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2020년 7월 22일 세계 3대 의학 전문지인 <랜싯(Lancet)>이 운영하는 <랜싯 글로벌 헬스 (Lancet Global Health)>에서 '원치 않는 임신과 임신중절에 관한 보고서'(Unintended pregnancy and abortion by income, region, and the legal status of abortion: estimates from a comprehensive model for 1990–2019)를 발표하였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2015-2019년 기간에 전세계적으로 가임기(15-49세) 여성 가운데 1000명당 64명(약 1억 2100만 명)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1000명당 39명(약 7400만 명)이 임신중절을 택하였다. 이는 1990-1994년 기간과 비교할 때 각각 19%와 2% 줄어든 수치이다. 자료를 보면 원치 않는 임신의 경우는 1990년 이후 꾸준히 줄고 있지만 임신중절의 경우는 거의 변화가 없다. 일견 원치 않는 임신의 경우가 20% 가까이 줄어들었음에도 임신중절은 여전한 상황이 매우 모순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변수들을 고려한 자료의 내용을 더 살펴보면 그 수치가 모든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역별로 볼 때 원치 않는 임신과 임신 중절의 경우가 급격히 줄어든 지역은 유럽과 북미권이다. 이 지역의 가임기 여성들은 2015-2019년 기간에 1000명당 35명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하고 17명이 임신중절을 택하였다. 이는 1990-1994년 기간과 비교할 때 각각 47%와 63%나 줄어든 수치이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이 임신 중절에 이른 경우도 같은 기간에 1000명 당 69명에서 49명으로 29%나 줄었다는 사실이다. 이 지역은 피임약 처방과 낙태 시술이 법적으로 허용되었음에도 이러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피임이나 임신중절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원치 않는 임신이 12% 줄었음에도 임신중절은 87%나 늘었다. 그리고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경우도 원치 않는 임신은 4% 줄었지만 임신 중절은 오히려 13%나 늘었다. 그리고 원치 않는 임신의 경우의 임신 중절도 16% 증가하였다. 이 지역은 피임은 비교적 자유로우나 임신 중절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거나 시술 절차가 매우 까다롭다.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임신 중절을 법적으로 제재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수치가 정확히 말해 준다. 낙태가 허용되는 국가들의 가임 여성들이 원치 않는 임신을 하는 경우는 위에서 말한 기간 내에 34%, 임신 중절은 43%나 줄었다. 그리고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이 임신 중절을 하는 경우도 13% 줄었다. 그러나 임신이 불법인 나라의 경우는 동 기간에 임신 중절이 12%, 원치 않는 임신의 임신 중절이 39%나 늘었다.

여기에 경제적 변수가 더해지면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임신 중절이 법으로 금지된 데다가 가난한 나라에서 사는 가임 여성의 원치 않는 임신과 임신 중절의 비율이 매우 높다. 반대로 임신 중절이 법으로 허용되고 부유한 나라의 가임 여성의 원치 않는 임신과 임신 중절 비율이 현저하게 낮다.
 
한국의 경우는 어떤가?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판결이 나오자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던 여성단체 회원들이 환호를 하고 있다.
 2019년 4월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낙태죄가 헌법불합치 판결이 나오자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던 여성단체 회원들이 환호를 하고 있다.
ⓒ 이희훈

관련사진보기

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에 관련된 형법 269조 1항("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과 270조 1항("의사, 한의사, 조산사, 약제사 또는 약종상이 부녀의 촉탁 또는 승낙을 받어 낙태하게 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에 대하여 찬성7 반대2의 의견으로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렸다.

헌법재판소는 판결문에서 그러한 법들이 "임신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제한하고 있어 침해의 최소성을 갖추지 못했고 태아의 생명보호라는 공익에 대해서만 일방적이고 절대적인 우위를 부여해 임신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했다"고 판결하였다. 그리고 "사회경제적 이유로 인해 낙태 갈등 상황을 겪고 있는 경우까지도 예외없이 임신한 여성에게 임신의 유지 및 출산을 강제하고, 이를 위반한 경우 형사처벌한다는 점에서 위헌이다"라고 지적했다. 이 판결에 따라 2020년 12월 31일까지 법 개정이 이루어져야 한다. 개정이 안 되면 관련 형법 조항의 효력은 자동 상실된다.

이 판결 이후 검찰은 12주 이내의 임신 중절의 경우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고 있다. 그리고 12-22주 이내의 임신 중절의 경우는 기소중지 처분을 하고 있다. 법개정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국회에서는 이 판결 이후의 후속 조치를 위한 법 개정을 서두르는 분위기가 전혀 없다. 무엇보다도 그 어떤 법 개정에 대해서도 보수 기독교계의 강력한 반발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차피 그냥 놔두어도 임신 중절에 대한 처벌 조항이 사라지는 것이니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 말자는 안이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러나 위에서 본 통계자료와 세계적인 추세를 놓고 볼 때에 임신 중절을 더 이상 특정 세력의 관점만이 아니라 좀더 폭 넓고 다양한 사회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시대정신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일부에서 말하는 임신 중절과 저출산 현상을 연계시키는 것도 통계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유의미한 주장이 아니다. 저출산은 오히려 경제적인 문제가 더 큰 변수가 된다. 한국의 자료를 보아도 동일한 결론이 나온다. 2019년 6월 국회 입법조사처가 발간한 '저출산 지표의 현황과 시사점'을 보면 임금 소득이 높을수록 혼인율이 높아졌다. 그리고 이미 그 이전인 2010년에 발표된 통계개발원의 연구보소서 '소득과 자산에 따른 차별 출산력'을 보아도 소득과 자산이 높을수록 출산력도 높아지고 있다.

여러 자료가 말해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제는 임신 중절과 관련한 담론은 개인의 죄를 묻는 것에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의 제도적 해결로 넘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임신 중절의 결정을 내리기까지 한 여성이 거쳐야 하는 과정의 신산스러움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한 취약한 상황에 놓인 여성을 '살인자'로 단죄하고 개인윤리적 차원의 책임을 묻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그러한 태도는 사회 제도와 관습을 빙자한 구조적 폭력의 틀에서 나오는 모순적이며 무책임한 것이다. 그 여성을 비난하기에 앞서 임신 중절을 결심하기까지의 과정에서 그 마음을 돌릴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먼저 살펴보고 그에 합당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종족보존은 모든 생명체의 본능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그러한 본능을 충실히 발휘하기 위한 출생과 육아에 적대적인 요소들이 너무 많다. 무엇보다 빈부격차와 성차별과 관련된 구조적 모순의 해결을 위한 제도적 접근이 우선되어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사회경제적 이유로 갈등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 엄연한 현실임에도 그런 것을 놔두고 여전히 '제일 만만한' 취약한 여성에게만 죄를 묻는다면 더 이상 제도적 개선을 위한 민주적 토론이 이어질 수 없고 감정의 배설이나 다름없는 말싸움의 악순환만이 이어질 뿐이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국회에서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른 후속 조치에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다. 국회는 이제라도 이 문제를 조속히 매듭짓고자 법개정 등의 조치를 위하여 노력하는 자세를 보여야 할 것이다.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연도별 콘텐츠 보기