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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일부 신문 사설들을 읽다 보면, 대한민국이 뭔가 크게 잘못돼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고는 한다. 사진은 각각 문화일보, 동아일보 갈무리.
 요즘 일부 신문 사설들을 읽다 보면, 대한민국이 뭔가 크게 잘못돼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고는 한다. 사진은 각각 문화일보, 동아일보 갈무리.
ⓒ 문화일보, 동아일보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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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일부 신문 사설들을 읽다 보면, 대한민국이 뭔가 크게 잘못돼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고는 한다. 지금 전개되는 각종 개혁정책이 이 나라를 파국으로 모는 듯한 우려가 생길 정도다.

7월 27일 치 <문화일보> 사설 '실정 반성 않고 세금 폭탄... 나라가 니꺼냐 민성(民聲) 커진다'는, 부동산 개혁을 반대하는 집회가 몇천 명 규모를 유지하는데도 그것이 마치 전 국민의 목소리인 듯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이 사설은 "참다못한 시민들이 삼복더위 속에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나라가 니꺼냐'고 외치는 형국이 됐다"고 한 뒤 "법치와 안보, 에너지 정책 등 국정 전 분야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급등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집값을 잡지 못하는 데 대한 불만의 목소리와 부동산 개혁을 반대하는 불만의 목소리는 엄연히 다르다. 그런데도 일부 사설들은 전자를 후자와 등치시키며 부동산 개혁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는 듯한 논조를 보이고 있다.  

7월 24일 치 <서울경제> '촛불집회 불러오는 촛불정부의 정책 헛바퀴' 같은 사설들은 부동산 개혁 반대 집회를 '촛불집회'로 명명하기까지 했다. 무조건 촛불을 든다고 촛불집회가 아니라, 2016년 촛불혁명 정신과 맞닿은 게 촛불집회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맞불집회로 불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일부 사설들은 대규모 부동산 보유자들 이익을 추구하는 집회에 대해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일본제철에 대한 강제징용 판결과 이에 따른 압류재산 현금화 문제를 놓고도 위기감을 조장하는 사설들이 있다. 8월 3일 치 <동아일보> 사설 '절차상 가능해진 일(日) 징용기업 자산 현금화... 파국 방관할 건가'는 제목에서부터 '파국'을 운운한 뒤, 본문에서는 "앞으로 자산 매각이 실행되면 대립과 갈등은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말로 겁을 준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한일관계 재정립을 위한 진통을 파국적 상황으로 과대포장하고 있다.
    
7월 30일 치 <헤럴드경제> 사설 '견제와 균형 실종된 혼돈의 대한민국...정상이 아니다'는 "누가 봐도 이건 정상적인 나라의 모습이 아니다"라고 한 뒤 감사원장의 중립성과 관련된 더불어민주당의 문제 제기를 놓고 "민주당의 감사원장에 대한 노골적 흔들기는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나 마찬가지다"라고 평가한 뒤 이렇게 촉구했다.

"이 혼돈의 상황을 정리하고 나라의 모습을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수렁이 더 깊어지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만 초래하게 된다."

최근의 사설들은 이 외에 주한미군 감축 가능성, 검찰 문제, 남북관계 등과 관련해서도 대한민국이 조만간 어떻게 될 것 같은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   대한민국이 조용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개혁이 가속화되는 상황에서는 거의 언제나 일어나는 현상이다. 개혁에 대한 저항에 아랑곳하지 않고 개혁의 강도를 높이다 보면 이런 '아우성'들이 나오기 마련이다.

이 점은 한국사 교과서에 거론되는 고려시대 최승로의 '시무 28조'에서도 느낄 수 있다. 당시 기득권층도 최근의 신문 사설 못지않은 엄살과 과대포장을 남발했다. 그래서 그 시대에도 '개혁 드라이브'에 대한 불안감이 적지 않게 조장됐다.

위기론 띄우는 일부 언론... 최승로가 떠오른다

고려 초기 인물인 최승로는 신라 6두품 귀족을 계승하는 실무형 관료로서, 당시 지배층인 호족들 이익을 대변했던 것으로 보인다. 호족은 외형상으로는 귀족과 유사하지만, 지방에서 확보한 독자 세력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귀족과 달랐다.

귀족은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공인된 서열 질서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이들 역시 독자 세력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이들의 권위는 그런 것보다는 군주가 부여하는 작위에 훨씬 더 의존했다. 반면, 독자 세력을 발판으로 하는 호족은 공인된 서열 질서에 대한 의존도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호족들이 독자 세력을 형성한 시기는 신라 말기에서 후삼국을 거쳐 고려 초반에 이르는 때였다. 이 시기에 호족들은 노비 및 토지에 대한 권리를 바탕으로 지배권을 행사했고 6두품 출신의 상당수 관료는 실무 담당자로서 그들과 제휴했다.

최승로도 그런 인물 중 하나였다. 982년에 그가 광종의 차차기 임금이자 조카인 성종에게 '시무 28조'라는 의견 개진서를 올린 것은 광종의 반(反)호족 정책을 비판함으로써 성종을 '옳은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태조 왕건의 아들인 광종은 호족들을 겨냥해 개혁정책을 시행했다. 지방 할거(割據: 땅을 나누어 차지하고 굳게 지킴-편집자 주) 양상을 보이는 호족들이 득세하면 왕권이 약해질 수밖에 없으므로, 광종은 그 일에 왕실의 명운을 걸었다. 왕권이 강해지고 호족이 약해지면 호족의 지배를 받는 서민층이 숨통을 트게 되므로, 광종의 개혁은 왕실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도 유리했다.

24세 때인 949년 즉위한 광종은 26년간 임금 생활을 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긴 호흡을 갖고 개혁 전략을 수립했다. 장기적 전략을 세운 뒤 단계적이고 치밀한 방식으로 개혁을 진행했다. 임기가 4~5년으로 국한되는 오늘날 대통령들은 일반적으로 임기 1년 이내에 개혁에 착수하지만, 광종은 그럴 필요가 없으므로 청년이 인생을 설계하듯 개혁을 장기적으로 설계했다.

그는 처음 7년간은 개혁과 무관한 듯이 행동했다. 호족들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이 기간에 그는 호족들이 부와 권력을 늘릴 수 있도록 배려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이때는 평가가 매우 좋았다. 호족들로부터 '좋은 왕이 나왔다'는 칭찬이 자자했다.

요즘에는 일반 국민들 의견이 국정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지만, 이 당시에는 주로 특권층과 지식인의 의견만 영향을 미쳤다. 광종이 집권 8년차 이전까지는 특권층 이익을 증진시켰으니 그가 특권층과 지식인들로부터 호평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최승로는 '시무 28조'에서 이렇게 말한다.
 
"즉위한 해부터 8년간 정치와 교화가 맑고 투명했으며, 형벌과 포상이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8년 차까지의 국정 운영을 '맑고 투명한 정치'로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이 평가는 그 뒤부터 바뀐다. 광종이 개혁의 의지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호족들 말로 표현하면, 이때부터 광종이 '검은 속내'를 드러냈던 것이다.

집권 8년 차인 956년, 광종은 '노비안검법'이라는 유명한 개혁을 단행했다. 호족들 노동력이 될 수도 있고 사병이 될 수도 있는 노비 상당수를 양인(자유인)으로 전환하는 조치였다. 호족의 강압에 못 이겨 노비가 된 양인들을 구제한다는 명분에 따라 착수한 일이다.

노비가 양인으로 전환되면 국가의 조세수입과 병력 자원이 증가한다. 그래서 노비안검법은 국가재정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는 노비가 재산으로 간주되던 때였으므로, 호족들이 볼 때 노비안검법은 '사유재산권 침해'였다. 호족들의 미움을 살 수밖에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1일 서울 여의도에서 617규제소급적용 피해자모임, 임대사업자협회 추인위원회 등 부동산 관련단체 회원들이 정부의 부동산 규제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임대차 3법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0.8.1
 지난1일 서울 여의도에서 617규제소급적용 피해자모임, 임대사업자협회 추인위원회 등 부동산 관련단체 회원들이 정부의 부동산 규제에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임대차 3법 반대 등의 구호를 외치고 있다. 2020.8.1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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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은 집권 10년 차(958년)에는 과거제도를 시행했다. 호족 자제들을 특채하지 않고 서민층이나 지식인 중 실력자들을 관료로 선발하기 위해서였다. 호족들의 정부 장악력을 떨어트리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로 호족의 힘을 순차적으로 빼놓은 광종은 집권 12년 차(960년)부터 진짜 '본색'을 드러냈다. 호족들의 목에 칼을 겨누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 중의 불평분자들을 역모죄로 몰아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호족들을 옹호해주던 처음 7년간 모습은 간데없고 범 같은 개혁 군주만 남았던 것이다.

이 시기의 광종에 대한 '시무 28조'의 평판은 가혹하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다"고 이 시기 광종의 정치를 평가한다. 최승로는 광종이 나이 50세에 세상을 떠난 것도 그것과 무관치 않다는 식으로 평을 했다.

최승로는 왜 혹평했나

최승로는 "즉위 초기처럼 정치를 부지런히 했다면 어찌 그 수명이 길지 못해 겨우 50세만 누리셨겠습니까?"라며 막말에 가까운 발언을 했다. 광종이 죽었을 때 호족들이 뒤에서 뭐라고 수군댔을지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그런 뒤 최승로는 광종의 정치로 인해 나라가 난폭해지고 문란해졌노라고 개탄했다.
 
"경신년(960)에서 을해년(975)까지의 16년간은 간흉들이 앞 다퉈 진출해 참소가 크게 일어나니, 군자는 몸 둘 곳이 없고 소인만이 제 뜻대로 하게 되고, 마침내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고 종이 주인을 고소하기까지 하여 상하가 마음이 갈라지고 신하들은 해이해져, 옛 신하들과 노련한 장수들이 차례로 죽임을 당하고 골육·인척도 모두 멸망했습니다."
 
노비들이 노비안검법에 힘입어 호족에서 벗어나는 모습을 '종이 주인을 고소'하는 상황으로 묘사하고 이것을 '자식이 부모를 거역'하는 불효에 빗댔다. 양인의 권익을 찾아주고 호족의 부당이익을 제거하는 개혁을 그는 도덕·윤리의 실종으로 평가했던 것이다. 이처럼 광종의 치세를 혹평한 뒤 최승로는 이렇게 탄식했다.
 
"아, 어찌하여 처음에는 잘하여 일찌감치 좋은 명성을 얻어놓고, 뒤에 잘못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매우 원통합니다."
 
광종의 개혁으로 대중 생활과 국가 재정이 건전해지고 호족들의 부당한 지배력이 감소했다. 광종의 개혁이 고려를 옳은 방향으로 이끌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시무 28조'를 읽다 보면 광종 시대가 파국 직전 혼돈기였던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런 파국과 혼돈은 발생하지 않았다. 광종 사후에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시무 28조는 상황을 왜곡하고 과대포장했을 뿐이었다.

요즘의 신문 사설을 읽노라면, '현대판 최승로들'이 남발하는 시무 28조를 보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다. 다소 진통이 있을 뿐 개혁의 방향이 분명히 옳은데도, 최근 일부 사설들은 대한민국이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는 듯한 위기감을 조장하는 데 분주하다. '픽션(소설) 쓰시네'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하면 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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