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28 13:38최종 업데이트 20.07.28 13:38
  • 본문듣기
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편집자말]
비운의 브랜드 '델타(Delta)'는 1982년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인근에서 세 명의 예술가에 의해 탄생한 필기구 제조사입니다. 이탈리아 펜답게 화려한 색감과 섬세한 세공, 시선을 사로잡는 디자인으로 펜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펜 한 자루에 필기구 이상의 가치를 부여하며 숙련된 장인의 손으로 예술작품을 빚듯 만들어 왔습니다만, 새 시대의 격랑을 이겨내지 못하고 안타깝게 2017년 폐업의 수순을 밟습니다.

델타가 문을 닫은 후, 창업자 중 한 명이며 기술 및 생산팀을 이끌던 '시로 마트로네(Ciro Matrone)'가 소수의 숙련공을 모으게 됩니다. 작은 규모지만 그동안 쌓아온 기술과 열정을 다시 되살리고자 했습니다.


이 회사가 바로 '레오나르도 오피시나 이탈리아나(Leonardo Officina Italiana)'입니다. 현재는 아들 '살바토레 마트로네(Salvatore Matrone)'가 맡아 가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회사는 작지만 설계, 생산, 조립 등 모든 공정을 자체적으로 해결한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합니다. 꽃은 물을 먹고 자라지만, 펜은 장인의 예술혼을 통해 태어납니다.

레오나르도의 예술가들은 첫 컬렉션으로 '모멘토 제로(Momento Zero)'를 탄생시켰고, 이탈리아어로 '일 바쵸 델 디아볼로(Il bacio del diavolo)', 해석하면 '데빌즈 키스(Devil's Kiss)'로 풀이되는 기가 막힌 색감의 펜을 뽑아냈습니다.

소수의 이탈리아 숙련공이 만든 펜
 

레오나르도 이탈리아나 오피시나 데빌즈 키스 만년필 F촉 ⓒ 김덕래

 
일반적으로 한정판 만년필은 가격대가 높은 편이지만 적어도 이 펜은 예외입니다.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펜이란 게 단점일 뿐입니다. 만년필의 소장 가치가 만약 색감에 있다면 이 펜은 충분한 자격을 갖춘 셈입니다. 강렬한 이름에 걸맞은 매혹적이면서도 신비로운 컬러감에 절로 탄성이 납니다. 게다가 100자루만 생산된 모델입니다. 같은 한정판이더라도 100자루와 1000자루는 느낌이 다르지요.

흔히 몽블랑, 그라폰, 펠리칸을 위시한 독일 펜들은 딱 떨어지는 마감과 흠잡을 곳 없는 완성도를 매력 포인트로 쳐줍니다. 파카, 워터맨, 쉐퍼와 같은 브랜드는 만년필이란 도구의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여전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또 파이롯트, 세일러, 플래티넘으로 대변되는 일본 3사는 합리적인 가성비와 세필이라는 명확한 특성으로 확실한 마니아층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몬테그라파, 오로라, 비스콘티와 결을 같이하는 이탈리아 펜들은 어딘가 2% 부족해 보이는 내구성이나 끝마무리를 디자인과 색감이 커버해 준다 말할 정도로 외관이 아름답습니다. 이 펜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진으론 절대 표현할 수 없는 색감이 데빌즈 키스의 핵심입니다.

실제 먹어보면 맛도 있고 몸에도 좋은 유익한 음식도 모양새가 꺼림직하면 손이 잘 가지 않습니다. 일단 먹어야 맛 좋은 걸 알 텐데, 입에 대질 않으니 영영 알 수가 없습니다. 물론 비주얼은 그럴듯한데 막상 맛을 보니 별로인 음식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하나의 맛이라 생각하면 그만입니다.

만년필도 음식과 다르지 않습니다. 외관이 내 취향에 맞으면 손에 쥐어보게 됩니다. 나와 잘 맞는 펜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살짝 방향을 틀어 손가락으로 쥐면, 짜릿한 기운이 손안에 가득 퍼집니다. 잉크를 충전하고 펜촉을 종이에 닿게 해 그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펜에서 촉뭉치를 분리하려면, 엄지와 검지로 펜촉과 피드를 쥐고 반시계 방향으로 돌리면 됩니다. 방법 자체는 어렵지 않습니다. 펜촉과 피드를 물고 있는 '콜라(Collar)' 끝 나사산이, 그립 섹션 내부 홈에 밀착하며 고정되는 구조입니다. 하지만 결합할 때 어쩔 수 없이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고, 그 힘이 펜촉을 틀어버리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냉장고 안 딸기쨈통 뚜껑을 꽉 잠그면 그저 열기 힘들어질 뿐이지만, 만년필은 다릅니다. 혹여나 풀릴까 싶어 꽉 잠그는 순간, 필요치를 초과한 2%의 그 힘이 펜촉에 영향을 줍니다. 흔들리지 않을 정도만 살짝 잠가도 문제없는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지나침이 부족함만 못한 순간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빨간 꽃
 

데빌즈 키스 만년필에 장착된 M촉과 교체할 F촉 ⓒ 김덕래


펜을 손볼 때면 늘 수리 후, 잉크를 주입해 시필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어찌 보면 똑같은 과정인데, 참 희한하게도 그때마다 매번 새로운 일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만년필이란 게 다 비슷비슷해 보이지만, 조금만 알고 보면 다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학년 1반 학생 30명이 한 줄로 서 있다 상상해 보세요. 동급생이지만, 얼굴도, 키도, 성향도 다 다릅니다. 만년필도 그렇습니다. 펜수리 자체는 같은 패턴이 반복되는 일련의 작업입니다. 하지만 한 자루 한 자루가 다 달라 지루함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내 손이 닿을수록 조금씩 나아지는 펜을 보는 건, 마치 작은 씨앗에서 싹이 움트는 것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만년필 업체는 보통 펜촉에 화려한 문양을 새깁니다. 멀리서 자동차 그릴만 보여도 어떤 업체가 만든 차인지 알 수 있게끔, 차량 제조사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개성을 담아낸 그릴을 만들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엠블럼만큼이나 중요한 게 차량 전체의 인상을 만들어내는 그릴입니다.

만년필 업체도 같습니다. 캡탑과 클립도 개성을 표현하기 좋은 위치지만, 펜촉만큼은 아닙니다. 레오나르도는 화려한 라인 대신 브랜드명과 로고만 깔끔하게 담았습니다. 마치 신경 쓴 '타이포그래피(Typography)'를 보는 것 같습니다. 글자는 가장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표현 전달 수단입니다. 투수의 직구고, 배구 선수의 스파이크입니다. 간결하고 명확합니다.
 

데빌즈 키스 펜촉 상판 ⓒ 김덕래


이미 장착되어 있는 M촉을 F촉으로 교체하길 원한다는 건, 굵게 나오는 것보다 다소 가늘게 나오는 펜이 필요하단 말로 해석됩니다. 승차감을 약간 포기하더라도, 고속주행이 가능한 쿠페로 갈아타길 희망한다는 뜻입니다.

교체한 F촉의 흐름을 정상 범위 내 딱 표준으로 맞췄습니다. 다소 박할지언정 과하지 않게 세팅했습니다. F촉을 조금 가늘게 조정하면 살짝 굵게 나오는 EF촉과 비슷해지고, 반대로 약간 굵게 조정하면 절제된 M촉과 별 차이가 안 나게 됩니다.

펜을 적당히 손보고, 그저 끊기지 않게 나오긴 하니 적당히 알아서 쓰란 말은 무책임합니다. 사용자의 연령과 성별, 사용 용도와 취향, 필기 스타일에 맞춰 세팅해야 합니다. 그래야 딱 맞는 나만의 맞춤펜이 됩니다. 평생을 함께 할 인생펜이 됩니다. 오늘도 나만의 퀘렌시아(안정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을 뜻하는 스페인어). 한 평 공간 70cm 작업대 위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빨간 꽃이 피었습니다.
 

빨간 꽃 한 송이를 연상시키는 만년필 ⓒ 김덕래


짧은 아날로그 여행을 떠나는 법

시골 부모님 집 거실 한구석은 아담한 실내 화단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여든이 넘은 어머니는 아직도 꽃 가꾸는 재미에 빠져 삽니다. 갖가지 난초와 다양한 빛깔을 뽐내는 향기로운 식물이 가득한데, 그중 붉은 꽃을 피워내는 백일홍이 가장 화려합니다. 100일 동안 붉게 핀다는 말이 무색하리만치 1년 내내 생기롭습니다.

꽃을 키우는 것은 사람이지만, 사람은 그 꽃에 위로를 받습니다. 화초마다 물을 주는 시기가 다 다르고, 주는 방법도 다릅니다. 살짝 흙이 촉촉해질 정도만 물을 줘야 하는 꽃이 있고, 아예 화분째 물에 담갔다 빼는 난초도 있습니다. 화초에 따라 흙도 달라집니다.

물기를 오래 머금고 있어야 할 꽃은 조직이 조밀한 흙을 쓰고, 빨리 물이 흘러야 하는 난초에는 넘어지지만 않게 잡아줄 정도의 가벼운 돌을 쓰기도 합니다. 이처럼 각양각색이지만, 들이는 정성은 같습니다. 날마다 고운 천으로 잎에 내려앉은 먼지를 닦아주고, 수시로 분무기로 물을 뿌려 촉촉한 상태를 유지해 줍니다.

이렇게 화초에 정성을 쏟으면, 그 보상이 돌본 사람에게 온전히 돌아옵니다. 실내 공기를 깨끗하게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고, 집안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듭니다. 꽃을 돌보자면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서서 조금이라도 걷고, 팔을 들어야 하며, 일정한 동작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런 작은 움직임이 모여 사람의 몸을 건강하게 합니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 생김새도 온화하게 다듬어 줍니다. 뾰족한 감정 상태를 뭉툭하게 하고, 날이 선 기세를 무뎌지게 합니다. 꽃 가꾸기는 꽤 근사한 자기 수양의 시간입니다.

만년필도 다르지 않습니다. 가끔 세척해 줘야 하고, 자주 써줘야만 하며, 종종 잉크를 충전해야 하는 만년필은, 요즘 같은 첨단 디지털 시대에 적합하지 않은 구시대 유물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난초의 잎을 닦아주듯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물을 주듯 잉크를 넣어 자주 쓰다 보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만년필이란 도구만이 갖고 있는 맛과 멋에 젖은 자신을 보게 됩니다.

요즘처럼 키보드 자판과 스마트폰 화면 터치하는 것만으로도 불편함 없이 살 수 있는 세상에, 손으로 뭔가를 끄적이는 행위 자체가 군더더기처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0과 1로 이루어진 기계적인 전기신호로 ON/OFF만을 반복하다 보면 우리는 서서히 말라 가게 됩니다. 사람의 발이 땅에 닿아 있어야 힘을 쓸 수 있는 것처럼, 손으로 아무 필기도구라도 쥐고 쓰는 것 자체가 우리의 정서를 촉촉하게 만들어 줍니다.

아날로그는 이어짐이고, '여지(餘地)'입니다. 유연한 사고를 가능케 하고, 흑과 백 사이에 회색이 있음을 알게 합니다. 회색이 아직 검어지지 못한 흑색이 아니고, 밝아지지 않은 백색이 아닌, 그 자체로 충분히 존재감 있는 '하나의 색'이라는 걸 인정하게 합니다.

디지털은 빠르고 정확함으로 온 세상을 사로잡았지만, 이것이 아니면 저것인 것이 당연하다 말합니다. 인류가 디지털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손에 아무 펜이나 한 자루 쥐고, 별 의미 없는 글이나 그림을 끄적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짧은 아날로그 여행을 떠날 수 있습니다.

만년필을 쓰는 사람은 그저 오래된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과시용 장식품이 필요한 사람도 아닙니다. 일상 속 작은 쉼터를 꿈꾸는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한 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저 조금 젖어 있고 싶을 따름입니다.

백일홍을 닮은 만년필 한 자루를 만지다 보니, 시골집 거실에서 화초를 매만지며 행복해 하던 어머니가 떠올랐습니다. 뵈러 가야겠습니다.
 

활짝 핀 백일홍 ⓒ Pixabay


* 레오나르도 오피시나 이탈리아나(Leonardo Officina Italiana)
- 2017년 폐업해 더 이상 새 모델을 볼 수는 없지만, 아직도 많은 필기구 애호가들로부터 사랑받는 '델타(Delta)'의 창업자 중 한 명인 '시로 마트로네(Ciro Matrone)'가 세운 회사. 아웃소싱 없이 모든 공정을 자체 해결한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오랜 세월 숙련된 장인들로 꾸려진 이탈리아 브랜드.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4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