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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부동 전적 기념비
 다부동 전적 기념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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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3일, 6·25전쟁 기간 중 가장 치열했던 혈투로 평가받는 다부동 전투가 시작되었다. 70년 전의 일이다. 탱크 형상의 '다부동 지구 전적비' 가까이에 있는 청록파 시인 조지훈의 〈다부원에서〉 시비를 들여다본다. 
 
일찍이 한 하늘 아래 목숨받아
움직이던 생령(生靈)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바람에 오히려
간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다부원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다부원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함께
안주(安住)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시비가 건립되어 있는 지점은 대구광역시 북구 읍내동 쪽에서 경북 칠곡군 왜관읍 방향으로 넘어가는 고개 들머리이다. 시비 일대는 일찍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소중한 생명으로 태어났던 청년들이 이곳에서 허망하게 죽어, 지금은 싸늘한 가을바람에 간고등어 냄새를 풍기는 시체로 버려진 유학산 자락이다.

이곳 일대가 대단한 전쟁터였으리라는 사실은 지명으로도 충분히 짐작이 된다. 낙동강을 건넌 후 유학산을 넘으면 바로 대구광역시로 진입한다. 안동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충청도 조치원, 경기도 장호원, 경상도 도리원처럼 출장 중인 조선 시대 관리들이 묵는 원이 설치되어 있었고, 시인도 지금 다부원이라는 옛이름을 쓰고 있다.

본래 교통요지, 전쟁 중엔 군대의 중요 이동로

1950년에도 마찬가지였다. 7월 20일 김일성은 수안보에 와서 "8월 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다급해진 북한군 수뇌부는 8월 1일 진주-김천-점촌-안동-영덕으로 이어지는 공격선에 따라 군대를 배치했다. 북한군 전선 사령부는 수안보, 1군단 사령부는 김천, 2군단 사령부는 안동에 진을 쳤다.

북한군의 절반이 대구를 바라보면서, 즉 유학산 다부동을 향해 전진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미군은 시간을 벌기 위해 8월 3일 왜관 철교의 중감 부분을 폭파했다. 그러나 북한군은 8월 5일 끝내 낙동강을 넘었다. 당시 북한군은 2만1500여 명에 670문의 화기를 보유하고 있었고, 아군은 학도병 500명을 포함해 7600여 명에 화기 172문뿐이었다.

그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다부동 전적 기념관이 나눠주는 소형 홍보물은 "8월 13일부터 12일간 정상 주인이 15번이나 바뀌는 328고지(포남리) 전투와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내었던 837고지(학산리) 탈환전 등 55일간 전투가 계속된 다부동 전투는 6·25 전쟁 중에서 최대의 격전지였으며, 이 전투에서 적은 1만7500여 명의 사상자가 났고 아군도 1만여 명 희생되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북한군 2만1000명 중 83%인 1만7500명이 죽고, 아군도 8200명 가운데 1만여 명이 전사했다는 내용이다. 아군의 참전자보다 전사자가 더 많은 것을 보면 아마 전투 개시된 이래 지원군이 더 도착했던 듯하다. 아무튼 피아를 막론하고 어마어마한 청년들이 이곳에서 생명을 잃었다. 그래서 조지훈은 다부동을 우리나라 청년들이 '간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곳이라고 개탄한 것이다.

북한군 2만1000명 중 83%인 1만7500명 전사

이뿐이 아니었다. 8월 16일 낙동강 일대에 북한군이 운집하자 미군은 이곳저곳 가리지 않고 무차별 융단 폭격을 퍼부었다. '왜관 지구 전적 기념관'이 서양인 관광객들에게 나눠주는 소형 홍보물에는 'This bombing was recorded as the most enormous one since the World War Ⅱ'라고 표현되어 있다. 이 날 폭격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최대 규모의 폭격이라는 뜻이다. 다음은 소형 홍보물 중 일부 내용이다.
 
8월 16일 4만여 명의 인민군 병력이 왜관 지역 낙동강 서북방 일대에 집결 중이라는 첩보에 따라 오전 11시58분부터 26분간 B29 폭격기 98대가 출격해 폭탄 960톤을 왜관 서북방 67.2㎢ 일대에 융단폭격을 가해 적진을 초토화시켰다.
 
폭탄 960톤을 67.2㎢에 26분 동안 퍼부었다! 960톤과 67.2㎢가 가늠이 되지 않는다. 평범한 일반인의 일상생활에서는 겪을 수 없는 규모이기 때문이다. 생생한 실감을 느끼려면 익히 아는 면적 및 무게와 비교해야 한다.

교실 한 칸이 대략 82.5㎡이고 수류탄 한 개가 보통 0.4~0.9㎏이다. 67.2㎢는 교실 81만4545칸 면적이다. 81만4545칸 교실에 960톤의 폭탄을 집어넣으면 교실마다 1.5~3개의 수류탄을 투탄한 꼴이다.

북한군의 피해는 상상하고도 남는다. 살아남을 수가 없다. 영화 '실미도'의 마지막 부분이 저절로 연상된다. 버스를 탈취하여 서울로 달려가던 대북 침투 공작원들은 수류탄을 버스 안에 던져놓고 그 위에 모두 엎드려 한꺼번에 폭사한다. '융단 폭격'이라는 말이 이곳 왜관 전투에서 처음 만들어졌다는 말이 실감난다. 북한군 4만여 명 중 3만여 명이 이 때 죽었다고 한다. E. 카네티는 "전쟁의 진정한 목표는 살인이며, 그것도 대규모의 살인이다. 적의 시체더미가 목표"라고 했다.

조지훈은 다부동을 '살아있던 사람이 간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고, 죽은 자도 산 자도 편안히 쉴 수 없는 땅'이라고 했다. 이런 곳에서 인간다운 삶을 기약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어나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 전쟁의 참상은 언제나 평화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그 진리를 전쟁을 겪고 나서야 깨닫는 우리 인간의 아둔함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할머니 꽃씨를 받으신다.
방공호 위에
어쩌다 핀
채송화 꽃씨를 받으신다.

호(壕) 안에는
아예 들어오시질 않고
말이 숫제 적어지신
할머니는 그저 노여우시다.

— 진작 죽었더라면
이런 꼴
저런 꼴
다 보지 않았으련만······

박남수 시 〈할머니 꽃씨를 받으시다〉의 일부다. 할머니는 전쟁통에 자식을 잃은 듯하다. 폭격이 있지만 몸을 피해 호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는다. 그저 노여울 뿐이다. 진작 죽었더라면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꼴은 안 보았을 텐데……. 할머니는 그 생각뿐이다.

예로부터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할머니는 포화 가운데서도 예쁘게 피어나는 채송화가 마치 아들 같다. 생명이 이어지고 있으니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의 생명을 이어줄 아들은 죽고 없는데 오늘도 채송화는 소중하게 피고 있구나! 그래서 할머니는 지금도 채송화 꽃씨를 받으시는 것이다.

전쟁터 다부동, 우리는 이곳에서 평화의 소중함 깨달아야

다부동(多富洞)에 가고, 유학산(遊鶴山)에 올라본다. 전쟁의 참상이 남아 있는 공간이려니 싶지만 이름 그대로 학(鶴)이 노니는(遊) 명산이요, 풍요(富)가 넘치는(多) 전원 마을이다. 모든 생명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평화를 만끽하고 있다. 포화는 자취도 없이 모두 사라졌고, 하늘은 티없이 맑을 뿐이다. 꽃은 제빛을 뽐내며 스스로 아름다움에 취해 있고, 나무들은 서로 어깨를 건 채 다정하게 무성해지고 있다.

이제는 사람도 자연을 닮아야 한다. 생명의 가치를 뼈저리게 깨달아야 한다. 사람이 간고등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채송화 꽃씨를 심으며 살아야 한다. 다부동은 그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태그:#다부동, #조지훈, #유학산, #육이오, #박남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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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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