimi)와 47년간 폭력 남편을 견디다 살해한 후 10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구명운동에 힘입어 대통령 사면으로 풀려났던 자클린 소바주(Jacqueline Sauvage)가 그들이다.

내가 원할 때 엄마가 될 수 있는 권리
 

1972년 마리 끌레르라는 이름의 소녀가 강간으로 가진 아이를 낙태한 혐의로 어머니와 함께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이들의 변호를 맡은 지젤 알리미는 두 사람의 무죄를 주장했다. ⓒ 유튜브 캡처

 
지난 7월 28일, 9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지젤 알리미는 튀니지의 소박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딸에겐 그 어떤 관심도 나눠주지 않고 모든 기대를 장남에게 걸던 '평범한' 가정의 엄마는 딸에게 오빠의 침대 정리를 맡긴다. 지젤 알리미는 정당하지 않은 엄마의 요구를 거부하며 단식 투쟁을 했고 결국 항복을 받아내 의무에서 벗어났다. 그것은 "자유를 향한 첫번째 승리"로 그녀의 일기장에 기록된다.

16세 때 부모의 강제 결혼 요구를 물리치고, 고교를 마친 후 파리로 건너가 철학과 법학을 공부한다. 변호사가 된 그녀는 고국으로 돌아가 알제리와 튀니지 해방운동에 헌신한 후 프랑스로 돌아온다. 1971년 사르트르, 보부아르와 함께 여성 낙태권운동협회를 창립했고 1972년 강간으로 임신한 아기를 낙태한 혐의로 어머니와 함께 법정에 선 16세 소녀를 변호, 343명의 여성 인사들이 참여한 역사적인 '343명 잡년들의 선언(나도 낙태했다)'을 이끌어 내며 재판에서 승리한다.


낙태는 5년 이하의 징역형을 살 수 있는 범죄였고, 피임은 처방전이 있어야 구입이 가능했으며, 강간은 형법상 정의 자체가 또렷하지 않았던, 따라서 원치 않는 임신은 가임기 여성들을 위협하는 일상적 공포이던 시절이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가 작성하고, 까뜨린느 드뇌브, 쟌 모로, 마르그리트 뒤라스 등 당대의 저명한 여성 343명이 자신도 낙태할 수밖에 없었음을 선언한 뒤 낙태 금지법은 실질적으로 무력화 된다. 이 때의 승리는 1974년 통과된 베유법(프랑스 여성 정치인 시몬 베유가 보건부장관 재직 시 통과시킨 자발적 임신 중단 합법화 법)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내 안에는 분노와 야성적 힘이 들끓고 있었어요. 나는 투쟁을 통해 나를 구하고자 했죠."

알리미는 자신의 평생에 걸친 투쟁의 삶이 불덩이를 품고 있던 자신을 구원할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말한다. 1980년 통과된 강간의 범위와 법적 정의를 규정한 강간법 채택에 기여했고, 1981년엔 사회당 하원의원으로 당선해 낙태 시술 비용을 의료보험으로 보상하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1991년에는 반세계화 운동 단체인 '시민 지원을 위한 금융거래 과세연합'(Association pour une Taxation des Transactions financières pour l'Aide aux Citoyens, ATTAC)의 창립 멤버였으며, 미국이 벌인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전쟁범죄조사위원회 회장을 맡아 반전·반세계화 운동에 앞장 서기도 했다. "이건 정당하지 않아"를 말하게 하는 모든 일에 그녀는 기꺼이 자신을 던졌고, 그러한 삶의 궤적과 생각을 담은 16권의 저서를 남기며 작가로도 또렷한 족적을 남겼다.

마크롱 대통령은 그녀의 죽음에 "지젤 알리미의 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었다. 프랑스는 오늘 열정적인 공화주의자이며 여성 해방을 위해 싸운 위대한 투사를 잃었다"는 헌사를 바쳤다.

보수 언론으로부터 당신은 태아를 살해할 권리를 주장하는 게 아니냐는 집요한 공격을 받아왔던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답하곤 했다.

"우리는 낙태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십자군이 아닙니다. 엄마가 되는 일이 여성 스스로 선택하는 권리가 되도록 싸우는 것입니다".

살려고 당긴 방아쇠, 왜 정당방위가 아닌가
 

2015년 12월 3일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프랑스 여성 자클린 소바주가 법정에 앉아 있다. 소바주는 살인죄 유죄 판결에 대한 항소심에서 패소한 이후 프랑스에서 가정폭력 피해자의 상징이 되었다. ⓒ 연합뉴스

 
대통령 사면으로 출옥한 후 4년이 채 되지 못한 시간 동안 비로소 평화로운 삶을 누리다 지난 23일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자클린 소바주는 2012년 9월 자신과 자녀들에게 폭력을 행사해온 남편을 엽총으로 살해했다. 평생 이어져온 남편의 폭력은 자녀들에게도 대물림되었고, 작은 딸은 아빠로부터 성폭력을 당하기도 했다. 사망 당일에도 술에 취한 채 65세의 아내에게 주먹을 휘둘렀던 남편을 향해 방아쇠를 당김으로써 긴 비극을 종결했던 그녀의 행위는 법원으로부터 정당 방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2014년과 15년에 있던 1심과 2심 재판 모두 그녀에게 10년의 징역형을 선고한다.

재판 결과가 세상에 전해지자, 페미니스트들이 들고 일어났고, 수십만이 참여한 서명운동이 이어졌다. 50명에 이르는 국회의원들, 파리시장 등 정치인들까지 대통령의 사면을 촉구하기에 이르면서, 자클린 소바주 사건은 거대한 사회적 논쟁의 중심에 선다.  

결국 자클린 소바주의 세 자녀를 엘리제궁에서 면담 한 올랑드 대통령은 그녀에 대한 사면을 결정했다. 2016년 초 대통령의 부분적 사면 결정, 법원의 거부, 거리에서 다시 타오른 석방 요구 시위, 2016년 말 마침내 대통령의 완전한 사면으로 이어진 지난한 과정 끝에 자클린 소바주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자클린 소바쥬의 사면을 요청한 그녀의 세 딸이 자신들이 겪었고 목격했던 아버지의 폭력에 대해 대통령에게 말하며 어머니 행위의 정당성을 호소하고 있다. ⓒ 엘리제궁 트위터 캡쳐

 
이후 그녀는 프랑스에서 여전히 광범위하게 벌어지는 가정 폭력의 상징적 인물이 되며, 여성 폭력에 맞서는 투쟁은 페미니즘 운동의 핵심 이슈로 떠오른다. 그녀의 이야기는 2017년 <자클린 소바주, 그가 아니었다면 내가 죽었을 것이다>(Jacqueline Sauvage: C'était lui ou moi)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전국의 페미니스트 단체들이 합심하여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고 지속적으로 정부를 압박한 결과, 정부는 2019년 11월 30개의 여성 폭력 방지 대책안을 내놓기에 이른다. 마치 1971년 지젤 알리미의 법정 투쟁이 1974년 여성의 임신중단권 법제화로 이어진 것처럼.

비폭력과 성평등에 대한 학교 교육 의무화, 가정·커플 내 폭력을 접수받는 전용신고전화(3919) 설치, 폭력 고소장 접수 즉시 피해자 보호, 피해자 보호를 위한 주거시설 1천 개 추가 제공(2020), 배우자에 대한 살해 혹은 살해 시도가 발생했을 때 자녀에 대한 친권의 자동 정지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추가로 자클린 소바주가 사망하던 바로 그 날 또 다른 법개정이 이뤄진다. 배우자나 자녀 혹은 배우자의 가족(형제·자매·부모)에게 폭력을 행사한 사실이 입증되거나, 살해한 사람에 대해서는 (부모가 경제적으로 무력한 상태이고 자녀에게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 그 자녀에게 부과되는 부모에 대한 일정한 경제 지원의 의무가 배제된다. 또한 배우자 사망시 자동적으로 이전되던 연금 수여의 대상에서도, 가족에게 남겨진 재산 상속에서도 제외되게 하는 법안이다.  
   
어이없는 대통령의 행동으로 다시 절벽 아래로
 

개각후 첫 국무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제랄드 다르마냉 프랑스 신임 내무장관. 2020.7.7 ⓒ 연합뉴스

 
여전히 프랑스에서는 연간 20만 명에 이르는 여성들이 남편이나 애인 혹은 헤어진 연인의 폭력에 시달린다. 그중 10%만이 신고하며 149명(2019)은 사망에 이른다. 코로나19의 창궐로 2개월간 이동이 제한되었을 때에도 집안에 갇힌 커플 사이에 증가한 폭력은 가장 먼저 세상의 고요를 뚫고 삐져나온 비명이었다. 

법정에서, 거리에서, 숱한 열정들이 힘겹게 밀어올려 구축한 여성의 권리, 그것을 약속해주는 법적 장치들은 강간 혐의로 조사를 받는 자(제랄드 다르마냉)를 내무부 장관에 임명하는 어이없는 대통령의 행동으로 다시 한 번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성범죄 수사 대상자를 수사기관의 수장으로 임명하는 마크롱은 같은 입으로 여성해방의 위대한 투사의 죽음을 추모하고, 학교에서 성평등 교육을 의무화 한다고 말한다. 부조리와 희비극이 범벅된 현실은 불평등과 싸워온 사람들이 언제나 딛고 있던 땅의 모습이었다. 하늘의 절반을 머리에 이고, 땅의 절반을 딛고 서 있는 여성들은 또 다시 희망의 돌을 함께 굴릴 것이다. 그 불평등의 돌덩이에 깔려 신음하는 사람이 사라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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