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 그리고 둘

하나 그리고 둘 ⓒ 리틀빅픽처스


당신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만 할 뿐 
한 번은 제자가 불평을 했다. "당신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만 할 뿐, 그것들이 담고 있는 의미에 대해선 말씀해 주지 않으시는군요."
스승이 대답했다. "만일 누군가 너한테 과일을 주면서 너를 위한답시고 모두 입으로 씹어서 준다면 넌 그걸 좋아하겠느냐?"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3>, 잭 캔필드, 마크 빅터 한센 共著 , 류시화 譯, 인빅투스, 2014)

밤새 옆집에서 부부싸움하는 소리가 들린다. 다음날 아침, 어린아이와 아빠는 엘리베이터 앞에서 그 옆집 아줌마를 만난다. 옆집 아줌마는 눈치가 보이는지 까만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아빠는 옆집의 부부 싸움을 알면서도 모른 채 그 옆집 아줌마에게 평소와 같이 인사를 건넨다. 하지만 어린아이는 옆집 아줌마가 괜찮은지 빤히 쳐다본다. 뒷모습만 봐서는 알 수 없기에. 
NJ : 사람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 아냐. 기분 나빠하거든.
양양 : 아줌마가 왜 기분이 안 좋은지 궁금했어요. 뒷모습만 봐서는 알 수 없잖아요.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은 그런 영화다. 어린아이가 나를 빤히 쳐다보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그 시선이 오히려 따스하고 안심이 된다. 타성에 젖은 고정관념, 배려를 가장한 무관심의 통념을 가볍게 날려버린다. 미처 깨닫지 못했기에 신선한 충격이고, 뒤늦게 깨달았기에 묵직한 여운으로 남는다.

대만의 에드워드 양 감독은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만 할 뿐, 그것들이 담고 있는 의미에 대해선 직접적으로 말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등에 대해 미리부터 머리 싸맬 필요는 없다.

영화를 본다기보다 우리네 일상의 또 다른 뒷모습을 보는 느낌이랄까. 머리로 이해하기에 앞서 마음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 현실의 우리네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기에 친근하면서도 미처 깨닫지 못한 진실을 보는 생경함에 3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이 전혀 지루하지 않게 다가온다. 
나는 관객이 그냥 친구를 만났다는 인상을 안고 극장을 나왔으면 한다. 만약 그들이 '감독'을 만났다는 인상을 지니고 나온다면 이 영화는 실패작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 에드워드 양 감독 

게다가 2000년 칸 영화제 감독상 수상이 말해주듯 감독의 섬세하고 탁월한 연출력은 또 다른 관전 포인트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에서 선생님은 이렇게 말한다. "차가운 머리로 새로운 말을 하기보다 뜨거운 혀로 평범한 말을 하는 게 살아 있는 거라고 믿고 있거든. 피의 힘으로 몸이 움직이기 때문이지."

평범한 일상이지만 '뜨거운 혀로 평범한 말'을 하는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에드워드 양 감독은 섬세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그래서 자칫 지루할 수 있는 평범함을 담백하면서도 짙은 여운을 남기는 생경함으로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관객이 그냥 친구를 만났다는 인상을 안고 극장을 나왔으면 하는 감독의 기대는 결코 헛된 욕심이 아니었다. 

우린 절반의 진실밖에 볼 수 없는 건가요? 
 
 하나 그리고 둘

하나 그리고 둘 ⓒ 리틀빅픽처스

 
양양 : 아빠, 각자의 눈에는 보이는 게 서로에게는 안 보이나 봐요. 두 사람 다 보려면 어떡해야 하죠?
NJ : 그건 생각 못 해 봤는데 그래서 카메라가 필요한 거란다. 카메라로 찍어 보렴.
양양 : 우린 절반의 진실밖에 볼 수 없는 건가요? NJ : 무슨 말인지 모르겠구나.
양양 : 앞만 보고 뒤를 못 보니까 절반의 진실만 보는 거죠.

영화는 대만에 사는 중산층 가족의 일상을 그리고 있는데, 결혼식으로 시작하여 장례식으로 끝난다. 영화의 시작과 끝을 결혼식과 장례식으로 설정했다는 것은 우리네 삶의 시작과 끝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탄생, 만남, 이별, 재회, 죽음 등 삶의 모든 과정에서 사람들은 가족의 일원이기도 하지만 저마다 개별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기도 한다.

영화의 큰 줄거리는 할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신 뒤 각자의 이유로 가족들이 겪는 일상의 변화를 따라가고 있다.

아버지 NJ는 회사 사업이 위기를 맞이한 가운데 처남 아디의 결혼식에서 헤어진 첫사랑 쉐리를 만난다. 그녀는 NJ에게 아직 미련이 남아 있고 NJ는 내적 혼란에 빠진다.

어머니 민민은 할머니가 쓰러진 뒤 심신이 지치고 불안과 우울 증세가 심해져 잠시 집을 떠나 절에서 지내게 된다.

큰 딸 팅팅은 자신의 실수로 할머니가 쓰러졌다는 죄책감에 빠진다. 팅팅이 쓰레기 버리는 걸 깜빡하여 할머니가 쓰레기를 혼자 버리려다가 쓰러지신 게 아닌가 생각한 것. 하지만 이와 동시에 친구의 남자친구를 좋아하다가 첫사랑의 진통을 겪기도 한다.

그리고 호기심 많고 어린 나이답지 않게 주관도 뚜렷한 막내아들 양양. 양양은 세상의 진실을 찾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가족들이 겪는 일상의 변화를 섬세하게 담아낸다. 현미경처럼 세밀한 연출은 등장인물의 미묘한 감정선을 정확하게 잡아내고 관객은 자연스럽게 그 감정에 몰입하게 된다.

그러한 섬세한 연출은 짙은 여운을 남기는 공감으로 연결되는데, 이는 극중 인물들의 '평범하지만 뼈 있는' 대사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어린 양양이 "우린 절반의 진실밖에 볼 수 없는 건가요?"라고 말하는 대목은 이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닫힌 마음 두드리기 

앞만 보고 뒤를 못 보는 절반의 진실. 양양은 나머지 절반의 진실을 캐기 위해 사람들의 뒷모습 사진을 열심히 찍는다. 사실 에드워드 양 감독이 이 영화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은 사람들이 놓친 '절반의 진실'이다. 양양이 찍은 뒷모습 사진같이 우리가 알고 있지만 보이지 않아 간과해버린 일상의 뒷모습 말이다.

영화는 남들에게 쉽사리 털어놓을 수 없었던 마음, 사람들이 놓친 절반의 진실을 화면 여러 곳에서 섬세하게 담아낸다. 의식을 잃든 할머니 앞에서 가족들이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는 장면, NJ가 첫사랑과 재회하면서 헤어진 진짜 이유를 말하는 장면 등. 
 
 하나 그리고 둘

하나 그리고 둘 ⓒ 리틀빅픽처스

 
NJ : 아침엔 늘 불확실함을 느끼며 일어나요. 이렇게 모든 게 불확실한데 왜 매일 일어나야 하는 걸까요. 한결같은 건 불확실함밖에 없는데 말이에요. 
 
 하나 그리고 둘

하나 그리고 둘 ⓒ 리틀빅픽처스

 민민 : 엄마한테 할 얘기가 없어. 아무리 생각을 해 봐도 매일 똑같은 이야기뿐이야.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 어쩜 이렇게 보잘것없지? 
 
 하나 그리고 둘

하나 그리고 둘 ⓒ 리틀빅픽처스

쉐리 : 그날 왜 안 왔어? 난 계속 기다렸어. 내가 얼마나 힘들어했을지 잘 알잖아.
NJ : 당신은 나에게 엔지니어가 되라고 했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말이야. 다른 사람 인생에 간섭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어. 나는 슬펐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그랬다는 게. 그게 나에게 얼마나 상처였는지 알아? 알겠냐고?
 
 하나 그리고 둘

하나 그리고 둘 ⓒ 리틀빅픽처스

 
앞만 보고 뒤를 못 보는 절반의 진실. 어찌 보면 당연할 수도 있지만 그 당연함은 점차 타성에 젖은 고정관념으로, 배려를 가장한 무관심으로 초점 없이 바라보기 쉽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믿음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 믿음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은 그 평온함과 아늑함에 길들여진다고나 할까.

하지만 양양은 그 당연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나머지 절반의 진실을 찾기 위해 열심히 뒷모습 사진을 찍는다. 학교에서 아이들과 선생님은 양양을 비웃기 일쑤다. 
선생님 : 대체 뭘 찍은 거야? 자, 다들 주목! 여기 아주 굉장한 예술가가 납셨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양양을 통해 질문을 한다. 사람들이 놓친 절반의 진실 속에 닫힌 마음을 여는 문고리가 있음을 알고 있는지. 
 
옛날 문은 요즘 문과 달리 틈새가 있어서, 문을 닫아도 그 틈새로 안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좋았다. 문을 걸어 잠갔으나 마음을 아주 잠근 것은 아니어서, 밖에서도 충분히 안의 사정을 엿볼 수 있었기에 닫혀도 아주 닫힌 게 아니었다. 닫힌 문안에는 한 번쯤 모르는 척 토라지고 싶은, 기어이 들키고 싶은 당신의 마음이 밖을 의식하며 돌아앉아 있는 것이다.

만약 마음에도 문고리가 있다면, 그것은 당신의 두 귀 어딘가에 붙어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말이 당신의 가슴을 두드린다면, 그것이 곧 문고리다. 타인에 대한 쓸모없는 말이 들릴 때 귓불을 잡아당겨 닫아 마음속으로 오해가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것, 그것 또한 문고리다.

닫힌 마음은 두드려야 열리느니, 누군가의 마음이 닫혀 있다면 당신이 충분히 그이의 마음을 두드리지 않았거나, 은근슬쩍 보여주는 마음의 뒤태를 들여다보지 않은 까닭이다.

(<나에게서 내리고 싶은 날>, 박후기 지음, 문학세계사, 2013)

뒷모습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나 그리고 둘

하나 그리고 둘 ⓒ 리틀빅픽처스

 
양양 : 할머니, 저는 아직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아요. 제가 나중에 커서 뭘 하고 싶은지 아세요?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싶어요. 그들이 모르는 걸 알려 주고 볼 수 없는걸 보여 주고 싶어요.
할머니, 보고 싶어요. 특히 올해 태어난 아직 이름도 없는 사촌 동생을 볼 때 더욱더 보고 싶어요. 그 갓난 아기를 보면 할머니가 '이제는 늙었나 보다' 하시던 게 생각나요. 저도 사촌 동생에게 말해 주고 싶어요. '나도 이제는 다 컸나 보다'

알고 있지만 보이지 않아 찾기도 힘든 절반의 진실. 그 난해하고 복잡한 삶의 단면은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이라는 제목의 의미에서도 나타난다.

영화 시작할 때 원제인 중국어권 제목인 '일일(一一)' 두 글자가 세로로 정렬되는데, 이는 보기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함축한다. '하나 그리고 하나(一一)'일 수도 있고 모아놓고 보면 '둘(二)'일 수도 있다.

개별적인 삶들이 모여 가족을 이루지만 그 가족 안에서 각자는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가족이기에 쓴소리도 하지만 가족이기에 차마 하지 못하는 말을 품고 살아가기도 한다. 서로에게 알면서도 모른 척 모르면서도 아는 척, 절반의 진실만을 품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이어나간다. 하지만 얽힌 실타래 같은 복잡 난해한 삶은 그러한 줄타기를 향해 수시로 경종을 울린다. 놓친 절반의 진실에 뒤돌아 서지 말라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할머니의 장례식 날. 양양은 할머니에게 보내는 글을 담담하게 읽어내려간다. 양양이 할머니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이 장면은 가슴 뭉클하면서도 짙은 여운을 남긴다. 3시간 내내 평온했던 감정이 갑자기 요동치며 콧등이 시큰해진다.

'사람들이 모르는 걸 알려 주고 볼 수 없는 걸 보여 주고 싶어요'라는 양양의 말처럼 우리는 서로의 뒷모습을 보아주며 다가갈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늙었나 보다'라는 할머니의 말을 이해한 양양처럼 서로를 이해하고 함께 어울릴 수 있다.

앞만 보고 뒤를 못 보는 절반의 진실. 그 뒷모습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동시에 아주 많은 것을 말해준다. 에드워드 양 감독은 그 뒷모습의 '침묵'을 섬세하면서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낸다. 양양이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오히려 따스하고 안심이 되는 것처럼.

세상에 넘치는 거짓과 위선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나마 정직하고 겸손할 수 있는 이유.

영화 <하나 그리고 둘>이 답한다.
묵직한 울림으로. 
자신의 뒷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타인에게 포착된 시선을 통해서만 자신의 뒷모습을 확인할 뿐이다. 누군가는 내 뒷모습에서 때로는 쓸쓸함을, 때로는 차가움을, 때로는 경쾌함을 읽어냈으리라. 타인의 시선에 무방비로 노출된 등을 가졌다는 것, 자신이 알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이 왠지 두렵고도 안심이 된다. 

얼굴은 표정을 통해 많은 것을 전달한다. 입가에 미소를 짓거나, 미간을 찡그리거나, 눈물을 글썽이거나, 눈을 휘둥그레 뜨거나 하는 방식으로 다양한 감정이나 생각을 표현한다. 그러나 때로는 밋밋해 보이는 뒷모습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거나 더 강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

이처럼 뒷모습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동시에 아주 많은 것을 말해준다. 무엇보다도 뒷모습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세상에 넘치는 거짓과 위선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나마 정직하고 겸손할 수 있는 것은 연약한 등을 가졌기 때문이다. 뒷모습을 가졌기 때문이다.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나희덕 지음, 달, 2017)
하나 그리고 둘 영화 리뷰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3 나에게서 내리고 싶은 날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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