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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9월 17일 열린 제6차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폐원식 기념 사진
 1919년 9월 17일 열린 제6차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폐원식 기념 사진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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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헌장(헌법)은 이시영ㆍ조소앙ㆍ신익희ㆍ남형우 4인위원회가 기초하여 1919년 4월 11일 임시의정원에서 심의를 거쳐 채택된 전문과 10개조로 된 간략한 내용이었다.

일제병탄 9년 만에 국체와 정체를 민주공화제로 하고, 구대한제국의 복구가 아니라 민주공화제의 새나라 건국을 내외에 천명한 것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이시영은 대한제국 정부의 관직에서 물러난 후 동서양의 법률공부를 하여 근대적 법률에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되고, 임시정부 헌법을 비롯 각종 법규제정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놀라운 사실은 일제와 싸우는 전시체제의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차를 통치함"(제2조) 이라고 규정하여, 권력분립체제를 분명히 한 대목이다. 실제로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이 국정운영의 최고정책결정 기관이 되었다. 
 
헌법은 남녀귀천ㆍ빈부계급이 없는 일체 평등을 명기하고 (제3조), 신교ㆍ언론ㆍ거주이전ㆍ신체ㆍ소유의 자유 (제4조), 선거권과 피선거권 보장 (제5조), 교육ㆍ납세ㆍ병역의무 (제6조), 인류의 문화 및 평화에 공헌과 국제연맹가입 (제7조), 구황실 우대 (제8조), 생명형ㆍ신체형ㆍ공창제 폐지 (제9조) 등의 조항을 설치하였다.
 
주목할 사실은 제10조에서 "임시정부는 국토회복 후 만 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함"이라고 하여, 광복 뒤에는 지체하지 않고 국민의 뜻에 따라 국회를 소집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비록 10개 조항에 불과한 임시정부의 임시헌법이지만 근대 민주공화제 헌법의 기본적인 내용은 거의 포함하고 있다. 1919년 봄 상하이에 모인 망명 지사들은 이렇게 민주적인 신념으로 우리나라의 국체의 근간을 민주공화제로 만들었다.
 
임시정부의 지도자들은 구황실의 예우문제와 같은 봉건적인 잔재가 없지는 않았으나, 헌법을 민주공화제로 만들고 정부형태는 의원내각제와 대통령중심제의 절충식을 채택하였다.

임시정부는 1919년의 제1차 개헌, 1925년의 제2차 개헌, 1929년 제3차 개헌, 1940년의 제4차 개헌, 1944년의 제5차 개헌 등 다섯 차례에 걸친 개헌과정에서 민주공화주의의 기본을 유지하였다. 임시정부가 채택한 공화제의 자유주의 이념은 8ㆍ15해방이 될 때까지 지속되고, 신생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으로 이어졌다.
  
우당 기념관 전시관 사진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주로 활동한 이회영의 동생 이시영 사진들. 백범 김구와 찍은 사진도 있다.
▲ 우당 기념관 전시관 사진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주로 활동한 이회영의 동생 이시영 사진들. 백범 김구와 찍은 사진도 있다.
ⓒ 홍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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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영은 일부 의정원의원들의 복벽주의론에 맞서 민주공화제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신민회의 활동과 공화주의자인 형 이회영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의정원 의원의 임기를 2년으로 하고 매년 3분의 1의석을 개선케 하면서 새로운 충원을 통해 민의를 받아들이고 법통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초기에는 대통령과 국무총리에 대한 임기규정이 마련되지 않아서 혼란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한국을 당분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에 둘 것을 청원한 사실과, 이동휘 국무총리가 임시정부와 상의없이 일방적으로 소련 레닌에게 독립운동 원조를 교섭하고 측근이 받아온 자금을 측근이 일방적으로 사용하여 임시정부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1927년 3차 개헌에서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를 채택하였다. 대통령제의 1인 체제에서 집단지도체제로 바꾼 것은 이승만과 이동휘가 물러나고 지도부의 공백 상태에서 다수 인사들의 참여를 통해 화합형 정부를 만들고자 하는 고뇌의 산물이었다.
 
임시정부 의정원은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 약헌(헌법)을 공포하면서 〈정강〉도 함께 공포하였다.

정강(政綱)

 1. 민족평등ㆍ국가평등 및 인류평등의 대의를 선전함.
 2. 외국인의 생명재산을 보호함.
 3. 일체 정치범을 특사함.
 4. 외국에 대한 권리와 의무는 민국정부와 체결하는 조약에 의함.
 5. 절대 독립을 서도(誓圖)함.
 6. 임시정부의 법령을 위월(違越)하는 자는 적으로 함.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거행한 삼일절 기념행사(1921)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거행한 삼일절 기념행사(1921)
ⓒ 임시정부 충칭 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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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임시정부는 최고 수반인 국무총리 선출을 둘러싸고 심한 논란이 일었다. 내정된 국무총리 후보 이승만의 적격성에 대한 논란이었다. 이회영ㆍ신채호ㆍ박용만 등 무장독립운동계열 인사들이 '위임통치론'을 제기한 이승만을 거세게 비판하고, 의정원에서 이승만이 선출되자 이들은 회의장에서 퇴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외세에 의존하여 절대독립을 방해하는 사람이 새 정부의 수반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을 강하게 폈다.
 
이승만은 상하이로 오지 않고 미국에 머물러 있었다. 한성정부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그 사이 3ㆍ1혁명 이후 여러 곳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통합운동이 전개되었다. 각 정부가 추대한 정부 수반이나 각료가 상호 중복되어 있고 또 국내외 각지에 떨어져 활동하고 있어 미취임 상태로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각각의 임시정부는 기능이 공백상태에 빠져들었고 원활한 활동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단일정부로의 통합이 모색되었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성재 이시영선생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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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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