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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나는 12년을 함께했던 친구 A와 작별했다. 우린 동갑에, 비슷한 또래의 아이 둘을 키우고 있었고 취미도 관심사도 비슷했다. 그때 A와 나는 이틀 이상을 떨어져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단짝이었다. 여러 친구와 함께 어울리다 보니 자잘한 갈등은 생기기 마련, 이런저런 일이 생길 때도 A와 난 서로 속마음을 너무 잘 아는 터라 오해 따위는 생길 틈이 없었다.

그런 A가 어느 날부터인지 친구들 앞에서 날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있지도 않은 일을 사실인 양 주장하며 나를 비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내가 생각해낸 이유란 고작, 그즈음 내가 다른 친구랑 더 친하게 지낸 것밖에 없었다. 그렇다 쳐도 A는 내가 납득할 수준을 넘어가고 있었다. 도대체 애가 왜 이러는 거지? 안 그래도 위장병을 달고 살던 나는 몇 차례 지독한 위경련을 앓았다. 12년의 세월은 어찌나 힘이 세던지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나졌다.

직설적인 충고를 고깝게 듣지 않거나, 너나 잘하세요라고 속으로 말하지 않는 관계는 보이는 것보다 단단한 기반이 있다. 마치 겉은 조그맣게 보이지만 그 밑에는 어마어마한 덩어리가 있는 빙하처럼.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빙하도 기온이 겨우 1도만 높아져도 균열이 생기고 녹아 무너진다. 나의 얄팍한 마음은 A의 차가워진 1도에 민감하게 무너졌다. 단단한 기반도 시절 따라 흐르는 것임을 몰랐다.

서운함과 괘씸함이 사라지고 난 후

A와 갈등을 겪으면서 밤이면 난 '우리'에 대해 여러 차례 글을 썼다. 객관화해서 상황을 봐야 뭐가 문제였는지 알 수 있을 테니까. 생각할수록 서운하고 괘씸한 마음이 소용돌이쳤다. 명백히 난 피해자였다. 아니 피해자라고 착각했었다. 나는 A를 비난하지도,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서 하지도 않았으니까.

하지만 내가 크게 간과한 사실은 A가 내게 왜 그랬는지 A의 심리를 보려 하지 않았다는 것, A가 뿜어내는 불편한 에너지와 그 행동 결과에만 초점을 맞춰 혼자 시나리오를 썼다는 점, 또 A의 그런 행동에 대해 나도 복수하듯이 은근히 무시하고 A를 그림자 취급을 했다는 것이다. 내 행동은 그럴만하다고 축소했고 A의 행동은 친구라면 해서는 안 될 일로 무럭무럭 마음속에서 키웠다. A가 낸 작은 상처는 내 안에서 중병이 되었다. 입으로만 친구, 친구 하면서 나 또한 비루하기 그지없었던 셈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나의 에너지를 뺏어가는 뱀파이어들은 멀리해야 한다고. 그 무렵 A와 함께 있으면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치르느라 기가 빨려서 집에 돌아오면 기진맥진해지는 나를 보았다. 그래서 멀어졌다.

호동왕자와 헤어진 낙랑공주도 아닌데, 이 이별은 몇 년 동안 가슴에 얹혀 내려가질 않았다. 마치 가슴 아프게 헤어진 연인처럼 김수완 무 거북이와 두루미를 아무리 외쳐봐도 다시 A 생각으로 돌아왔다. 그 무렵 A는 만나서 풀고 싶음을 내비쳤는데, 난 보란 듯이 냉정히 뿌리쳤다. 아마 '너도 한번 당해 봐라' 하는 심보였던 것 같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서운함과 괘씸함은 사라지고 좋았던 기억이 더 많이 떠올랐다. 고등학생이었던 내 아들이 문제가 생겼을 때 자기 일처럼 속상해하고 나를 위로해주었던 일, 남편과 '사네 못 사네' 하며 친정으로 짐을 싸서 내려갔다가 아이들 때문에 집으로 돌아와야 했던 날, 터미널에서 날 기다린 A는 버스에서 내리는 내 손을 잡고 기분을 풀어주겠다며 근사한 식당에 데리고 가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돌아보니 그게 두고두고 고맙고 미안했다. 그래서 나는 A와 내가 같이 알고 지내는 친구 B에게 그의 근황을 물어보며 만나서 마음을 풀고 싶음을 전했다. 헤어지고 삼 년쯤 지나서였다. A는 인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냐며 그럴 마음이 없음을 알려왔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지만, 오히려 속은 편해졌다. 그동안 부대꼈을 A를 생각하니 내 쪽에서 손을 다시 내민 게 A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기를 바랐다. A에게 난 어떻게 기억되고 있을지 모른다. 내가 완전 피해자라고 착각했던 망상에서 깨어나 보니 소중한 친구 하나를 잃어버린 사실만 덩그러니 남았다.
 
내가 힘들었다는 너에게
 내가 힘들었다는 너에게
ⓒ 웅진 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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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실하지 못했다

이 사건이 인제 와서 다시 내게 소환된 이유가 있다. 얼마 전에 나온 책 <내가 힘들었다는 너에게>란 책 때문이다. 이 책의 프롤로그 첫 줄에는 "언젠가 내가 좋아하고 아끼던 이에게 사실 그동안 나 때문에 힘들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때, 내 존재 밑바닥에서 뭔가 쩍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라고 적혀 있다. 그때 내가 그랬다. 내 존재 밑바닥에서 뭔가 쩍하고 갈라지는 느낌, 그것은 혼란이고 아픔이었다.

잠시 기분 나쁜 그까짓게 뭐라고. 기분이라는 게 나빠지기도 좋아지기도 하는 것일 뿐인데 나는 그 요동치는 기분에 져버렸고, 그 때문에 소중한 친구를 잃어버렸다. 오히려 그때, 당장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 말고 조금 거리를 두고 지냈더라면 어땠을까.

내가 A를 친구로서 덜 사랑했더라면 아무 일도 아니었을 일일 뿐인 건데, 내 강박적인 마음 때문에 완벽한 관계에 관한 단단한 환상을 가졌었다. 흔들리기도 하고 다시 제자리로 가기도 하고, 흘러가고 흘려보내는 유연함이 없었다. 이 책의 저자도 베프와 헤어진 기억이 있다. 물론 나와 상황은 다르지만.
 
"우리는 얽히고설킨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잘못과 실수, 오해 속에서 떠나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 내 쪽에서 거리를 두기도 하고 멀어지는 걸 일부러 허용할 때도 있다. 그러나 꼭 지키고 싶은 관계, 지켜지는 관계는 있기 마련이다. 바로 신의를 깨지 않도록 '서로' 성실히 노력하는 관계다." (62쪽)
 
아마 우리는 그때 관계 유지를 위해 더는 성실하지 않았다. 누구의 일방적인 탓이 아니라 서로에게 노력하지 않았다. 이 책에서 나를 진정 오열에 빠트린 장면은 따로 있다. '서툰 하트'라는 제목의 글로 '죽을 때 가져가고 싶은 소중한 기억'에 관한 글이다. 기차에 탄 저자는 기차 밖에서 안을 응시하는 백발의 할머니를 발견한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중년의 여인이 있었다. 무슨 관계인지 모르나 기차가 출발하자,
 
"그러자 백발 할머니가 좀 쭈뼛하더니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리신다. 첨엔 뭐 하시는 건가 했는데 가만히 보니 하트였다. 자세히 봐야 알 수 있는 수줍고 서툰 하트, 나도 모르게 중년 여성 쪽을 봤다. 그녀는 목을 있는 힘껏 빼서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있었다. 당신 마음을 다 안다는 듯이. 나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주책없이 목이 메어와 공연히 헛기침을 하며 속으로 애먼 하트 탓을 했다."
"어쩌자고 저 하트는 저리 처연하고 따뜻하고 예쁜 것이냐, 훔쳐본 사람 감당 안 되게…" (205쪽)
 
미술 관련 서적을 쓴 나는, 음악을 듣던, 책을 읽던 내 머릿속엔 관련한 그림이 떠오른다. 이 책은 프리다 칼로의 그림 같다. 이 책의 저자는 비혼이고 지독한 사랑을 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힘'을 가졌다는 점에서 프리다와 공통점이 있다. 포장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관계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사고하는 힘 말이다.

관계와 태도에 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바람에 거기에 대답하느라 책장이 쉬 넘어가지 않는다. 에피소드 하나하나마다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많은 시간이 흘러버린 지금, 내가 뭔가를 깨달았다고 해서 다시 관계 맺기가 가능하진 않겠지만 책을 읽는 동안 적어도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때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었는지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다.

요즘, 뭔가 관계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끼 같은 책 <내가 힘들었다는 너에게>를 강력 추천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관계, #태도, #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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