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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7월 31일 대한제국의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 '군대 해산은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멸망을 뜻하는 비극적인 사건이었다(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일제는 1905년 11월 17일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한 뒤 1906년 2월 통감부를 설치했다. 이토의 통감부는 식민 통치 준비 기구로서 총독부가 설치되는 1910년 8월까지 4년 6개월 동안 한국의 국정 전반을 장악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사실상 주권 상실 상태가 되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을사늑약의 부당성 알리려고 헤이크 특사 파견

그런 와중에 '헤이그(Hague) 특사 사건'이 일어났다. 고종은 을사늑약이 자신의 인정 없이 강제·불법 체결되었다는 사실을 국제 사회에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을 정사, 이준과 이위종을 부사로 하는 특사단을 파견했다.

김창수 저 <항일 의열 투쟁사>에 따르면 이들은 1907년 6월 29일 헤이그에 도착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와, 시기적으로 세계 각국이 한일 협약을 승인한 뒤라는 점 때문에 외교권 없는 대한제국 대표 자격으로는 평화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세 사람은 3인 연명으로 작성한 호소문을 써서 평화회의 의장에게 전달하기도 하고, 각국 대표들을 찾아다니며 설득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1. 일본인은 우리 황제의 동의 없이 마음대로 모든 정사를 시행한다.
1. 일본인은 무력을 가지고 우리 한국 정부에 반대한다.
1. 일본은 한국의 일체 법률과 풍속을 파괴한다.


그렇게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평화회의에 참석하고 또 발언하는 기회는 결국 얻을 수 없었다. 이에 7월 14일 이준이 현지에서 분사(憤死)하여 공원묘지에 묻히는 사태가 발생했다.

일제, 헤이그 특사 파견 책임 물어 고종 강제 퇴위

일제는 책임을 묻는다면서 7월 20일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또 일제는 이 사건을 이용해 '한일 신협약'(일명 '정미 7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한국을 강점하기 위한 예비 조치를 취했다.

일제는 순종 즉위 4일 후인 7월 24일 전격적으로 한일신협약 원안을 이완용 내각에 제시했다. 대한제국의 국권을 일제가 완전히 장악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한국 정부는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을 하기 전에 통감의 승인을 거쳐야 한다. 고등 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고용해야 한다. (등)
 
 
이완용 내각은 즉시 각의를 열어 일본측 원안을 그대로 채택했다. 이완용은 순종의 재가를 얻은 뒤 당일 밤 이토를 찾아가 신협약을 체결, 조인했다. 그런데 신협약에는 공개되지 않은 시행규칙이 붙어 있었다.
 
한국 군대 해산
사법권 위임
일본인 차관 채용 (등)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군대 해산이었다. 일제는 '정예한 새 군대를 양성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현 군대를 정리한다.'는 구실을 달았다.

본연의 임무를 찾기 시작한 한국 군대

그 동안 대한제국의 군대는 국권과 국토 수호라는 국군 본연의 소임보다 의병 진압 등 오히려 매국적 폭력 집단 역할을 수행해 왔었다. 한국 군대에 애국 의식이 싹튼 것은 을사늑약 이후부터였다. 전국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과 교전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서 잠재되어 있던 한민족으로서의 자의식이 살아난 것이었다.

대한제국 군대의 부활은 1907년 7월 19일 고종 퇴위를 반대하는 군중 시위 때부터 진가를 발휘했다. 전동 병영을 뛰쳐나온 제 1연대 제 3대대 소속 100여 무장 군인들은 시위 군중과 함께 종로경찰파출소를 습격하여 다수의 일본 경찰과 10여 명의 일본 상인들을 살상했다.

일본은 곧장 본국 제 12여단의 전투부대를 대구와 평양 등 주요 지역에 배치하는 한편, 전국에 분산 주둔 중이던 제 13사단을 서울에 집결시켰다. 총기도 6만 정을 추가로 보급받았다. 그렇게 군대를 다시 배치하는 일 외에도 통감부는 한국 군대 해산을 위해 치밀한 계획을 수립, 이행하였다.

일제는 중요 무기와 탄약을 일본군 관할에 두어 한국군의 화력을 사전에 약화시켰고, 무력 저항에 대비해 화약과 탄약고도 사전에 장악했다. 드디어 순종의 군대 해산 조칙(軍隊解散詔勅)이 7월 31일 밤중에 반포되었다.

군대해산식에 불참한 일부 군인들, 일본군 공격 개시

다음날인 8월 1일 동대문 훈련원에서 군대 해산식이 열렸다. 한국군 사병들에게는 도수 교련(徒手敎練)을 한다면서 모두 맨손으로 참석하라는 지시가 하달되었다. 오전 10시 폭우가 퍼붓는 가운데 한국 병사들은 하사관 80원, 1년 이상 근무한 병사 50원, 1년 미만 근무한 병사 25원씩의 이른바 은사금(恩賜金)과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한국군 병사들은 그제야 사태의 본질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무장해제 지경인데다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일본군들에게 이중 삼중으로 포위된 속수무책 상황이었다. 일제는 이같은 기만술을 써서 지방 주둔 진위대로 모두 해산시켰다. 마지막 해산은 9월 3일의 북청 진위대였다.

제 1연대 제1 대대와 제 2연대 제 1대대는 8월 1일 해산식에 불참했다. 무기를 버려둔 채 훈련원으로 향하려던 병사들 앞에 1대대장 박승환 참령(소령)의 자결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박승환 대대장의 자결, 군인들의 봉기 촉구

사실 대대장 이상의 한국군은 군대가 해산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일제는 당일 새벽 대관정(일본군사령관 관저)에 한국군 연대장과 대대장들을 모아 놓고 순종의 '군대 해산 조칙'을 낭독했다.

이어서 군부대신 이병무가 오전 10시에 군대 해산식을 거행할 것인즉 모든 병사들을 무장 해제시켜 훈련원으로 집합시키라는 지시를 내렸다. 한국군 연대장과 대대장들은 비분강개했지만 황제의 칙령을 받들지 않을 수도 없고, 일본군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상황이라 하릴없이 병영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박승환은 대관정의 모임에 중대장 김재흡을 대리로 보냈었다. 김재흡이 돌아와 군대해산의 명을 전달했다. 박승환은 "군인은 나라를 경비하는 것이 본연의 임무인데 외국 군대가 침략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군대를 해산하니 이는 황제의 뜻이 아니다. 적신이 황명을 위조한 것이 분명하니 내 비록 죽을지언정 명을 받을 수 없다!"면서 유서를 쓴 후 "대한제국만세!"를 외치고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軍不能守國)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였으니(臣不能盡忠), 만 번 죽은들 무엇이 아깝겠는가(萬死無惜)!"
 
박승환(국가보훈처 누리집 독립유공자 공훈록 게시 사진)
 박승환(국가보훈처 누리집 독립유공자 공훈록 게시 사진)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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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대장의 유서 앞에서 병사들은 가슴이 탔고 눈물이 쏟아졌다. 제 2연대 제 1대대 부위(중위) 오의선이 뒤따라 자결하고, 그 외에도 여러 장병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박승환 대대장의 자결 총성은 부하 장병들에게 봉기를 호소한 것이었다.(국가보훈처 누리집 독립유공자 공훈록 <박승환>)'

대대장 박승환과 여러 장졸들의 자진 순국 사실이 전해지자 군인들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병사들은 일제히 무기고를 부수어 총을 꺼내들고 봉기하였다. 군대 해산식이 진행되는 중에 제 1연대 제 1대대 장병들이 일본군을 공격했다. 제 2연대 제 1대대 장병들도 동참했다. 일본군은 기관포로 무장한 제 51연대 소속 3개 대대 병력이 투입되었다.

숭례문에 기관총 설치한 일본군, 한국군 향해 난사

일본군은 숭례문 위에 기관총을 설치한 뒤 한국군을 향해 난사했다. 숭례문 주변은 치열한 총격전 싸움터가 되었다. 이 와중에 가지하라(梶原) 대위가 한국군에 사살되었다. 가지하라는 러일전쟁 때 19명을 사살하여 이름을 날린 자였다. 하지만 4시간에 걸친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 42명을 사살했지만 한국군도 17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60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결국 한국군은 화력 열세와 탄환 부족을 실감한 채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일본군은 인근에 보이는 한국인 민간인과 무기가 없는 군인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일에 일본군이 기관총을 설치하여 한국군을 향해 난사했던 숭례문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일에 일본군이 기관총을 설치하여 한국군을 향해 난사했던 숭례문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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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의 대일 전투는 군대 해산일 하루에 머문 전투였지만 '의병 투쟁을 전국적인 의병 전쟁으로까지 확대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는 이후 독립군으로 계승되어 무장 독립 전쟁의 밑거름이 되었다.(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컬렉션)'

전국 각지 진위대 해산군의 참가로 의병 활동 지역이 온 나라로 크게 확대되었다. 하급 병사 출신의 의병장이 종래의 유생 의병장과 교체됨으로써 의병 부대의 성격도 변하였다. 또 해산 군인의 작전 지휘는 의병의 전투 기술을 향상시켜 일본군에 큰 타격을 주게 되었다. 군대 해산 이후 군인들의 의병 참가는 본격적인 항일 무장 투쟁의 시발이었던 것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누군가는 친일파가 되고, 누군가는 목숨바쳐 독립운동하고

누군가는 친일파가 되어 일신상의 부귀영화를 도모하고,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가며 외세에 맞서 싸우는 것이 인간세상의 진면목이다. 모두가 다 의롭고 선하다면 그곳은 이미 평범한 인간들이 뒤섞여 사는 속세가 아닐 터이다.

<효경>은 "옳지 않은 말은 하지 말고(非法不言),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非道不行)"고 했다. 효경에 이런 가르침이 나오는 것은 인간들이 흔히 법에 어긋난 말을 내뱉고 비행을 일삼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올바르게 인생을 마칠 수 있을까?

신독(愼獨)이 답일 듯 여겨진다. <대학>에 나오는 이 말은 홀로 있을 때에도 언행을 삼가라는 뜻이다.

태그:#박승환, #군대해산, #의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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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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